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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초기불교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by Rihan 2022.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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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 (최동엽, 생각나눔, 2019) 중에서

 

산다는 것은 별것이 아니다.
마음이 끊임없이 대상을 찾아다니고, 찾아낸 그 대상에 반응하고, 그것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으로 인해 다시 무언가를 찾아다닌다.

그것을 우리는 살아간다고 하고..(후략)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결국 보는 것, 듣는 것, 맡는 것, 먹고 맛보는 것, 몸으로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을 생산하는 시스템이라고 본다면 스마트폰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자본주의의 노예,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을 유지하고 확대 재생산 하기 위한 소비형 부품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이런 마음을 통해 자주 호흡의 고요함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스마트폰에 헐떡거리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보고 들음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2. 2022년 10월 2일, 우 실라 사야도 법문으로부터

 

1)

제2선의 ‘희열’은 들뜸의 특성을 지닌다.

우리는 들뜸을 좋아한다.

제3선의 ‘행복’은 고요한 특성을 지닌다.
언뜻 보기에 고요함은 재미가 없고 감각적 욕망을 충족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고요함의 행복을 지루함으로 여기기 쉽다.

 

 

2)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필요한 ‘청정한 마음’은 장애를 버려야 가능하다.
욕심,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의 다섯 가지 장애가 있다.

‘버리는 것’은 애써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생각하며 후회와 미련을 가지기 쉽다.

'버리는 것'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므로 가능하다.
즉, 마음의 대상을 바꾸는 마음챙김을 하는 것이다.

 

 

3) 

위빳사나의 지혜로 알고 보기 위해서는 삼매의 힘이 필요하다.
삼매는 장애를 없앰으로써 가능하다.
청정한 마음은 버리는 것으로 가능하다.
수행자는 노력하고 노력하여 초선, 2선, 3선, 4선을 거치며 더 깨끗한 마음의 경지를 달성한다.

이렇게 더 깨끗하고 청정하고 집중된 마음으로 정신과 물질을 알고 보는 것이 위빳사나이다.

 

4) 

지혜는 아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아는 자와 보는 자의 차이는 두려움에 있다.
직접 보는 자는 병들고 늙고 죽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 
그는 무상을 꿰뚫어 보았고, 보아서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무상하여 변하고 사라지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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