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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초기불교

정신과 물질을 보는 것만으로 위빳사나라 할 수 없다.

by Rihan 2022.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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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이여, 예를 들면 깨끗하고 최상품인 유리 보석이 팔각형이고 아주 잘 가공되고 맑고 투명하여 모든 특질을 다 갖추었으며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실이나 갈색의 실로 묶여 있다 합시다. 

그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 손에 놓고서 ‘이 유리 보석은 깨끗하고 최상품이며 팔각형이고 아주 잘 가공되고 맑고 투명하여 모든 특질을 다 갖추었는데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실이나 갈색의 실로 묶여 있구나.’라고 살펴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지와 견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이 알음알이는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라고.”

- 디가 니까야 ‘사문과경(D2)’ §84

 


1. 
보통의 마음으로 위빳사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최상품의 유리 보석처럼 맑고 투명하고 청정한 마음일 때 위빳사나를 해야 한다.
장애가 없고, 집착을 버렸고, 더 높은 삼매의 경지로 깨끗하고 집중된 마음의 상태에서 정신과 물질을 알고 본다.

 


2. 
정신과 물질을 보고 있더라도 그것을 무상, 고, 무아로 보고있지 않으면 위빳사나라고 할 수 없다.
단지 마음챙기고 알아차리고 있을 뿐이다.

 


3. 
마음챙김(sati)은 正念, mindfulness로도 번역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sati를 ‘마음이 대상을 챙김’이라 정의한다.

대상을 챙기는 심리현상이다.

마음챙김은

1) 대상에 깊이 들어가고

2) 대상을 거머쥐고

3) 대상에 확립되어

4) 해로운 표상이나 해로운 심리현상들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마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해로움에서 마음을 보호하기 때문에, 사띠는 선업의 결과를 낳는다.

영어로는 'remembers to observe', ‘the active, watchful mind’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Sati’ is an essential part of Buddhist practice in which one maintains a lucid awareness of bodily and mental phenomena or dhammas, a spiritual or psychological faculty in which one 'remembers to observe'.

- Wikipedia, ‘Sati (Buddhism)’

 


4. 
알아차림(sampajañña)은 正知, clear comprehension으로 번역되며, '지혜를 동반한 사띠'가 알아차림이다.
주로 사띠와 함께 짝을 이뤄 언급된다.

사띠가 마음이 대상을 챙기는 것을 기억하고 대상을 거머쥐고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삼빠자나는 대상을 완전히 이해하는 지혜의 마음이다. 

여기서 지혜는 ‘무엇이 이익이 되고 무엇이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친척들이 평소 행하던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행하던 어린 아이들이 스님을 보고 기뻐서 즉시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보시하거나 인사를 드린다.”고 지혜와 결합하지 않은 욕계 유익한 마음을 설명한다.

이 아이는 선업을 행하였지만 ‘보시하면 공덕을 쌓는다’와 같은 작동 원리는 완전히 알지 못한다.

이것이 알아차림이 없는 선업의 마음일 것이다.

 


5. 
안으로, 밖으로 정신과 물질(=오온)을 본다고 해서 위빳사나라 할 수 없다.

업, 마음, 온도, 음식의 원인으로 물질이 일어나고, 

토대, 대상, 주의, 촉, 빛과 공간 등의 조건, 현재와 과거의 업을 원인으로 정신이 일어나고

일어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하더라도 그것을 위빳사나라 할 수 없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것을 무상, 고, 무아로 보고 있어야 비로소 위빳사나를 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생멸을 보면서 무상, 고, 무아를 보지 않는다면 위빳사나가 아니며, 

무상, 고, 무아를 보면서 생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6. 
무아이기 때문에,

정신과 물질이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 흐름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상이고 고이다.

위빳사나 마음은 선업을 짓는 욕계 유익한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우 실라 사야도의 2022년 10월 16일 향천선원 법문 내용을 정리하고, 스스로 조사하여 덧붙인 내용입니다.
저의 사견이 들어가 있을 수 있으며, 정확하지 못한 내용이 있다면 정리자의 부족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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