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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초기불교

일상에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 (좌선을 통한) 위빳사나

by Rihan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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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잘 갖춥니까?

대왕이여, 여기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가사, 발우, 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걸으면서, 서면서, 앉으면서, 잠들면서, 잠을 깨면서, 말하면서, 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잘 갖춥니다.

- 디가 니까야 ‘사문과경(D2)’ §65

 

1. 
위빳사나에서 말하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과 매우 다른 수준이다.

위빳사나에서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찰나에 일어나고 머무르고 사라지는 법을 보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찰나는 75분의 1초에 해당된다고 하며,

물질이 머무는 찰나에 마음은 16번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진다고 하므로 심찰나는 1,200분의 1초에 해당한다.

봐야 하는 대상인 법은 일체법(sabbe-dhammā)이다.
초기불교는 일체법을 마음, 마음부수, 물질, 열반의 82가지 법으로 나눈다.

 

보는 대상은 매우 미세하고, 대상이 생멸하는 순간은 극히 짧다.
따라서 위빳사나에서 찰나에 생주멸하는 법을 본다는 것은 매우 미세하고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행위다.

보통의 주의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2. 
이러한 맥락을 이해한다면, 일상에서 일상의 움직임을 위빳사나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위빳사나가 가능하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경지다.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순 없다.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앉아서 위빳사나를 한다.
고요히 앉아 관찰하고 내관한다.

 


3. 
위빳사나 수행자는 조용히 앉아 법의 사라짐을 보고 있다.
모든 존재는 매 순간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제대로 위빳사나 하고 있는 수행자는 일상에서 정신적 고통이 없다.

모든 약속은 매 순간 사라지고 있는 존재가 보증하는 불완전한 것이다.
지켜지지 않더라도 성낼 이유가 없다.

어떤 것이 나타나는 것도 원인이 있어 나타나는 것이지,

오온의 집적인 내가 온전히 만드는 것이 아니다.


4. 
일상에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익’과 ‘때’를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이익이 되는지 관찰한다.
지금이 적절하고 이익이 되는 때인지 관찰한다.

선업의 결과가 있는 것이 이익됨이다.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알아차림, 삼빠자나(sampajañña)다.

 

 

5.
일상에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는 더 수승한 방법은 '오온'이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 라는 개념론적 존재가 아닌 오온이 행하는 것을 분명히 안다.
더 나아가 12처, 18계, 인과를 알아차린다.

다만 ‘오온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더라도 이것이 위빳사나는 아니다.
위빳사나는 법이 찰나에 생주멸하는 것과, 그것의 무상 고 무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보기 위해 우리는 조용한 데 앉아서 위빳사나 한다.

 

 

 

우 실라 사야도의 2022년 10월 23일 향천선원 법문 내용을 정리하고, 스스로 조사하여 덧붙인 내용입니다.
저의 사견이 들어가 있을 수 있으며, 정확하지 못한 내용이 있다면 정리자의 부족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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