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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초기불교

쉰다는 것은 마음이 탐욕과 성냄의 심리 현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by Rihan 202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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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쉬고 있는 것일까?

잠을 잔다면 육체적으로 휴식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복잡해서 뭔가 다른 대상을 찾는다는 것은 쉬는 게 아니고 대상이 바뀐 것 뿐이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대상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 대상이라는 것들은 대부분 탐욕과 성냄을 실어 나르고 있다.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서 쉰다고 하지만 음악에 대한 탐욕의 마음이 일어나고 있다.
탐욕과 성냄의 마음은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기 마련이다.

….(중략)…

이런 의미로 현대인들은 제대로 쉬고 있지 못하다. 쉰다는 것의 의미도 모르고 있다.
제대로 쉰다는 것은 마음이 탐욕과 성냄이라는 심리 현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벗어나기 위해서는 탐욕과 성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어떤 안전한 대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숨’이다.

 

게임이나 영화, 드라마는 탐욕과 성냄을 그리고 집착이 붙기 알맞은 대상이다.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통해 재미를 느낀다는 것이 사실상의 에너지 소모이다.
그래서 보고 나면 피곤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숨’을 본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
재미는 없지만,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마음이 호흡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진정으로 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을 쉬게 만드는 것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는다.

당신은 언제든 어디에서든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는 당신이 쉴 수 없기 때문이다.

눈은 봐야 하고, 귀는 들어야 하고, 코는 냄새를 맡아야 한다.
설혹 이것들을 다 막아놓더라도 당신은 생각이라는 것을 통해서 탐욕과 성냄, 들뜸이라는 여러 가지 해로운 심리 현상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편안한 대상으로 옮겨놓는 곳이 진정한 휴가이고, 휴식이다.
그것은 바로 ‘숨’을 보는 것이다.

 

명상의 행복은 조건 없는 행복이다.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느낌을 탐하는 것이다.
즉 감각적 쾌락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행복도 행복이라고 하며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감각적 행복을 불완전한 행복이라고 보는 이유는, 그 감각적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조건이라는 것을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불교는 말한다.

골프의 스윙을 맛보기 위해서는 새벽같이 일어나야 한다.
혀에서 오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맛집을 찾아가야 하고, 긴 줄을 서야 한다.
쇼핑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돈을 버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중략)…

이렇듯 감각적 쾌락의 행복을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고통을 감내한 보람도 없이 감각적 쾌락의 행복은 일어났다가는 이내 사라져버린다.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조건을 부여해야 한다.
다시 예약해야 하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여기저기 여행지를 알아봐야 한다.

이것이 참으로 진정한 행복인가?

…(중략)…

많은 사람이 ‘힐링’이라는 말을 한다.
뭔가 삶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나 불만족, 괴로움 등을 치유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은 힐링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다.
힐링을 위해서 여행을 간다면 그것은 또 다른 조건의 부여이고, 또 다른 대상을 통한 정신적 스트레스일 뿐이다.

우리가 대상에 계속 반응하고 있는 한 진정한 힐링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숨이라는 대상을 보는 데는 조건도 없고, 숨의 좋아함과 싫어함도 없다.
단지 그 숨을 아는 마음, 그리고 그 숨에 마음이 기대어 있을 뿐이다.

그러한 마음의 상태만이 진정한 힐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상태가 길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명상을 통한 조건 없는 행복, 진정한 행복이다.

자 이제 당신 앞에 ‘숨’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을 외치면 당신은 고요한 행복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발을 내딛는 것이고, 
아니면 다시 칼 끝에 묻은 꿀과 같은 감각적 행복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갈림길에 서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사는 이 세상에 행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조건 지어져있기에 완전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식의 맛을 통해 행복을 느낄 만하면 배가 불러서 그 행복감이 사라져버리고,
새 차를 사서 만족스럽다 싶으면 어느새 다른 차를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고,
자식들 덕분에 행복했지만 그 역시 떠나가고 변해버리고,
청춘인가 싶었는데 어느덧 노인이 되어버리기에 우리의 행복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다시 태어남은 이 불완전함을 다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최동엽, ‘숨’, 생각나눔(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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