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마 1권 285쪽을 보면 아래와 같이 말한다.
“사견과 자만은 상반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이 둘이 동시에 생기지는 못한다.”
필자는 이 부분을 읽으며 ‘사견과 자만이 무엇이 상반되는 성질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는 것과 ‘이것은 나다’ 혹은 ‘나보다 뛰어나다, 동등하다, 못하다’라는 것이 무엇이 상반된 성질이어서 함께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얼핏 보면 이 두 가지는 상반되기보다는 오히려 비슷하거나 함께해야 하는 마음부수가 아닌가?
다음은 이와 관련하여 선배 도반과 우 실라 사야도께 궁금한 것을 물어가며 스스로 정리해본 내용들이다.
1.
필자는 아래 글에서 사견과 자만에 대해 다룬 바 있다.
사견, 더 구체적으로 유신견은 오온을 나라고,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온에서 영원불멸하고 존재론적인 실체,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견해다.
자만은 두 가지 문구로 드러난다.
‘나와 동등하다, 나보다 뛰어나다, 나보다 못하다’라는 비교하는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관념으로서 자만이다.
위 글에서는 유학이 유신견을 부수었음에도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이 있기 때문에 미세한 욕구(= 탐욕, 갈애) 역시 존재하며,
이것들은 모든 무명을 제거하여 ’나‘라거나 ’내 것‘이라는 관념이 남아있지 않은 아라한에 이르러서야 모두 제거할 수 있음을 다뤘다.
위 글에서는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유신견이 없으면 오온을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온에 대해서 ’나는 있다‘ 라거나 ’오온이 나다‘라고 생각하는 관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앞서 경에서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구문을 각각 탐욕(혹은 갈애)과 자만과 사견의 세 가지에 배대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나는 있다’, ‘오온이 나다’, ‘이것은 나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자만이다.
유신견을 풀었다고 해서 나라는 관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미세한 자만과 미세한 욕구가 남아 있으므로 ‘이것이 나’이고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관념도 남아 있다.
무학인 아라한은 이러한 미세한 번뇌조차 모두 부수어버린 분이다.
2.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견해’와 ‘나는 있다’라고 여기는 미세한 관념이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견해가 부수어졌음에도 미세한 관념은 왜 계속 남아있는가?
우 실라 사야도는 그것을 인식과 마음의 전도, ‘위빨라사(vipallāsa, 顚倒)’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습관’ 때문이다.
보통 일반 사람들에게 사견이 있기 때문에 자만심이 생깁니다.
사견이 없어도 산냐(인식)으로 너와 나라고 자주 자주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전부터 이렇게 너와 나라고 자주 나타나고 비교했기 때문에 이후에 사견 없이도 자만심이 생깁니다.
‘반대로 보는 것’을 vipallāsa라고 빠알리말로 이릅니다.
산냐 위빨라사, 찟따 위빨라사, 딧티 위빨라사라고 단계적으로 깊이 있게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면 딧티 위빨라사라고 반대로 보고 있는 사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찟따, 산냐 위빨라사는 습관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딧티 위빨라사처럼 ‘너와 나가 있다’라고 깊이 있게 믿고있는 것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갑자기 비교해서 ‘너와 나’를 생각하는 산냐라든지 찟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후에만 자만심이 생기기 때문에, 동시에 나타나지 않고 전에 먼저 사견이 나타납니다.
이 사견은 딧티 위빨라사처럼 깊이 있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 옛날에 습관적으로 있는 산냐와 찟따인 것으로, 사견 같은 비슷한 생각이 나오고 이후에 자만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필자는 사견 없이 자만이 있는 것을 이러한 ‘습관’의 맥락으로 이해한다.
엄밀히 보았을 때는 ‘나’라는 존재가 없음을 알지만, 습관적으로 ‘나’라거나 ‘내 것’이라는 관념이 남아있어 그를 바탕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참고로 청정도론에서 위빨라사, 전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청정도론 XXII]
53. 6️⃣ 전도(顚倒):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고, 부정한 대상에 대해서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아고, 깨끗하다고 여기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전도라 한다.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의 세 가지가 있다.
딧티 위빨라사는 왜곡된 인식, 산냐 위빨라사로 이어질 것이다.
산냐 위빨라사는 생각하는 방식, 찟따 위빨라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전에 잘못된 견해로 ‘나’와 ‘내 것’에 대해서 축적된 산냐, 찟따 위빨라사는 딧티 위빨라사가 제거되었음에도 습관처럼 작용할 것이다.
반대로 위빳사나는 위빨라사 현상이 일어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법을 알고 보는 것일 것이다. 위빨라사와 위빳사나에 대해 검색 중 아래 글을 발견하여 인용한다.
이것은 <위빨라사 현상>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이러한 현상이 특별한 조건에서만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 전 생애에 걸쳐 누구에게나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장이 좀 심한 것 같나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이와같은 '인식의 오류'는 중생계의 보편적 특성입니다.
대상을 순간순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위빳사나'라고 하지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위빳사나 지혜'라고 합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순간적입니다. 찰나지간이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대상이 거울에 비춰지는 순간, 거울에 때가 끼이는 것처럼 잠재돼 있던 고정관념ㆍ선입견ㆍ통념ㆍ인습 등이 찰나지간 대상을 왜곡시켜 버립니다. 잘못된,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합니다.
…(중략)…
절대불변의 가치란 이 중생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건을 따라서 끊임없이 변하는 게 중생계의 가치관입니다. 그것은 <위빨라사 현상> 때문입니다. 착각하고, 환각하면서 <위빨라사 안경>을 낀 채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변하는 것을 두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결국 헤어지고 말 것을 영원한 내것이라 움켜쥔 채 살아갑니다.
이 우주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곳입니다. 하나는 명칭ㆍ인습ㆍ관습ㆍ선입견ㆍ고정관념ㆍ착시ㆍ착각에 의해 형성된 가상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명칭ㆍ개념화되기 이전, 즉 <위빨라사 현상> 이전의 본래세계ㆍ절대세계ㆍ실재세계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세상은 이름을 빌려서 가상으로 존재하는 가상세계입니다. 선입견ㆍ고정관념ㆍ착시ㆍ착각에 의해 존재하는 <위빨라사의 현상세계>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왜곡되거나 개념화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수행이며, '있는 그대로의 본래 모습을 바르게 이해하는' 수행입니다. 몸과 마음에서 비롯된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 함으로서 마침내 진리의 참성품인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해내는 수행입니다.
뿐만 아니라 위빳사나 수행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왜곡된 사실 그대로를 더 이상의 왜곡없이 바라보는 수행입니다. 또한 왜곡되어지는 과정과 개념화되는 과정을 여실히 들여다보는 수행입니다. 왜곡된 현상에 대한 찰거머리같은 집착과 어리석음을 바르게 보고 이해하는 수행입니다.
- 《'위빳사나' 와 '위빨라사'에 대하여》 / 빤냐완따 스님
3.
선배 도반께서는 초기불전연구원 카페에 있었던 관련된 논의들을 소개해주셨다.
필자와 같이 ‘사견과 자만’에 대해 물어보는 글이 있었는데, 이 글의 댓글 중에 아래와 같은 댓글이 있다.
“‘사견은 세속의 오온을 '자아(atman)'라 집착하는 것이고, 자만은 세속의 오온만을 '나'라고 인식한다.’라고 아비담마해설서 1권 255쪽에 나옵니다.”
아비담마해설서 1권은 아비담맛타상가하와 그 복주서인 아비담맛타상가하 바사띠까를 번역한 책이라고 한다.
선배 도반께선 이 책의 해당 부분을 발췌해서 알려주셨다.
사견은 세속의 오온을 ‘아트만(자아)’이라 집착한다.
자만은 이 세속의 오온만을 ‘나’라고 인식한다.
이처럼 사견과 자만이 집착하여 인식하는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 집착하는 법은 세속의 오온으로 동일하다.
즉 ‘오온에 집착하는 모습은 성질 서로 간에 겨룸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견과 자만심은 ‘겨룸이 있음’으로 지낸다.
그러므로 ‘궁리가 같으면 적’이라고 하듯 사견과 결합된 곳에 자만이 함께 결합하지 못한다.
자만과 결합한 곳에 사견이 결합할 수 없다.
이처럼 자만이 사견과 결합하지 못한다면 진심(嗔心) 등과는 결합할 수 있는가?
‘집착하여 인식함’에는 자신을 좋아하는 탐심이 근본으로 들어있기에 탐심이 없다면 자만이 일어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사견과 함께하지 않는’ 탐심만이 자만이 일어나는 가까운 원인이다.
탐심은 모든 탐욕에 뿌리한 마음,
사견은 탐욕뿌리에서 결합한 마음(삼빠웃따),
자만은 탐욕뿌리에서 결합하지 않는 마음(윕빠웃따)과 함께하기 때문에
결합한 마음을 앞에 두어 탐심, 사견, 자만을 차례로 보였고 진심을 뒤에 두었다.”
- 강종미 편역, ‘아비담마해설서 Ⅰ’ 255~256쪽, 도다가 마을
더하여 해당 글의 다른 댓글에는 견해, 인식, 마음의 전도에 대해서 다룬다.
아비담마길라잡이 제7장에서 사견에는 여러 측면이 나오고, 「범망경」에는 62견이 나옵니다.
사견은 견해의 전도에 관계하고, 자만은 인식 내지 마음의 전도에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견해와 인식과 마음은 다르듯 그들의 전도도 다릅니다.
『청정도론』22장 §68에 보듯이 전도에는 (i)견해와 (ii)인식과 (iii)마음의 전도가 있는데, 인식과 마음의 전도는 훨씬 뿌리깊은 것입니다.
인식과 마음은 모든 마음에서 함께하는 만큼, 전도될 위험도 높을 듯 합니다.
예류도의 지혜로, 모든 견해의 전도는 영원히 제거한다고 합니다.
인식과 마음의 전도의 일부는 불환도에서, 나머지는 아라한도의 지혜에서 영원히 제거된다고 합니다.
역시 사견도 예류도의 지혜에서, 자만은 아라한도의 지혜에서 완전히 제거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비유를 들자면 양파 껍질이 있는데 겉 껍질은 사견, 안 껍질은 자만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견은 오온에 대한 잘못된 견해, 자만은 오온에 대한 잘못된 인식 내지 마음에 작용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_()_
4.
선배 도반께서 알려주신 초불 카페의 다른 글에는 필자가 앞서 말한 자만의 두 측면을 아예 ‘존재자만’과 ‘비교자만’으로 명명한다.
존재자만과 비교자만은 필자가 자만에 대해서 이해한 바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워딩이지만, 실제로 교학과 수행에서 쓰이는 워딩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자만의 두 측면을 살펴보기에는 도움이 되는 단어일 것이다.
질문자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재생연결식에서 이번 생이 시작될 때 갈애가 먼저 생기고,
존재자만(내가 있다), 비교자만(낫다, 동등하다, 못하다)이 생긴 후에 유신견이 생기고,
상견, 단견, 도덕적 회의가 생긴다고 요약해도 될까요?
자만과 사견의 비동시성의 근거를 일깨워주시려 한 점이 역력히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비동시성이 대상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신 부분은 좀 납득이 안 갑니다.
자만 마음부수의 대상은 탐욕 마음부수,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의 대상이기도 하고,
또한 사견 마음부수의 대상은 마찬가지로 탐욕 마음부수,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의 대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 길라잡이 249쪽에 보면, 사견과 자만이 상반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 두 마음부수가 그 성질이 어떻게 상반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댓글에 따르면 갈애, 자만, 사견의 순서는 보디 스님의 가르침인 듯 하다.
첫째 질문의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 보디 스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갈애, 자만, 사견의 순서에는 분기점이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존재자만(내가 있다)'입니다.
그러니까
순서 A: '1.갈애->2.존재자만(내가 있다)->3.비교자만'
순서 B: '1.갈애->2.존재자만(내가 있다)->4.유신견->5.상견 또는 단견->(5.의 단견에서) 6.도덕적 허무주의'
와 같이 됩니다.
순서B에 대해 명확히 말씀드리면 유신견에서 상견 또는 단견이 생기는 것이고, 다시 단견에서 도덕적 허무주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견과 자만의 대상이 다름과 상반된 성질에 대한 답변자의 견해가 이어진다.
참고차 인용한다.
둘째로 자만 마음부수와 사견 마음부수가 그 대상이 다르단 것이
한 심찰나에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근거로서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탐욕 마음부수가 자만 마음부수와 결합하기도 하고 사견 마음부수와 결합하기도 하는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음과 마음부수들은 1심찰나의 수명을 가지고 찰나생, 찰나멸로 상속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순간에 한 인식과정에서 탐욕 마음부수가 자만 마음부수와 동시 생멸하고 또 다른 인식과정에서 탐욕 마음부수가 사견 마음부수와 동시 생멸할 때,
이 두 가지 탐욕 마음부수들은 완전히 서로 다른 탐욕 마음부수들입니다. 찰나생, 찰나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만 마음부수의 대상은 '나'라는 빳냣띠입니다.
사견 마음부수의 대상은 '나'에 대해 '철학적으로 발전된 삿된 견해'입니다.
분명히 두 가지 마음부수의 대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사견이나 자만과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탐욕 마음부수는 이 둘의 대상 모두를 1심찰나에 딱 1개씩으로만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상) 제4장을 보시면 한 인식과정의 대상은 반드시 동일한 어느 하나입니다.
따라서, 그 인식과정에 포함된 모든 마음들도 그 동일한 대상을 대상으로 가집니다.
자만 마음부수와 사견 마음부수는 서로 그 대상이 다릅니다. 절대로 동일한 대상이 아닙니다. 결코 동시에 발생할 수 없습니다.
셋째, 자만 마음부수와 사견 마음부수가 구체척으로 어떻게 상반되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셨습니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249쪽에 의거해 의문을 제기하셨으므로 길라잡이에서 발췌를 하는 것이 맞사오나 현재 외부에 있는 관계로 길라잡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이폰에 있는 CMA를 찾아보니 비슷한 내용이 나와서 이것을 기준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Wrong view, conceit: Both of these factors are found only in the cittas rooted in greed, for they involve some degree of holding to the five aggregates.
However, the two exhibit contrary qualities, and thus they cannot coexist in the same citta.
Wrong view occurs in the mode of misapprehending, i.e. interpreting things in a manner contrary to actuality;
conceit occurs in the mode of self-evaluation, i.e. of taking oneself to be superior, equal, or inferior to others"
(Bhikkhu Bodhi, ‘a Comprehensive Manual of Abhidhamma’ 95~96쪽 발췌, general editor)
이 발췌문에서 However를 기준으로 같은 점, 차이점이 나옵니다. 바로 이 차이점을 얘기하면서 '상반된 성질' 얘기가 나온 것입니다.
다음은 이 발췌에 대한 해석입니다.
"사견, 자만: 이 마음부수들 둘 다 오직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들에서 찾아진다.
그것들이 어느 정도 오온을 거머쥐는 것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은 상반되는 성질들을 보인다.
따라서, 그것들은 똑같은 마음에 공존할 수 없다.
사견은 잘못 파악하는 것, 즉 실재와 반대되는 방식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형태로 일어난다;
자만은 자기 평가, 즉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뛰어나거나 같거나 못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However 앞의 내용에서 사견과 자만의 공통점이 나옵니다.
두 가지 모두 오온을 거머쥔다는 것입니다.
이 오온을 거머쥔다는 공통점 때문에 사견 마음부수와 자만 마음부수 둘 다 탐욕 마음부수와 함께 일어난다고 얘기합니다.
However 뒤의 내용에서는 사견과 자만의 차이점, 즉 상반된 성질을 얘기하면서
단순히 사견과 자만의 고유성질의 차이점만 얘기할 뿐입니다.
그리고, 서로 고유성질이 다른 마음부수들이기 때문에 동시에 발생할 수 없다는 논지를 취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니까 사견 마음부수와 자만 마음부수는 오온을 거머쥔다는 공통점 때문에 두 가지 다 탐욕 마음부수와 함께 일어나야 하는데
이 두 가지 마음부수의 고유성질이 달라서 함께 동시에 일어나지 못한다는 논지로 이해됩니다.
…(중략)…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해체해서 보기'를 실천하면서 파악하게 된 개인적인 이해입니다.
근거나 출처를 모르기 때문에 말씀올리는 것을 망설였으나 법우님께서 궁금해하시는 '상반된 성질'에 대해 너무나 그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므로 그냥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사견이란 것은 비구 보디 스님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존재 자만(내가 있다)'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범망경(D1)의 62가지 삿된 견해에서 보이듯이 사견의 적용 범위는 나 자신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아트만 같은 영원한 자아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자아가 단멸한다고 하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도 다 똑같이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 사견은 '존재 자만(내가 있다)'에서 비롯됐지만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또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논리적인 근거나 출처를 들어 증명하고자 노력합니다.
한편, 자만은 '존재 자만(내가 있다)'이든 여기서 파생된 '비교 자만(열등, 동등, 우등)'이든 다분히 주관적입니다.
오로지 최고 중심에는 나 자기 자신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이론 따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든지 편파적이라든지 나나 나의 것이 모든 사고의 중추가 됩니다.
즉 자만은 자기 중심적이고 주관적이며 매우 감정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이상의 말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견 마음부수: 일반적, 객관적, 논리적, 이성적 등등
자만 마음부수: 개인적, 주관적, 감정적, 감성적 등등
이런 식으로 파악하시면 이 두 가지 마음부수들의 상반된 특성이 아주 극명하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와 같은 개인적인 이해에 대한 출처나 근거를 알지 못합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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