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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아비담마

여운의 마음 11가지는 각각 기능적으로 어떻게 다를까?

by Rihan 202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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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찰나에 일어나는 특정한 마음은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엄격히 정해진 법칙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런 정해진 법칙을 니야마(niyama)라 한다.

-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426쪽 -


필자가 여운의 마음을 알게 되면서 궁금했던 것이 ‘여운의 마음 11가지가 각각 기능적인(functional)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였다.

오문의 대상이 매우 크거나 의문에서 대상이 선명하면 여운의 마음이 2심찰나 동안 일어나는 것은 알겠는데,
여운의 마음 11가지는 각각 어떤 법칙으로 다르게 일어나고, 각각 역할이 다른가?

먼저 선배 도반께서 알려주신 여운의 마음의 기본 역할은 다음과 같다.

여운의 마음은 완충 작용을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속행의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다음 심찰나에 바로 바왕가로 들어가지 못하고 여운의 마음이 2심찰나 동안 일어난다는 뜻이지요.


여운의 마음은 바로 앞에서 일어난 속행(자와나)이 가졌던 그 대상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아 일어난다고 한다
두 심찰나 동안 일어나고, 오문으로 큰 대상이 들어왔을 때나 마음에 선명한 대상이 나타났을 때만 일어난다.
그 외의 인식과정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339쪽)

이것은 자와나가 일곱 번 일어나고 사라진 뒤 바로 존재지속심이 일어나기에는 대상이 너무 크거나 분명할 경우에 나타나는 마음의 역할이다.
즉 자와나가 너무 강해서 뒤이어 곧바로 바왕가의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고 두 번 단지 그 자와나의 대상을 대상으로 가져서 일어나는 일련의 마음일 뿐이다.

-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339쪽 -


그렇다면 종전의 의문으로 돌아가서, 여운의 마음 11가지는 어떻게 다르게 일어나는가?
그 핵심은 ‘대상’에 있다.

여운의 마음은 과보의 마음이다.
과보의 마음은 업에 지배되고, 대상의 성질과 일치하게 된다.

§17. 여운(tadārammaṇa)의 분석

모든 경우에 대상이 원하지 않는 것일 때 다섯 가지 알음알이[전오식]와 받아들이는 마음과 조사하는 마음과 여운의 마음은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다.

[보통으로] 원하는 것일 때 그들은 유익한 과보의 마음이다.

[대상이] 열렬히 원하는 것일 때 조사하는 마음과 여운의 마음은 기쁨이 함께한다.

그곳에서도 기쁨이 함께한 작용만 하는 속행 끝에는 여운의 마음이 기쁨과 함께한다.
평온이 함께한 작용만 하는 속행 끝에는 여운의 마음이 평온과 함께한다.

1. 대상이 원하지 않는 것일 때: 감각의 대상은 원하지 않는 것, 보통으로 원하는 것, 열렬히 원하는 것의 세 가지로 분류가 된다.
이처럼 원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둘로 나누어서 분류하고 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원하지 않는 것’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설명한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대상에 드러나는 이러한 차이점은 그 대상에 본래부터 내재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대상을 경험하는 자의 기질이나 선호도에 따라서 다르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중략)…

그 사람이 아무리 그렇게 보더라도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선택과는 상관없이 대상은 그 자신의 고유성질에 따라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대상이 가지는 고유성질의 차이는 보통사람에 의해서 알아진다고 한다.

계속해서 ‘삼모하위노다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경리나 공무원이나 중산층의 사람들이나 땅 주인이나 상인들이 어떤 경우에 원하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 원하지 않는 것인지 아는 것으로써 구분할 수 있다.”


대상은 고유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고유성질은 그 시절 보통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대상으로 분류된다.
원하지 않거나 원하는 대상을 경험하는 것은 그 자신의 업에 의해 지배된다.
대상은 업이 과보의 마음으로 익어서 나타나도록 하는 매개의 역할로 필자는 이해하며, 과보의 마음은 대상의 성질과 일치된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428-429쪽)

해로운 업의 힘으로 원하지 않는 대상과 마주친다.
해로운 과보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여운의 마음은 과보의 마음이다.
따라서 이 경우 11가지 여운의 마음 중 ‘해로운 평온 조사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원하지 않는 대상을 마주쳐서 일어나는 여운의 마음은 모두 이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429쪽)

유익한 업의 힘으로 보통으로 원하는 대상과 마주친다.
유익한 과보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여운의 마음은 과보의 마음이다.
따라서 이 경우 11가지 여운의 마음 중 ’평온‘이 함께하는 1가지 원인 없는 과보의 마음과 4가지 원인 가진 과보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보통으로 원하는 대상을 마주쳐서 일어나는 여운의 마음은 모두 이 마음들이 일어날 것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429쪽)

유익한 업의 힘으로 열렬히 원하는 대상과 마주친다.
유익한 과보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여운의 마음은 과보의 마음이다.
따라서 이 경우 11가지 여운의 마음 중 ‘기쁨’이 함께하는 1가지 원인 없는 과보의 마음과 4가지 원인 가진 과보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열렬히 원하는 대상을 마주쳐서 일어나는 여운의 마음은 모두 이 마음들이 일어날 것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429쪽)


그러나 속행은 다르다.
과보의 마음은 대상의 성질에 지배되지만, 속행은 인식과정에서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이다.
전향은 무기의 마음, 전오식과 받아들임, 조사, 여운의 마음은 모두 과보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험자의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상이 열렬히 원하는 것일지라도 자와나들은 평온과 함께하는 유익한 마음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해로운 마음들로서 무관심한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을 뵙고도 회의론자들에게는 의심과 함께하는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고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서도 수행하는 스님들에게는 평온이 함께하거나 지혜와 결합된 유익한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과 같다.

-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430쪽 -


따라서 필자의 견해로는 속행과정이 단속되면 인식과정 전체가 단속되어 해로운 대상을 조우하더라도 유익한 업을 지을 수 있고,
속행과정에서 지혜가 함께한 마음이 일어나면 그 찰나의 인식과정은 어떤 대상을 조우하더라도 지혜롭고 유익한 업을 만드는 인식과정으로 이해한다.

속행의 마음은 7가지가 모두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 모두 같은 성질의 것이므로,
여기서 첫 속행의 마음을 유익하거나 지혜로운 마음으로 결정하게끔 하는 심소법이 ‘마음챙김’이자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이라고 추정한다.

[ 청정도론 I ]

57. 그런데 여기서 눈의 감각기능 자체를 가지고 단속이나 단속하지 않음을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눈의 감성을 의지하여 마음챙김이나 혹은 잊어버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상인 형상이 눈의 영역에 나타날 때 존재지속심이 두 번 일어난 뒤 멈추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노의 요소가 전향의 역할을 하면서 일어났다가 멸한다.
그 다음에 눈의 알음알이가 보는 역할을 하고,
그 다음에 과보로 나타난 마노의 요소가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고,
그 다음에 원인 없는 과보로 나타난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가 조사하는 역할을 하고,
그 다음에 원인 없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가 결정하는 역할을 하면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 직후에 속행이 일어난다.
여기서 존재지속심의 시기나 전향 등의 어느 시기에도 단속이나 단속하지 않음은 있지 않다.

그러나 속행의 순간에 만약 나쁜 계행이나 잊어버림이나 알지 못함이나 참을성 없음이나 게으름이 일어나면 단속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이와 같이 할 때 비로소 눈의 감각기능을 단속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58. 왜 그런가? 이와 같이 되면 문도 보호되지 않고, 존재지속심도, 전향 등의 인식과정들도 보호되지 않기 때문이다…(중략)…

이와 같이 속행에서 나쁜 계행 등이 일어날 때 그것이 단속되지 않으면 문도 보호되지 않고, 존재지속심이나 전향 등의 인식과정들도 보호되지 않는다.
그러나 속행에서 계 등이 일어나면 문도 보호되고, 존재지속심과 전향 등의 인식과정들도 보호된다.

무엇과 같은가? 도시의 문을 단속했을 때는 비록 어떤 집안 등을 단속하지 않더라도 도시 안의 모든 재물은 안전하게 보호되고 지켜지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도시의 문을 잠가버리면 도적들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속행에서 계 등이 일어날 때 문도 보호되고, 존재지속심과 전향 등의 인식과정들도 보호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속행의 순간에 일어나지만 눈의 감각기능을 단속한다고 설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색계와 무색계 존재들은 왜 여운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도 있었는데,
이 의문은 존재지속심과 여운의 마음과의 관계를 이해하면 추정해볼 수 있다.

§18. 외래의 바왕가 (āgantuka-bhavaṅga)

그러나 불만족이 함께한 속행 끝에 있는 여운의 마음들과 존재지속심은 평온이 함께한다.

그러므로 만약 기쁨이 함께한 재생연결식을 가진 자의 경우 불만족이 함께한 속행의 끝에는 여운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 이전에 익숙한 어떤 작은 대상에 의지하여 평온이 함께한 조사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곧바로 존재지속심으로 들어간다고 스승들은 말씀하신다.

1. 그러나 불만족이 함께한 속행 끝에 있는:

기쁨과 불만족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므로 둘 중의 하나와 함께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 바로 다음에 이 둘 중 다른 느낌과 함께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못한다.
그렇지만 평온과 함께한 마음은 이 둘 중의 하나와 함께하는 느낌의 바로 앞이나 바로 다음에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와나(속행)들이 불만족(domanassa)과 함께할 때, 즉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들일 때 여운이 일어나면 그들은 반드시 평온과 함께하게 된다.*
*이 조항에 의하면 만익 열렬히 원하는 대상에 대해서 적의(paṭigha)가 일어난다면 여운의 마음들은 §17에서 나타난 대로 기쁨과 함께할 수가 없다.
그 대신에 그들은 평온이 함께하는 유익한 과보의 마음들이다.

만일 여운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에는 불만족과 함께하는 자와나들 바로 다음에 존재지속심이 일어난다.
물론 이 때의 존재지속심은 중립적인 느낌인 평온을 수반할 것이다.


2. 그러므로 만약 기쁨이 함께한 재생연결을 가진 자의 경우:

존재지속심이 기쁨과 함께한 네 가지 큰 과보의 마음 중의 하나인 사람일 경우 만일 그의 속행과정의 마음들이 불만족과 함께하여 그 속행의 끝에 여운의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마지막 속행의 마음은 바로 존재지속심으로 가라앉을 수 없다.
바로 앞의 마음과 정반대되는 느낌들을 수반하는 마음은 바로 다음에 일어날 수 없다는 법칙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아비담마의 스승들은 이 둘 사이에서 평온이 함께하는 조사하는 마음이 단 한 심찰나 동안 일어난다고 한다.
그것은 불만족이 함께하는 자와나와 기쁨이 함께하는 바왕가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이 마음은 조사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인식과정과는 다른 대상과 역할을 가진다.
즉 이 인식과정과는 관계없는 자신에게 아주 익숙한 욕계의 대상을 가진다.
단지 존재지속심의 정상적인 흐름으로 돌아가는 길을 밟는 것일 뿐이다.

이 특별한 역할을 하는 마음을 아간뚜까 바왕가(āgantuka-bhavaṅga), 즉 ‘외래의 바왕가’라 부른다.

한편 지나간 바왕가와 바왕가의 동요와 바왕가의 끊어짐을 포함하여 바왕가는 모두 예외 없이 전생의 마지막 속행 과정에서 나타난 업 등 셋 가운데 하나를 그 대상으로 하지만,
이 ‘외래의 바왕가’는 자신에게 익숙한 욕계의 대상을 대상으로 가지는 것이 차이점이다.



여운의 마음은 존재지속심의 성질에 영향을 받아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색계, 무색계 존재들의 존재지속심은 여운의 마음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 존재들의 재생연결식과 같은 대상을 취하며, 그 성질이 같다.
기쁨이 함께한 재생연결식이 기쁨이 함께한 존재지속심으로 이어지듯이, 여운의 마음의 역할을 못하는 재생연결식의 특징이 존재지속심으로 이어지진 않을까.
그러므로 법칙에 따라 이 존재들의 존재지속심의 영향으로 여운의 마음은 색계, 무색계에서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래는 선배 도반의 말씀이다.

색계 천신에게 여운의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욕계의 존재는 욕계 큰 과보의 마음이 재생연결식이 태어났고, 그 욕계 큰 과보의 마음이 여운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데
색계의 존재는 재생연결식 역할은 한 마음들(과보로 나타난 초선~제5선의 마음)이 여운의 역할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필자의 추정이 타당한지 여부와 관계 없이, 여운의 마음은 욕계에서만 일어난다.

§19. 여운의 법칙

그와 마찬가지로 [오직] 욕계의 속행 끝에, [오직] 욕계의 중생에게, 오직 욕계의 법이 대상일 때 여운은 일어난다고 말한다.


§20. 요약

욕계의 속행과 중생과 대상에 대해 확실함이 있을 때
선명하고 매우 큰 대상에 여운이 일어난다고 설한다.

여기서 이것이 여운의 법칙이다.



책 인용문 출처: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4장, 초기불전연구원(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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