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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는 도중 아래 문구를 보았다.
아쉽게도 당시 출처는 기록하지 못했고, 돌아와 검색해봐도 정확한 출처는 찾지 못했다.
그는 진리에 귀의하고 사람에게 귀의하지 않는다.
번뇌로부터 해탈을 구하되 밖으로 찾아 헤매는 일이 없다.
1.
모든 것을 아는 지혜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수 있는 부처님이 없는 지금,
수행자는 부처님과 상가 스님들이 전해주신 법과 율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한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귀의는 의지하는 것이고, 의지처로 삼는다는 뜻이다.
사람에 의지하여 전도된 견해를 가지고, 사람을 의지처로 삼아 갈애로 집착하는 것만큼 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것은 없을 것이다.
특히 전도된 견해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 해로운 업과 과보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2.
위빳사나의 한역 중 하나는 '내관'이다.
안으로 관찰한다.
위빳사나는 오직 부처님이 출현하셨을 때만 전해지는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수행 방법이다.
부처님은 진리의 발견을 외부에서 찾을 수 없다 하셨다.
번뇌를 부수는 것은 내관으로서만 가능하다.
나는 이러한 네 가지 진리(四諦)를 풀이나 나무 등걸 등에서 천명하지 않는다.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바로 이 몸에서 천명한다.
우리 마음은 대상을 아는 역할을 하고, 육문으로는 대상과 끝없이 접촉한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밖으로 찾아 헤매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윤회에 결박됨이다.
로히땃사 경에 대한 각묵스님의 해제를 인용한다.
「로히땃사 경」1(A4:45) 해제 - 밖에서 구하지 말라
인간은 구경의 진리 혹은 최고의 진리를 추구할 줄 아는 존재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이나 수단을 동원하여 이를 추구하여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을 저 밖을 향하여 찾았고
그리하여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채 알기도 전에 삶을 마감하곤 해왔다.
끊임없이 밖으로 치달리는 이러한 인간의 성향에 대해서 거듭해서 반성과 자제를 촉구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본경에 등장하는 로히땃사는 하늘을 아주 빨리 나는 신통을 가진 신이다.
그는 이러한 신통으로 세상의 끝에 도달하려고 동서남북으로 치달렸지만 세상의 끝에는 끝내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세존께 와서 이러한 사실을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아무리 빨리 가는 능력을 가졌더라도 밖으로 치달려서는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러한 세상의 끝, 세상의 궁극, 세상의 최고점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단언하신다.
만일 저 밖에 세상의 끝, 세상의 궁극이 있다면 우리는 과학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최고로 빠른 우주선을 타고 그곳으로 날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런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 하셨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말씀하신다.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밖으로 아무리 걸어가고 날아가도 세상의 끝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신다.
주석서의 설명대로 형성된 세상(saṅkhāra-loka), 즉 오온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결코 괴로움의 끝, 즉 최고의 이상향, 최고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면 진정한 세상의 끝, 세상의 궁극, 세상의 최고점은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단언하신다. 그것은 내 안에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선언하신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을 천명하노라.”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세상’이란 괴로움의 진리[苦諦]이다.
‘세상의 일어남’이란 일어남의 진리[集諦]이다.
‘세상의 소멸’이란 소멸의 진리[滅諦]이다.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이란 도의 진리[道諦]이다.
세존께서는 ‘도반이여, 나는 이러한 네 가지 진리(四諦)를 풀이나 나무 등걸 등에서 천명하지 않는다.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바로 이 몸에서 천명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AA.iii.88~89)
「로히땃사 경」은 『상윳따 니까야』(S.i.61)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가르침은 상좌부 불교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것이다.
특히 이 마지막 구절은 남방의 스님들이 즐겨 인용하는 가르침이다.
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집멸도를 설하셔서 나고 죽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내 안에서 그것도 바로 지금여기에서 해결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불교의 가장 큰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중국 선불교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출처: https://cafe.daum.net/satisamadhi/8fL2/427?listURI=%2Fsatisamadhi%2F8f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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