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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초기불교

출가 생활의 결실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더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는가?

by Rihan 2022.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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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가로 인해 바로 얻을 수 있는 결실들은 무엇인가?
남을 위해 일하던 하인도, 세속의 높은 존재에게 세금을 바치던 장자도 출가함으로써 오히려 그에게 공양을 받는 위치가 된다.

계율을 잘 지키고 감관을 단속하며 청정한 마음으로 지내기 때문에 공덕이 높은 존재가 된다.
재가자들은 이러한 공덕 높은 수행자들을 존경하고 보호하고 살핀다. 이로써 그들도 이익을 얻는다.

재가자들이 지키기 어려운 더 높은 계율로써 알아차림의 힘을 증장시키고 스스로 만족하여 머무른다.
장애 없는 청정한 마음으로 대상을 정신과 물질로 볼 수 있게 된다.


2.
늙음,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은 왜 생기는가?

물질이 있어 늙는다.
물질이 있어 육체적 고통이 생긴다.
정신이 있어 정신적 고통이 생긴다.

정신과 물질이 없으면 괴로움이 없다.
이 사실을 알면 오온에 대한 혐오와 벗어나려는 마음이 생긴다.

우리에게는 감히 오온과 비교할만한 적이 없다.
정신과 물질을 보면 적을 보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보면 지혜로운 범부, 선한 범부라 할 수 있다.
안으로, 밖으로 모두 괴로움이다.

이것이 고성제다.

고성제를 보면 이 괴로움을 겪는 나와 남에 대해 모두 연민하게 된다.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3.
정신과 물질을 보았다면 그 다음으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신과 물질이 일어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정신과 물질이 원인이 되어
현재와 미래의 정신과 물질이라는 결과가 생긴다.

이것이 집성제다.

안으로, 밖으로 모두 괴로움이라는 고성제를 보고
이 정신과 물질의 원인과 결과를 보는 집성제를 볼 수 있는 존재가
‘작은 수다원’(쭐라 소따빤나, cūla-sotāpanna)이다.


4.
행복을 찾는 방법은 2가지이다.

모든 형성된 것은 괴로움의 덩어리이지만, 이것을 볼 수 없어서 행복인 줄 알고 받는다.
‘받음’으로써 행복을 찾는다. 이것이 첫 번째이다.

괴로움을 괴로운 것이라 보고 버리고 벗어난다.
‘버림’으로써 행복을 찾는다. 이것이 두 번째이다.

안으로, 밖으로 형성된 정신과 물질이 모두 괴로움이고,
이 괴로움의 원인과 결과를 볼 수 있다면
이제 이 정신과 물질을 무상, 고, 무아로 관찰하는 위빳사나를 하여 버린다.

이것이 도성제다.

정신과 물질을 볼 수 있다고,
정신과 물질의 원인과 결과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위빳사나가 아니다.
오직 그것을 무상, 고, 무아로 보고 있어야 위빳사나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빳사나 수행자는 앞서 말한 작은 수다원보다 더 높은 존재다.
그는 고성제와 집성제를 보고, 무상·고·무아를 통찰한다. 예류자가 되기 위한 도를 닦는다.


5.
위빳사나를 하는 것은 번뇌와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 순간에 번뇌는 사라진다.
하지만 위빳사나를 하지 않는 동안에는 번뇌는 아직 남아있다.

멸성제가 나타날 때까지 위빳사나를 한다.
출세간의 도 마음이 일어나면 그 단계에 맞게 번뇌는 완전히 부서지고 사라진다.

이것이 멸성제다.

우리의 두터운 잠재성향 번뇌까지 없애는 것이 위빳사나의 힘이다.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본다.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가 괴로움인 것을 알고 본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임을 안다. 그것이 적임을 안다.


6.
몸으로, 입으로 짓는 업을 삼가면 거친 번뇌들은 줄어든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번뇌를 키우는 짓이다.

거친 번뇌가 줄어들면 심청정이 어렵지 않다.
번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수행 주제에 거듭해서 주의를 기울인다.

번뇌가 줄어든 청정한 마음과 수행 주제에 대한 집중의 마음이 있으면 빛이 생긴다.
청정한 마음으로 정신과 물질을 볼 수 있게 된다. 정신과 물질을 보면 사라짐, 사라짐… 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지혜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사라짐을 보는 존재는 슬픔 등의 정신적 괴로움을 일으키지 않는다.
즉, 행복하다.

모든 형성된 것이 괴로움이다. 그것이 사라진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자’와 ‘없는 그대로 보는 자’의 보는 눈의 차이다.


7.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무엇이 생기는가?
후회가 생긴다.

후회가 생기면 마음이 시원하지 못하다.
고요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다.

즉, 청정하지 못하다.


8.
순수한 행복은 갈애가 없는 행복이다.
저열한 행복은 갈애가 있는 행복이다.


9.
잊어버리면 다시 나의 수행 대상을 챙기면 된다.
그렇게 매일 더 청정한 존재가 된다.



우 실라 사야도의 2022년 11월 6일 향천선원 법문 내용을 정리하고, 스스로 조사하여 덧붙인 내용입니다.
저의 사견이 들어가 있을 수 있으며, 정확하지 못한 내용이 있다면 정리자의 부족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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