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열반/대념처경

“몸을 관찰하는 자는 무상이요 괴로움이요 무아요 부정한 형태의 집합을 관찰하는 자라는 뜻이다.” (대념처경 1-3) (1)

by Rihan 2022. 11. 8.
728x90
1-3.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들에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1.

무엇이 네 가지인가(katame cattāro)라는 것은 설명을 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다.


2.

여기서(idha)라는 것은 이 교법에서라는 말이다.


3.

비구들이여(bhikkhave)라는 것은 법을 배울 사람을 지칭한다.
비구(bhikkhu)라는 것은 도닦음(paṭipatti)을 성취할 사람을 나타내는 술어이다…(중략)…

그리고 도를 닦는 자는 누구나 비구라고 이름한다…(중략)…
도를 닦는 자는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비구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장엄을 하건 않건 평등하게 유행하고
만 생명에 대해 몽둥이를 내려놓고
고요하고 절제하며 분명하여 청정범행을 닦는 자,
그가 바라문이고 사문이고 비구이다.”(Dhp.40)


4.

몸에서(kāye)라는 것은 ‘물질로 된 몸에서’라는 뜻이다.
여기서 물질로 된 몸을 머리털, 몸털, 손발톱, 이빨 등 신체의 각 부분들의 집합이라는 뜻에서 ‘까야(kāya, 몸)’라고 지칭한다.
마치 코끼리 떼(hatthikāya)나 마차의 무리(rathakāya) 등에서 [까야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처럼.

그리고 집합의 뜻에서 몸이라고 하는 것처럼 혐오스런 것(kucchita)들의 출생지(āya)라는 뜻에서 몸(kāya)이라 지칭한다.
즉 가장 넌더리나는 혐오스러운 것들의 출생지라고 해서 몸(kāya)이라 한다.

출생지란 생긴 곳이다. 이것은 문자적인 뜻이다. 그곳으로부터 왔다고 해서 출생지이다.
무엇이 출생하는가? 혐오스러운 머리털 등이다.

이처럼 혐오스러운 것들의 출생지라고 해서 몸이라 한다.


5.

몸을 관찰하며(kāyānupassī)라는 것은 몸에 대해서 관찰하는 습관이 배었거나 몸을 관찰하는 자를 말한다.
‘몸에 대해서’라고 말하고 또 다시 ‘몸을 관찰하며’라고 몸[이라는 단어]를 취한 것은

(1) [대상이] 섞이지 않도록 확정 짓는 것과 단단하게 덩어리진 것을 분해하는 것 등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알아야 한다. 즉,

1️⃣ 몸에서 느낌이나 마음이나 법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몸만을 관찰한다.
…(중략)… [대상이] 섞이지 않도록 확정짓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2️⃣ 아울러 몸에서 사지나 부분을 떠나서 [전체로] 하나의 상태로도 관찰하지 않고, 머리털 몸털 등을 떠나서 여자와 남자로도 관찰하지 않는다.
여기서 머리털, 몸털 등은 사대와 사대에서 파생된 [물질]의 덩어리라 불리는 몸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근본물질과 파생된 물질을 떠나서 [전체로] 하나의 상태라고 관찰하지 않는다.

마치 마차의 구성요소를 관찰하듯이 사지나 부분들의 집합으로 관찰한다.
마치 도시를 구획별로 관찰하는 것처럼 머리털과 몸털 등의 집합으로 관찰한다.

마치 파초의 줄기와 잎과 껍질을 분리하듯이, 빈 주먹을 펴듯이, [몸을] 오직 근본물질과 파생된 물질의 덩어리로 관찰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몸이라 불리는 대상을 [여러 요소들의] 집합된 덩어리라고 보임으로써 단단하게 덩어리진 것을 분해하는 것을 보이셨다.
앞에서 설한대로 집합이라는 것을 떠나 몸이라거나 여자라거나 남자라거나 다른 어떤 법(dhamma)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중생들은 앞서 설한 단지 여러 법들이 모인 집합에 대해서 그릇된 천착을 하게 된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말씀하셨다.

“[개념적으로] 보는 것은 본 것이 아니고
[개념적으로 본 것은 [여실히] 보지 못한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여실히] 보지 못해 묶이고
묶여서는 벗어나지 못하누나.”

3️⃣ ‘단단하게 덩어리진 것을 분해하는 것 등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설한 데서 ‘등(ādi)’이라는 단어로는 다음의 뜻을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이 몸에서 오직 몸을 관찰할 뿐 다른 어떤 법도 관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치 물이 아닌 신기루를 보고 물을 찾는 사람들처럼 무상이요 괴로움이요 무아요 부정한 이 몸에 대해
항상하다거나 즐겁다거나 자아라거나 깨끗함을 관찰하지 않는다.

참으로 몸을 관찰하는 자는 무상이요 괴로움이요 무아요 부정한 형태의 집합을 관찰하는 자라는 뜻이다…(후략)

(2) 혹은 몸에 대해서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거머쥘 만한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오히려 머리털, 몸털 등 여러 것의 집합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몸에서 머리털 등의 현상의 집합이라 불리는 몸을 관찰한다고 그 뜻을 알아야 한다.

(3) 나아가서 “이 몸에서 무상함을 관찰하고 항상함을 관찰하지 않는다”는 등의 순서대로 ‘무애해도’에 전해오는 방법인 무상의 특징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특징들을 가진 집합이라는 몸을 관찰하기 때문에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고 그 뜻을 보아야 한다.

이처럼 참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는 비구는 이 몸을 무상하다고 관찰하는 등의 다음 일곱 가지 관찰을 닦는다.

1️⃣ 무상하다고 관찰하며 항상하다고 관찰하지 않는다.
2️⃣ 괴로움이라고 관찰하며 행복이라고 관찰하지 않는다.
3️⃣ 무아라고 관찰하며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는다.
4️⃣ 역겨워하지 즐거워 않는다.
5️⃣ 탐욕을 빛바래게 하지 탐욕에 물들지 않는다.
6️⃣ 소멸시키지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7️⃣ 완전히 놓아버리지 움켜쥐지 않는다.

그는
‘무상하다고 관찰하며 항상하다는 인식(saññā)을 버린다.
괴로움이라고 관찰하며 즐거움이라는 인식을 버린다.
무아라고 관찰하며 자아라는 인식을 버린다.
역겨워하면서 즐거워함을 버린다.
탐욕을 빛바래게 하면서 탐욕을 버린다.
소멸시키면서 일어남을 버린다.
완전히 놓아버리면서 움켜쥠을 버린다.’ 라고 알아야 한다.


6.

머문다(viharati)는 것은 자세를 취한다는 말이다.


7.

근면하게(ātāpī, 근면한 자)라는 것은 삼계에서 오염원들을 태워버리기 때문에 근면함이며 이것은 정진의 다른 이름이다.


8.

분명히 알아차리고(sampajāna)란 분명하게 알아차림이라는 지혜(ñāṇa)를 구족한 것이다.


9.

마음챙기는 자(satimā)라는 것은 몸을 철저하게 파악하는 마음챙김을 구족한 자라는 뜻이다.
그는 이 마음챙김으로 대상을 철저하게 거머쥐고 통찰지(반야)로써 관찰한다.

왜냐하면 마음챙김이 없는 자에게 관찰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중략)…
그러므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고 여기서 몸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의 확립을 말씀하셨다…(후략)


10.

이처럼 몸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의 확립과 관련된 부분을 보여준 뒤 이제 버려야 할 부분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m)라고 설하셨다.
여기서 버리면서라는 것은 반대되는 법으로 대처함에 의한 버림과 억압함에 의한 버림으로써 버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싫어하는 마음으로 옮긴 원어는 domanassa이다. 대념처경에서 domanassa는 크게 두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dukkha-domanassa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서 나타나는 abhijjhā-domanassa이다. 역자는 전자를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으로 후자를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으로 구분해서 옮겼다.

세상에 대한(loke)이란 ‘바로 그 몸에 대한’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몸은 무너진다는 뜻에서 세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단지 몸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만을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느낌 등에 대해서도 버린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오취온)들도 또한 세상이다”라고 위방가에서 설하셨다…(중략)…

[몸이라는] 이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라고 이처럼 문구를 결합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욕심(abhijjhā)은 감각적 욕망을 포함하고 싫어하는 마음(domanassa)은 악의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섯 가지] 장애에 포함된 이 두 가지 강한 법을 보여줌으로써 장애를 버리는 것을 설하신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개별적으로는 여기서
1️⃣ 욕심을 버림으로써 몸의 안락함에 바탕한 만족을 버림을 설하셨고, 싫어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몸의 불편함에 바탕한 불만족을 버림을 설하셨다.
2️⃣ 욕심을 버림으로써 몸을 기뻐함을 버림을, 싫어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몸을 닦음에서 오는 기뻐하지 않음을 버림을
3️⃣ 욕심을 버림으로써 몸에 있지도 않은 깨끗함과 행복 등을 끌어안는 것을 버림을, 싫어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몸에 실재하는 부정함과 불행 등을 밀쳐내는 것을 버림을 설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수행자의 수행의 힘(yoga-anubhāva)과 수행의 능력(yoga-samatthatā)을 밝히셨다.
만족과 불만족으로부터 벗어나고, 기뻐함과 기뻐하지 않음을 견디고, 실재하지 않은 것을 끌어안음과 실재하는 것을 밀쳐냄이 없는 그것이 바로 수행의 힘이다.

만족과 불만족으로부터 벗어나고, 기뻐함과 기뻐하지 않음을 견디고, 실재하지 않은 것을 끌어안지 않고 실재하는 것을 밀쳐내지 않는 자가 수행의 능력이 있는 자다.



출처: 각묵스님 옮김,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 초기불전연구원(2003)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