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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초기불교

사띠(sati)는 왜 ‘마음챙김’인가? 마음챙김의 핵심은 왜 ‘대상’인가?

by Rihan 2023.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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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전연구원 공부모임에서 발제를 하신 법우님이
마음챙김이 ‘마음을 챙김’이 아니라 ‘마음이 대상을 챙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법우님은 지금껏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써 왔지만
‘대상’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그간 알지 못했다는 말씀과 함께
마음챙김의 뜻이 전자가 아닌 후자라는 것을 이번 발제 과정에서 면밀히 아셨다고 한다.

 

사띠(sati)는 마음챙김으로 번역된다.
마음챙김은 ’마음이 대상을 챙김‘으로 정의된다. 마음챙김의 핵심은 ‘대상’이다.

 

이 두 가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 걸까?

 


1.
결론부터 말한다.

 

마음은 알고잡이다. 대상을 찾아다니는 동물과 같다.
사띠는 밧줄이다.

 

밧줄은 무엇을 무엇에 묶는 것이다.
묶을 곳, 대상은 내 몸과 마음이다.
내 안의 현상이며, 내 밖의 현상이 아니다.

 

1️⃣ 산만하고 날뛰는 마음은
2️⃣ 사띠라는 밧줄로
3️⃣ 내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에 단단히 묶여진다.

 

그러므로 사띠는 마음을 챙겨서 대상에 묶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마음이 대상을 챙기는, 수행에 관계된 유익한 심리현상이다.

마음은 마음챙김이라는 밧줄로 마음챙김의 대상인 기둥에 튼튼하게 묶여지기 때문에 불선법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향하지 못한다.

 

여기서 마음챙김의 대상은 몸, 느낌, 마음, 법의 넷이다. 이것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 사념처이다.
마음챙김의 대상은 개념적 존재가 아니다. 해체하여 법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마음챙기는 수행자의 대상은 내 몸과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로써 마음챙김은 해탈과 열반으로 연결된다.

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은 해탈과 열반으로 연결되는가?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서
그들을 각각 더러움, 괴로움, 무상, 무아라고 파악하면서,
또 깨끗함, 행복, 항상함, 자아라는 인식(saññā)을 버리는 역할을 성취하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음챙김의 가까운 원인, ‘강한 인식’일 것이다.

 

우리는 이 마음챙김으로 몸(대상)을 철저하게 거머쥔다.
거머쥔 대상을 철저히 알고, 관찰하고, 분석하는 역할은 통찰지(반야)의 영역이다. 분명한 알아차림, sampajāna다.

 

그리고 sampajāna는 sati와 짝이 되며, 위빳사나와 통찰지 등과 동의어다.
영어로는 'mindfulness and introspection', 'mindfulness and clear comprehension‘으로 일컬어진다.

 

마음챙김이 없는 자에게 관찰은 있을 수 없다.

 

또 다른 면에서, 마음챙김은 문지기와 같다.

 

지나가버린 대상, 이미 들어오거나 나가버린 대상은 문지기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문에 도착한 대상은 낱낱이 조사한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그들은 마노를 의지하며, 마음은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마음은 본디 한 찰나에 한 가지 역할을 하며, 한 가지 대상을 가진다.
수행자의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하여 해탈, 열반으로 향한다.

 


2.
담마상가니 1권 260쪽~264쪽에서는 ‘마음챙김의 기능’이 설해져 있다.
그 중 438번 주해에서 각묵스님은 일전에 쓰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왜 사띠(sati)를 마음챙김으로 옮겼는가‘의 글 내용을 옮겨놓으셨다.

…그러면 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sati를 마음챙김으로 옮겨서 사용하는가?
거기에는 분명한 경전적 근거와 용례가 있다.

역자는 그 이유를 다음의 여덟 가지로 정리해서 밝혀 본다.

1️⃣ 사띠(sati)를 마음챙김으로 옮긴 데는 몇 가지 근거를 들 수 있지만 가장 확실한 근거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가장 대표적인 보기로는 「여섯 동물 비유 경」(S35:247)을 들 수 있다.
『상윳따 니까야』 제4권 「여섯 동물 비유 경」(S35:247)은 여섯 동물의 비유를 들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각각 다른 삶의 분야와 각각 다른 먹이의 영역을 가진 여섯 마리의 동물을 튼튼한 밧줄로 묶은 뒤 이 밧줄들을 모두 튼튼한 말뚝이나 기둥에 묶어 두었다 하자.
각각 다른 삶의 분야와 각각 다른 먹이의 영역을 가진 여섯 마리의 동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먹이의 영역과 삶의 분야로 가려고 할 것이다.

... 그러다가 이들 여섯 동물들이 지치고 피곤해지면 그들은 그 말뚝이나 기둥 가까이에 설 것이고 거기에 앉을 것이고 거기에 누울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서 튼튼한 말뚝이나 기둥이라는 것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짓고 수레로 삼고 기초로 삼고 확립하고 굳건히 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리라.’라고 그대들은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S35:247)

이처럼 여섯 가지 알음알이로 세분되는 마음은 여섯 동물에 비유되고
사띠(sati)는 밧줄에 비유되고
말뚝이나 기둥은 사띠의 대상인 몸 혹은 몸/느낌/ 마음/법[身/受/心/法]으로 정리되는 21가지 혹은 44가지 사띠의 대상 가운데 하나를 뜻한다.

그래서 사띠라는 밧줄로 마음이라는 동물들을 말뚝이라는 대상에 묶는 것이 사띠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사띠는 마음을 챙겨서 대상에 묶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챙김으로 옮기면 대상에 마음을 챙기는 것이 되어서 「여섯 동물 비유 경」(S35:247)에서 말씀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의 뜻이 정확하게 드러난다.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기는 것은 이러한 분명한 경전적 근거가 있다.

2️⃣ 이러한 비유가 있기 때문에 『디가 니까야』 제2권 「대념처경」(D22)에 해당하는 『디가 니까야 주석서』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설명하는 『청정도론』VIII.153~154도 이렇게 강조한다.

“예를 들면, 소치기가 사나운 암소의 젖을 마음껏 마시면서 자란 사나운 송아지를 길들이려 할 때
그 암소로부터 송아지를 떼어내어 한 곁에 큰 기둥을 박고서 그곳에 고삐를 매어 묶어 놓을 것이다.
그때 그 송아지는 이리저리 날뛰어도 도망갈 수 없게 되자 그 기둥을 의지하여 앉거나 누울 것이다.

... 여기서 마치 송아지 길들이는 자가
송아지를 기둥에 묶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마음챙김으로써
대상에 굳게 묶어야 한다.”(DA.iii.763; 『청정도론』VIII.154)

여기서는 마음이라는 송아지를 사띠라는 밧줄로 기둥이라는 대상에 묶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마음챙김이라는 밧줄을 마음챙김의 대상인 기둥에 튼튼하게 묶어 마음이 불선법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이러한 마음챙김의 대상을 신/수/심/법(身/受/心 /法) 즉 몸/느낌/마음/법의 넷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라 부른다.

3️⃣ 다시 『상윳따 니까야』 제5권 「운나바 바라문 경」(S48:42)에는 이렇게 나타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노[意]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노[意]는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챙김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해탈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S48:42)

이처럼「운나바 바라문 경」(S48:42)에서 세존께서는 마음챙김(sati)이 마노[意, mano, 마음]를 해탈과 열반으로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4️⃣ 2세기(후한 시대)에 안세고(安世高) 스님이 옮긴 「불설대안반수의경」(佛 說大安般守意經)이라는 경의 제목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스님은 아나빠나(aanaapaana, 出入息, 들숨날숨)를 안반(安般)으로 음사하고 있으며,
사띠를 ‘수의(守意)’ 즉 마음[意, mano]을 지키고 보호[守]하는 것으로 의역하고 있다.

이것은 마음이 대상을 챙겨서 그 마음이 해탈/열반을 향하도록 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사띠(sati)를 설명하는 위의 「운나바 바라문 경」(S48:42)이나 「여섯 동물 비유 경」(S35:247)과 같은 가르침을 경전적인 근거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5️⃣ 그리고 『청정도론』도 “그의 마음이 수승한 마음챙김으로 보호될 때(anuttarāya satiyā saṁrakkhiyamāna-cittassa)”(Vis.XVI.83)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도 안세고 스님이 사띠를 수의(守意)로 해석한 것과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6️⃣ 「불설대안반수의경」 외에도 CBETA로 검색을 해보면 별역잡아함경이나 법구경이나 출요경 등등 중국에서 안반수의(安般守意)나 수의(守意)로 번역한 경우가 백 군데가 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미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던 초기부터 sati는 ‘마음을 보호하는 것[守意]’으로 이해되었으며
이것은 위에서 인용한 「운나바 바라문 경」(S48:42)과 『청정도론』(Vis.XVI.83)의 설명과도 일치하는 해석이라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번역도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긴 좋은 근거가 된다.

7️⃣ 그리고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띠(sati)를 염(念)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 念자는 ‘이제 今’자와 ‘마음 心’자로 파자(破字)된다.

한자를 설명하면서 파자를 하여 단어를 설명하는 것은 좋은 태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도 지금여기에서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으로 사띠를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8️⃣ 어디 이뿐인가. sati는 영어로도 거의 예외 없이 mindfulness로 정착이 되고 있는데 이것도 사띠를 ‘마음(mind)에 두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몇몇 분들이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옮기는 것을 본다.
술어를 어떻게 한글로 정착시키는가하는 것은 옮기고 그 술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성향이라서 존중해야 하겠지만 역자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옮기는 것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차라리 ‘정신 차림’이라 한다면 이해는 하겠지만 앎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면 이것은 통찰지(paññā)나 지혜(ñāṇa)와 관계된 술어가 되어 혼란이 오게 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sampajāna를 ‘알아차림’이나 ‘분명한 알아차림’으로 옮기고 있다.

sampajāna는… 앎을 기본 의미로 하고 있다.
그리고 sampajāna는 sati와 짝이 되어 많이 나타나는 용어인데 본서 등과 주석서들에서 이것은 위빳사나와 통찰지 등과 동의어로 설명한다.

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옮기는지에 대해서 몇 가지 근거를 적어보았다.



3.
‘초기불교이해’에서 18장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에도 마음챙김에 대해서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마음챙김의 확립’으로 옮긴 sati-paṭṭhāna는 주석서에서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sati+upaṭṭhāna이고 둘째는 sati+paṭṭhāna이다.

전자는 마음챙김의 확립으로 옮겨지고 후자는 마음챙김의 토대로 옮겨진다.
전자는 마음챙김을 일으키는 행위를 강조하고 후자는 마음챙김의 대상을 강조한다.

주석서들은 다분히 후자의 의미를 의지하지만 전자의 의미가 더 원래적이라 할 수 있다

…(중략)…

한편 ‘청정도론’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설명하고 있다.

“각각의 대상들에 내려가고 들어가서 확립되기 때문에(upaṭṭhānato) 확립(paṭṭhāna)이라 한다.
마음챙김 그 자체가 확립이기 때문에 마음챙김의 확립이라고 한다.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서
그들을 각각 더러움, 괴로움, 무상, 무아라고 파악하면서,
또 깨끗함, 행복, 항상함, 자아라는 인식(saññā)을 버리는 역할을 성취하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그러므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라 한다.”(Vis.XXII.34) …(중략)…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 문헌에서 마음챙김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apilāpana)이다.

‘청정도론’은 말한다.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잊지 않는 것을 역할로 한다.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혹은 대상과 직면함으로 나타난다.
강한 인식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몸 등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기둥처럼 대상에 든든하게 서 있기 때문에, 혹은 눈 등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 문지기처럼 보아야 한다.”(Vis.XIV.141)

둘째, 위의 ‘청정도론’의 인용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마음챙김은 문지기(dovārika)와 같다…(중략)…

“문지기가 도시의 안과 밖에 사는 사람들을 상대로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디서 왔습니까? 어디 갑니까? 당신의 손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조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도시 안팎에 사는 사람들은 그 문지기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낱낱이 조사한다.

이와 같이 안으로 들어간 들숨과 밖으로 나간 날숨은 이 비구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문에 도착하는 것은 모두 관여한다.

이것이 문지기의 비유이다.”(Vis.VIII.200)…(중략)…

셋째, 마음챙김이란 대상을 거머쥐는 것이다. 그래서 ‘대념처경 주석서’에는

“마음챙기는 자(satimā)라는 것은 [몸을] 철저하게 거머쥐는 마음챙김을 구족한 자라는 뜻이다.
그는 이 마음챙김으로 대상을 철저하게 거머쥐고 통찰지(반야)로써 관찰한다. 왜냐하면 마음챙김이 없는 자에게 관찰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DA.iii.758) 라고 나타난다.

넷째, 마음챙김은 대상에 대한 확립(upaṭṭhāna)이다.
‘청정도론’은 말한다.

“각각의 대상들에 내려가고 들어가서 확립되기 때문에 확립이라 한다.  
마음챙김 그 자체가 확립이기 때문에 마음챙김의 확립이라고 한다.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서
그들을 더러움, 괴로움, 무상, 무아라고 파악하면서,
또 깨끗함, 행복, 항상함, 자아라는 인식을 버리는 역할을 성취하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그러므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라 한다.
“(Vis.XXII.34)

다섯째, 마음챙김은 마음을 보호(ārakkha)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은 ”그의 마음이 수승한 마음챙김으로 보호될 때“(Vis.XVI.83)라고 하였다.

…(중략)…

”바라문이여, 이처럼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마노[의]를 의지한다. 마음이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노[의]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노[의]는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챙김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해탈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버렸다.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잡지 못하였구나. 바라문이여, 청정범행을 닦는 것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으로 완성되고 열반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다.“(‘운나바 바라문 경’ S48:42 §§4~8)

…(중략)…

(5) 마음챙김은 대상을 챙기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일견 ‘마음을 챙김’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마음이 대상을 챙김“이다.
이처럼 마음챙김은 마음이 대상을 챙기는, 수행에 관계된 유익한 심리현상이다.

…(중략)…

이처럼 마음챙기는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이다.
주석서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고, 대상을 거머쥐고, 대상에 확립되어
해로운 표상이나 해로운 심리현상들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마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마음챙김이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상윳따 니까야 ’새매 경‘(S47:6)에서

”비구들이여, 자신의 고향동네인 행동의 영역에서 다녀라.
자신의 고향동네인 행동의 영역에서 다니는 자에게 마라는 내려앉을 곳을 얻지 못할 것이고 마라는 대상을 얻지 못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자신의 고향동네인 행동의 영역인가?
바로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7)라고 강조하셨다.

마음챙김이란 마음이 대상을 챙기는 것이요,
마음챙기는 공부는 마음이 대상을 거듭해서 챙기는 공부요,
마음챙김의 확립은 마음이 정해진 대상에 확립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챙김은 그 대상이 중요하다.
‘대념처경’(D22)에서 설명되고 있는 마음챙김의 대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중략)…

‘대념처경’은 이렇게 모두 44가지로,
혹은 느낌과 마음을 각각 한 가지 주제로 간주하면 21가지로,
마음챙김의 대상을 구분하여 밝히고 있다.

(6) 마음챙기는 공부의 요점 몇 가지

…(중략)…첫째, 마음챙김의 대상은 ‘나’ 자신이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내 밖은 큰 의미가 없다. 왜? 해탈·열반은 내가 성취하기 때문이다

…(중략)… ‘대념처경’에서는 이러한 나 자신을 몸, 느낌, 마음, 심리현상으로 나눈 뒤,
이를 다시 몸은 14가지, 느낌은 9가지, 마음은 16가지, 법은 5가지로 더욱더 구체적으로 세분해서,
모두 44가지 대상으로 나누어서 그 중의 하나를 챙길 것을 말하고 있다…(중략)…

둘째, 무엇보다도 개념적 존재(paññatti)의 해체가 중요하다…(중략)…
나니 내 것이니 남이니 산이니 강이니 컴퓨터니 자동차니 우주니 하는 개념적 존재를 해체할 때
무상·고·무아를 보편적 특징으로 하는 법(dhamma)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면 더 이상 개념적 존재를 두고 갈애와 무명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그래서 해체는 중요하다.
해체의 중심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다.

중생들은 무언가 불변하는 참 나를 거머쥐려 한다. 이것이 모든 취착 가운데 가장 큰 취착이다.
’대념처경‘에서 나라는 존재를 신·수·심·법으로 해체하고 다시 이를 21가지나 44가지로 더 분해해서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제시하신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중략)…

셋째, 다시 강조하지만 마음챙김은 대상이 중요하다…(중략)…
’대념처경‘ 등은 거친 대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점 미세한 대상으로 참구의 대상을 나열하여 들어간다.
그러나 ’대념처경‘ 등에서 나타나는 순서대로 21가지 혹은 44가지 대상을 모두 다 챙기고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넷째, 마음챙김으로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통합하고 있다….(중략)…
사실 그것이 집중이든 관찰이든 마음챙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마타는 찰나생·찰나멸하는 법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적 존재(paññatti)를 대상으로 하고,
위빳사나는 찰나생·찰나멸하는 법(dhamma)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마음챙김이 없이는 표상에 집중하는 사마타도,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빳사나도 있을 수 없다.

다섯째, ’마음챙김의 확립 상윳따‘와 ’대념처경‘은 사성제를 관찰해서 구경의 지혜(aññā)를 증득하는 것으로 결론 맺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무상·고·무아의 삼특상 가운데서 고의 특상과 그 원인과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을 꿰뚫어 아는 것으로 해탈·열반의 실현을 설명하고 있다.

’청정도론‘에 의하면 해탈에는 세 가지 관문이 있다.
그것은 무상·고·무아이다.

무상을 꿰뚫어 알아서 체득한 해탈을 표상 없는 해탈이라 하고,
고를 꿰뚫어 알아 증득한 해탈을 원함 없는 해탈이라 하고,
무아를 꿰뚷어 알아 요달한 해탈을 공한 해탈이라 한다.

그러므로 마음챙기는 공부는 고를 통찰하는 원함 없는 해탈로 결론짓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이야말로 초기경에서 초지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는 깨달음이요 열반의 실현이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그것은 염오로 인도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욕망의 빛바램 경‘, S47:3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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