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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285쪽을 보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사견은 대상을 여실지견하지 못하여 일어나는 현상이고
자만은 자부심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 남과 동등하다, 남보다 못하다라는 마음의 현상이다.
248쪽을 보면 아래와 같이 말한다.
사견이 내가 존재한다는 견해라면
이 자만은 ‘나‘라는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남과 비교해서 평가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한편 경에서 많이 나타나는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구문을 각각 탐욕(혹은 갈애)과 자만과 사견의 세 가지에 배대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탐욕, 사견, 자만의 세트에 대해서는 아래 글들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예류자가 되어 '오온이 나'라는 사견을 부순다고 해도 왜 '나라는 존재, 오온의 무더기를 남이라는 존재, 무더기와 비교하고 평가하는 태도'인 자만은 아라한이 되어서야 없앨 수 있는 것일까?
선배 도반과의 문답을 여기에 공유한다.
Q. 이미 유신견이 없으므로 비교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열 가지 족쇄 중 사견의 족쇄를 풀어버린 세 종류의 유학 분들도 자만의 족쇄는 아라한이 되어야 풀어버릴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성자 분들은 유신견을 풀어버렸음에도 왜 아만의 족쇄는 풀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미 ‘오온이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는 삿된 견해’가 없으므로 비교할 것도 없을 텐데요.
A. 상윳따 니까야의 주석으로 답을 대신합니다.
상윳따 니까야에 있는 주석으로 답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케마까 경(S22:89)
8. "…(전략)…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 서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³²²⁾
322) 본문은 유학(sekha)과 아라한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유학은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는 20가지 유신견은 극복하였지만 아직 “오온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는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 등은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무학인 아라한은 모든 그릇된 생각의 근본 뿌리인 무명(avijjā)을 모두 제거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나’라거나 ‘내 것’ 이라는 관념이 남아 있지 않다. 케마까 존자는 적어도 예류자는 되었다.
즉, 필자가 선배 도반께 질문한 내용에서 “이미 ‘오온이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는 삿된 견해’가 없으므로”라고 말한 부분이 정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유신견이 없으면 오온을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온에 대해서 ’나는 있다‘ 라거나 ’오온이 나다‘라고 생각하는 관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앞서 경에서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구문을 각각 탐욕(혹은 갈애)과 자만과 사견의 세 가지에 배대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나는 있다’, ‘오온이 나다’, ‘이것은 나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자만이다.
유신견을 풀었다고 해서 나라는 관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미세한 자만과 미세한 욕구가 남아 있으므로 ‘이것이 나’이고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관념도 남아 있다.
무학인 아라한은 이러한 미세한 번뇌조차 모두 부수어버린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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