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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1 §2의 32번 주해
본경에서 모든 법들은 존재 더미, 즉 오취온을 뜻하고 모든 법들의 뿌리, 즉 오취온의 뿌리는 갈애와 자만과 사견과 무명이라는 주석서와 복주서의 이 설명은 중요하다.
특히 본경의 §§3~26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생각하다(maññati)’를 주석서는 갈애와 자만과 사견의 세 가지 허황된 생각을 통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처럼 세 가지 허황된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이 모든 법들, 즉 오취온의 뿌리가 된다는 말이 된다
2.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284쪽
탐욕, 사견, 자만은 모두 여덟 가지 탐욕이 함께한 마음에서 작용한다.
그 중에서 탐욕은 여덟가지 모두에서 작용하는 것이 당연하겠고 사견과 자만이 탐욕과 함께 포함되는 이유는 이 둘은 모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3. S22:15 §3의 92번 주해
“이 셋은 [각각] 갈애와 자만과 사견으로 거머쥠을 내던지는 것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 한다.’는 것은 원인(hetu)과 이유(kāraṇa)와 위빳사나와 함께하는 도의 통찰지로써 봐야 한다는 뜻이다.”
4. M35 §21의 91번 주해
“‘통달하여 안다.’는 것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라고 조사의 통달지에 의해 철저히 아는 것을 말한다.” (MA.ii.279)
5. M1 §3의 48번 주해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땅이라는 토대(vatthu)를 ‘철저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기꺼워한다. 땅을 잘 아는 자는 세 가지 통달지를 통해 철저히 안다. 그것은 1️⃣ 안 것의 통달지 2️⃣ 조사의 통달지 3️⃣ 버림의 통달지이다.
이 가운데서 1️⃣ 어떤 것이 안 것의 통달지인가? “그는 땅의 요소를 잘 안다. 이것은 내적인 땅의 요소이고, 이것은 외적인 땅의 요소이고, 이것은 그 특징이고, 이것은 역할이고, 나타남이고, 가까운 원인이다.”라고 철저히 아는 것이 안 것의 통달지이다.
2️⃣ 어떤 것이 조사의 통달지인가? “물질을 무상으로, 괴로움으로, 병으로 본다”라고 마흔 가지 측면에서 땅의 요소를 조사하는 것이 조사의 통달지이다.
3️⃣ 어떤 것이 버림의 통달지인가? 이렇게 조사한 뒤 최상의 도로써 땅의 요소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것이 버림의 통달지이다.
혹은 1️⃣ 정신과 물질을 분석하는 것이 안 것의 통달지이고, 2️⃣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부터 수순의 지혜까지를 조사의 통달지라 하고, 3️⃣ 성스러운 도에 대한 지혜를 버림의 통달지라 한다.
땅을 철저하게 아는 자는 이 세 가지 통달지에 의해 철저히 안다. 범부는 이 통달지가 없기 때문에 철저히 알지 못하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기꺼워 한다.”
세 가지 통달지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은 ‘청정도론’ XX.3~4와 18~19를 참조할 것.
6. ‘청정도론’ XX 3~4
3. 이것이 판별이다. 세간적인 통달지는 세 가지이다.
1️⃣ 안 것의 통달지
2️⃣ 조사의 통달지
3️⃣ 버림의 통달지이다.
이것을 두고 설하셨다.
“초월지라는 통찰지는 알았다는 뜻에서 지혜이고,
통달지라는 통찰지는 조사하는 뜻에서 지혜이고,
버림이라는 통찰지는 제거하는 뜻에서 지혜이다.(Ps.i.87)”
이 가운데서 1️⃣ 물질은 변하는 특징을 가지고, 느낌은 느껴진 특징을 가진다고 이와 같이 그 법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조사함으로써 생기는 통찰지가 안 것의 통달지이다.
2️⃣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다는 방법으로 그 법들에게서 보편적인 특징을 제기한 뒤 생기는 보편적인 특징을 대상으로 가지는 위빳사나의 통찰지가 조사의 통달지이다.
3️⃣ 이런 법들에서 영원하다는 인식 등을 버림으로써 생긴 특징을 대상으로 가진 위빳사나의 통찰지가 버림의 통달지이다.
4. 1️⃣ 여기서 상카라들의 한계를 정함(XVIII)으로부터 조건의 파악(XIX)까지가 안 것의 통달지의 범주이다. 이 부분에서는 법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통찰하는 것이 주가 된다.
2️⃣ 깔라빠를 명상하는 것부터 생멸의 관찰(XXI. §3이하)까지가 조사의 통달지의 범주이다. 이 부분에서는 보편적인 특징을 통찰하는 것이 주가 된다.
3️⃣ 무너짐의 관찰(XXI. §10) 이후부터가 버림의 통달지의 범주이다. 여기서부터는 다음과 같이 영원하다는 인식 등을 버림을 성취하는 일곱 가지 관찰이 주가 된다. 즉 ”그는 [행들을] 무상이라 관찰하면서 영원하다는 인식을 버린다. 괴로움이라고 관찰하면서 행복이라는 인식을 버린다. 무아라고 관찰하면서 자아라는 인식을, 역겨워하면서 즐김을, 탐욕을 빛바래게 하면서 탐욕을, 소멸로써 일어남을, 놓아버림으로써 취함을 버린다.(Ps.i.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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