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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초기불교

“인식과정과 인식을 철저히 이해하면 조건지어져 일어나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by Rihan 2022.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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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인식, 산냐(saññā)에 대해서 공부한 것을 짧게 소개한 바 있다.
해당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짧은 담마] 뭉뚱그려서 인식한다. 표상을 만든다. 표상에 따라 이해한다. 무수한 취착을 야기한

1. 인식, 산냐(saññā)에 대한 설명 “a1, a2… 의 경우를 보고 a라고 뭉뚱그려서 인식하는 행위라 보면 되겠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P.226) “대상을 받아들여 개념 작용을 일으키고 이름 붙이

rihankim.tistory.com


해당 글에 선배 도반께서 댓글로 인식과 인식과정에 대한 조건 발생 과정을 이해하면 그로 인해 무아적 특성이 드러남을 해체해서 일러주셨다.

존재는 늘 대상이라는 조건에 조건지어져 있고,
그 대상을 조건으로 과보의 마음은 일어난다.

전오식,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은 과보의 마음이고
오문전향, 결정하는 마음은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속행의 과정에서 업을 짓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러한 일련의 인식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은 하는 법은 ‘인식’이라는 법이다.
인식은 과거의 표상화된 대상과 현재의 대상을 비교하는 고유성질을 드러내면서 그 대상을 개념화시킨다.

그리고 존재는 그 ‘개념’을 의지해서 말과 생각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과정은 무아적 과정이며, 인식과정과 인식을 철저히 이해함으로서 조건지어져 일어나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말소리를 따라 귀의 알음알이의 인식과정이 [일어나고]
곧바로 마노의 문[意門]의 영역이 일어난다.
그것을 뒤이어서 뜻들은 그 다음에 알아진다.
이렇게 [생긴] 개념은
세상의 인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2권 261쪽)


여기서 이 댓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1.
전오식과 받아들임(receiving), 조사(investigation)의 마음은 과보의 마음이다.

전생이나 과거에 내가 지은 업에 대한 과보로서 주어지는 대로 받아야 하는,
지금 여기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과보의 마음이다.


2.
오문전향(adverting)과 결정(determination)의 마음은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작용만 하는 마음은 functional의 뜻을 지닌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151쪽)
단지 기능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단지 일어나서 역할을 성취하고 사라진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162쪽)


3.
수행자는 대상을 조건으로 과보를 받는다.

그렇다면 그 과보를 조건으로 유익함과 해로움을 어떻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가?
어떻게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을 수 있는가?
수행자는 인식과정 어디에서 지혜롭게 마음을 잡도리할 수 있는가?
유익함과 해로움, 지혜와 어리석음이 갈리는 분기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속행이다.
속행에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 yoniso manasikāra 를 할 수 있다.


4.
“말소리를 따라 귀의 알음알이의 인식과정이 [일어나고]”는 오문인식과정 전체이다.
대상이 크든 작든 17 심찰나가 일어난다.

그리고 한 차례 바왕가에 들어갔다가 의문인식과정으로 들어간다.
“곧바로 마노의 문의 영역이 일어”나고 “그것을 뒤이어서 뜻들은 그 다음에 알아진다.”

오문인식과정에 뒤이어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의문인식과정을 거쳐 우리는 대상을 인식하고 파악하고 개념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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