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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초기불교

“지혜로운 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고 무엇이든 유용하게 쓸 수 있는데, 어리석은 자는 무수히 많은 것이 필요하면서 어떤 것도 유용하게 쓸 수 없다.”

by Rihan 2022.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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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살아라 - IPKU

이종건 (건축가 ㆍ 작가) 에머슨(R. W. Emerson)은 이렇게 말했다. “단순한 것은 위대한 것이다.” 톨스토이 또한 이렇게 말했다. “단순성이 없는 곳에 위대성은 없다.” 물리적 여건이나 사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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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인용문 중 '필자 주'라고 작성한 부분은 저자의 글을 인용하는 중간에 필자의 견해를 적은 것이다.

 

요즘 간혹 언급되는 ‘미니멀 라이프’ 곧 ‘단순한 삶’이다.

정말 소중하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기 위해 여타의 것들을 잘라낸 삶인데, 동서고금 막론하고 수많은 성인들과 현자들이 실천했다.
자신이 설정한 의미(가치)에 가차없이 헌신하고 몰두한 삶이다.

 

논점은 이것이다. 한정된 시간이 종료되면 우리 모두 소멸할 존재, 그러므로 ‘살아있는 시간’보다 소중한 것은 세상에 없다.

따라서 ‘좋은 삶은 단순하다.’라고 말하기보다 ‘좋은 삶은 단순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천 번 만 번 옳다. 지혜로운 자들은 자신의 온 삶으로 그것을 웅변한다. 그들은 부, 명예, 권력, 용모, 스포츠, 여흥, 놀이 등 현대인들이 그토록 중요시 여기는 것들에 등을 돌린 채 오직 삶의 본질에 몰두했다. 그들에게 물질과 타인의 시선은 방해거리일 뿐이다.

단순한 삶은 단지 단순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가치(의미)있는 일을 위해 좋고 필요한 삶이다.

 

좋은 삶이 단순한 삶이라면, 복잡하거나 산만한 삶은 대개 나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하거나 산만하다는 것은 삶의 에너지가 분산되어 정작 중요한 것을 위해 쓸 에너지가 줄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자신이 진실로 추구하고 싶은 일이 없는 사람은 복잡하거나 산만하다. 그에게 모처럼 찾아오는 빈 시간은 축복이 아니라 고통이다. 시간 죽일 방도 없이 홀로 있으면 지겹거나 외로워 견디기 힘들다. 그러므로 파스칼(Blaise Pascal)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홀로 고요한 방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에서 비롯한다.”



삶이 복잡하고 마음이 평강하지 못한 것은, 또 다시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돈과 재물과 지위는 좋은 삶을 사는 데 별 소용없거나 오히려 방해되는데도, 그런 줄 모르고 그것을 남들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갖기 위해 공부하고 힘써 경쟁한다.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리라 착각한 채 삶의 귀한 에너지를 낭비한다. 우리나라의 논픽션 베스트셀러 책은 돈, (시험/입사)공부기술, 감성팔이 계발서가 늘 상위권이다. 한국 사람들은 똑똑한 바보다.

그런데 세속적인 성공으로 들뜨고 행복감을 누리는 것은 잠시다. 갑자기 얻은 돈이 주는 행복감은 놀랍도록 크지만 허무할 정도로 짧다. 심리학이 설명하듯, 금방 거기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결과가 말해주듯, 일정한 수준을 넘으면 소득은 행복감에 거의 기여하지 않는다. 널리 회자되는 중국 속담은 돈의 한계를 위트로 가르친다.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 수 없고,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고,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고, 책은 살 수 있지만 지식은 살 수 없고, 의사는 살 수 있지만 좋은 건강은 살 수 없고, 지위는 살 수 있지만 존경은 살 수 없고, 피는 살 수 있지만 생명은 살 수 없고, 섹스는 살 수 있지만 사랑은 살 수 없다.

성경은 돈과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가르친다.(필자 주: 필자는 업에 쌓는다고 받아들인다.) 땅에 두면 마음이 거기에 붙잡혀 눈이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권면한다...(중략)..

돈과 재물과 명예가 우리의 열정을 얼마나 낭비하게 만드는지, 세세히 말할 필요 없다. 핵심은 이것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니라 그것이 주인이며, 우리는 다만 그것을 쫓고 그것에 기댈 뿐이어서, 그것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마음 갈피를 못 잡는다.

 

남들의 ‘시선과 의견’도 그렇다. 부모나 가족, 친구와 사회구성원의 ‘시선과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것에 예민하고, 거기에 부응하는 삶을 살면 삶의 주권을 잃는다. 나의 인생을 남을 위해 사는 꼴이 된다. 인간의 관계망은 불안정한 우리의 삶을 지켜주는 안전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마음의 자유와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앗아가고 옥죄는 감옥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우리는 홀로 세상에 왔으며 홀로 이승을 떠나야 할 존재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그들 모두 동일한 인격으로 대하고 살다가, 떠날 때 그저 어두운 그림자 남기지 않으면 족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문제라면, 그래서 남들과 어울리기 위해 남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사는 것이다.

게다가 설령 내가 그들 마음에 들도록 산다고 한들, 그들의 요구는 끝이 없을 뿐 아니라 내가 어찌해도 마냥 호의적일 수 없다. 경쟁사회에서 그들 또한 ‘이기’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오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음욕 등의 결함을 지닌 까닭에, 내가 그들의 온전한 먹이나 인형이 아닌 한, 내가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험담, 비난, 조롱, 비웃음, 조언, 뒷말 등은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삶인데도, 게다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도,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잠시도 생존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무기력한 상태를 오랜 기간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에 의해 훈육되기 때문이다.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라캉의 말처럼 보호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사랑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약한 존재들은 무리가 필요하다.

문제는, 자신의 생존을 홀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도,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눈치나 미움을 염려해, 혹은 원망(願望)과 인정에 부응하느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평생 남의 시선에 맞춰 살다보니,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렇게 살아야 낙오자가 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남들 보기에 버젓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가정과 학교가 ‘교육’이라는 미명으로, 나를 세뇌하고 훈육시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 자신을 돌볼 여건이나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왕왕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큰 문제이며 가장 큰 걸림돌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고 힘들게 한다. 미성숙한 사랑인 줄 모르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폭력은 결코 함께 갈 수 없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이 자유롭도록 돕는 것이지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자신이 판단하기에 좋은 것이라도, 부드럽게 권하는 선에서 멈춰야 한다. 사랑하는 대상을 제 식으로 바꾸려는 순간,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폭력이다.

나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그들의 욕망을 뽑아내어야, 비로소 나 자신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고,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통해 나의 욕망을 찾고 키워 나갈 수 있는데(필자 주: 저자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표현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욕망을 찾고 키워나가는 것은 괴로움을 더 쌓아나가는 행동이다.), 이 일은 가장 큰 삶의 혁명이어서 감히 엄두내기 어렵다.

때로는 부모형제마저 끈덕지게 논쟁해야 할 만큼 힘들다. 불화를 일으키고 급기야 관계를 끊어야 할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모, 나의 선생, 이러저러하게 만나는 나의 지도자는,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한 번은 벌여야 할 싸움의 대상이다. 한 번은 도모해서 성공해야 할 혁명의 대상이다. 그로써 초래되는 상처는 어찌할 수 없다. 상처 없는 사랑, 상처 없는 성장은 없다. 한 명의 성숙한 인간으로 서기 위해 고통을 무릅쓰고 아픔을 감당해야 한다.

석가모니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쳤듯,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남들 또한 ‘나’들인 까닭에, 모든 개인은 존귀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나로서, 너는 너로서 사는 것이 결코 문제일 수 없다.

문제이기는커녕 그것이 우리 모두 추구해야 할 좋은 공동체 삶이다. 진실로 아름답고 선한 공동체는, 모든 개인들이 각자의 고유한 특이성을 존중할 뿐 아니라 서로 감상(鑑賞)하고 나누는 ‘따로, 그리고 함께’ 곧 고유한 독립적인 개인들이 공존하는 집합이다.

전체성에 속박된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화나 단결이나 통일이라는 언어는 오직,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성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다룰 수 있을 때 오직 그때만 유용하다.

 

우리는 어리석어서 종종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린다. 그것에 따라 웃고 울며 마음이 휘둘린다. 우리의 소중한 삶을 그것에 온통 기댄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것마저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반복해서 썼듯,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여 평정을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좌고우면하지 말고 단호히 바꾸는 것 또한 중요하다.

적어도 나의 씀씀이, 물건, 외양, 건강 등은 상당 부분 내가 통제할 수 있다. 나의 공간과 시간, 가치관과 삶의 방식도 그렇다. 외양이 곧 인격이라고 믿지 않거든, 혹은 냉철히 생각해, 외양으로 환심을 사거나 이익을 얻을 일이 없다면, 더 현실적으로, 외양으로 먹고 살아야 할 일이 아니라면, 외양은 불쾌감을 주지 않고 단정한 것으로 충분하다.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생전에 입었던 옷이 몇 벌밖에 없었다. 늘 똑같은 옷만 입는 것으로 유명한 스티브잡스는, 외양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위해 쓰는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의 집 가구도 필요한 몇 개만 두고 살았다. 페이스북을 창립한 최고경영자 저커버그도 매일 같은 종류의 티셔츠와 바지를 입는다. <테넷>으로 돌아온 할리우드스타 로버트 패틴슨은 스케이터 티셔츠를 입는다. 영국 왕세손비 케이트 미들턴은 중요한 이벤트 자리에서 똑같은 옷을 3년 입었다. 앤디워홀은 식사마저 캠벌 수프로 고정시켜 단순하게 했다. 단순하게 입고 단순하게 먹고 단순하게 사는 것은, 시간 낭비뿐 아니라 정신적 소음(스트레스)도 줄인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남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그렇게 자신을 존귀하게 여겨 자신의 삶을 돌보는 일에서 출발한다...(중략)...

소유욕에 붙잡혀 무거운 짐을 꽉 끌어안고서 무엇을, 그리고 얼마나 경험하겠는가? 무거운 짐을 잔뜩 진 자가 볼 수 있는 것이 발 디딜 곳밖에 더 있겠는가? ...(중략)... 소유하는 만큼 덜 존재하고, 존재할수록 덜 소유하는 법이다.

오스카상 수상자 맥커너히(M. McConaughey)는 성공하고서도 트레일러 집에서 산다. 이케아(IKEA) 창립자 캄프라드(I. Kamprad)는 헌옷을 사고 오래된 볼보 차를 탔다. 세네카에 따르면 스토아학파 철학자 크리시포스(Chrysippus)는 이렇게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고 무엇이든 유용하게 쓸 수 있는데, 어리석은 자는 무수히 많은 것이 필요하면서 어떤 것도 유용하게 쓸 수 없다.”

스마트폰은 분명 여러모로 편리하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삶을 곤궁하게 만든다. 사물 특히 기계의 문제는, 그것이 주는 이로움에 눈멀어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고 종속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하지 못한 채, 자연과 사물과 인간 간의 통일성을 잃을 뿐 아니라 자신마저 돌아볼 여지를 잃는다.

스몸비(스마트폰+좀비)라는 신조어가 얼마나 끔찍한지 간과하거나 외면한다. 몸을 위해 때때로 해독하듯, 정신의 건강을 위해 ‘기계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조용하고 소박한 삶은 끊임없는 동요와 결부된 성공의 추구보다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존귀한 자여, 존귀함을 회복하기 위해 삶을 바꾸어야 하리라. 복잡하고 산만한 삶에서 단순한 삶으로. 소유양식의 삶에서 존재양식의 삶으로. 적게 소비하고 적게 소유하는 단순한 삶은, 자신뿐 아니라 위기에 처한 지구환경에도 이롭다.

“행복의 비밀은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적은 것을 즐기는 능력을 개발하는 데 있다.”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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