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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초기불교

“인류는 자아니 유일신이니 하는 이러한 존재론적 실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규명하려는 발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D25 - 우둠바리까 사자후경)

by Rihan 2023.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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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가 니까야 3권 P.87-88

그 무렵에 니그로다 유행승은 3천 명 정도의 큰 유행승의 회중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시끄럽고 큰 목소리로 여러 가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즉 왕의 이야기, 도둑 이야기, 대신들 이야기, 군대 이야기, 겁나는 이야기, 전쟁 이야기, 음식 이야기, 음료수 이야기, 옷 이야기, 침대 이야기, 화환 이야기, 향 이야기, 친척 이야기, 탈것에 대한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성읍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나라에 대한 이야기, 여자 이야기, 영웅 이야기, 거리 이야기, 우물 이야기, 전에 죽은 자에 관한 이야기, 하찮은 이야기, 세상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바다에 관련된 이야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니그로다 유행승은 산다나 장자가 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자신의 회중을 조용히 하도록 하였다.

"존자들은 조용히 하시오. 존자들은 소리를 내지 마시오. 사문 고따마의 제자인 산다나 장자가 오고 있소. 흰 옷을 입은 사문 고따마의 재가 제자들이 라자가하에 살고 있는데 이 자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산다나 장자라오. 그런데 저 존자들은 조용함을 좋아하고 조용함으로 단련되고 조용함을 칭송한다오. 이제 우리 회중이 조용함을 알면 그는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하오."

..."외도 유행승들과 세존은 참으로 다릅니다. 외도 유행승들은 끼리끼리 모여서는 시끄럽고 큰 목소리로 여러 가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즉 왕의 이야기 ...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숲이나 밀림 속에 있는 조용하고 소리가 없고 한적하고 사람들로부터 멀고 혼자 앉기에 좋은 외딴 처소들을 수용합니다."

 

 

2. 디가 니까야 1권 P.475 주해 514-515

무언가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는 그런 관념과 관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결코 부처님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세존의 고구정녕하신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뽓타빠다는 안타깝게도 계속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세존께 질문한다.

그 당시 인도의 대표적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뽓타빠다 유행승처럼, 특히 지성인이니 지식인이니 철학자니 종교인이니 수행자니 구도자니 하면서 인류는 자아니 유일신이니 하는 이러한 존재론적 실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규명하고 그것과 합일하고 그것의 은총을 받으려는 발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가설, 발상, 관념, 개념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그를 진정한 불교 수행자라 부르고, 그를 출격대장부라 부르고, 그를 무위진인이라 부를 것이다.

 

 

3. 디가 니까야 3권 P.94 주해 62-63

"'마음이 흡족하다'는 것은 '다른 누가 나와 같은 이런 고행에 [몰두]한단 말인가?'라고 마음이 만족한 것이다." (DA.iii.836) 자신의 고행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복주서의 설명대로 큰 자만(atimāna)이니 그것은 오염원에 휩싸여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한편 주석서에서는 말하기를, 이것은 외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승단에서는 두타행(dhutaṅga, 두땅가)을 하는 자들이 이런 자만을 가지면 그것도 오염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염원의 완전한 소멸, 즉 해탈·열반을 지향하지 않는 두타행과 계행은 자만을 기르는 두타행에 지나지 않고 자만을 기르기 위해서 계를 지키는 꼴이 되고 만다는 뼈아픈 말씀이시다.

...계를 지니는 자는 철저한 자기 단속(saṁvāra)에 전념해야 한다. 이러한 근본을 놓쳐 버리면 단지 남을 비난하기 위해서 계를 지키는 꼴밖에 더 되는가?

 

 

4. 디가 니까야 3권 P.110-111

"세존이시여, 저는 늙고 나이 든, 스승들의 전통을 가진 유행승들로부터 '옛날에 아라한 · 정등각들이 있었는데 그분 세존들은 시끄럽고 큰 목소리로 여러 가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즉 왕의 이야기, 도둑 이야기 ...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였다'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저와 저의 스승의 전통에서 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신에 저는 '그분 세존들은 숲이나 밀림 속에 있는 조용하고 소리가 없고 한적하고 사람들로부터 멀고 한거하기에 좋은 외딴 처소들을 수용한다.'라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의 세존과 같습니다."

"...니그로다여, 그러나 그대는 잘못을 범한 것을 잘못을 범한 것이라고 인정한 다음 법답게 드러내어 바로 잡았다. 그런 그대를 나는 받아들이노라. 니그로다여, 성스러운 율에서 잘못을 범한 것을 잘못을 범한 것이라 인정한 다음 법답게 드러내어 바로 잡고 미래의 단속을 얻은 자에게는 향상이 있기 때문이니라."

 

 

5. 디가 니까야 3권 P.111-112

"...니그로다여,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교활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정직한 지혜로운 사람이 온다면 나는 교계하고 법을 가르친다. 칠 년을 가르친 대로 도를 닦으면, 오래지 않아 그것을 위하여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떠나 출가한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결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니그로다여, 칠 년은 그만두자. ... 육 년을 ... 오 년을 ... 사 년을 ... 삼 년을 ... 이 년을 ... 일 년을 ... 일 년은 그만 두자. 칠 개월을 ... 육 개월을 ... 오 개월을 ... 사 개월을 ... 삼 개월을 ... 이 개월을 ... 일 개월을 ... 보름을 ... 니그로다여, 보름은 그만 두자. 교활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정직한 지혜로운 사람이 온다면 나는 교계하고 법을 가르친다. 칠 일을 가르친 대로 도를 닦으면, 오래지 않아 그것을 위하여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떠나 출가한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결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⁷⁹⁾

⁷⁹⁾ 부처님의 자신에 찬 말씀을 보라! 빠르게는 7일, 늦어도 7년이면 청정범행의 완결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증득한다고 힘주어 말씀하고 계신다.

 

 

6. 디가 니까야 3권 P.114-115

"...니그로다여, 오염원이요 재생으로 인도하고 걱정거리요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며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가져오는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지 못한 채로 있다면, 그런 것을 제거하도록 나는 법을 설한다. 그대들이 그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원인 법들은 제거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은 증장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⁸⁰⁾

⁸⁰⁾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간곡하게 말씀하신다. '내 제자가 되어라. 불교로 개종해라.'는 어떤 말씀도 이처럼 당신이 스스로 거부하고 계신다. 누구의 제자가 되었든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를 고수하든 그것은 상관없다고 천명하신다. 단지 오염원, 불선법, 번뇌를 멸절할 그런 법을 일러주리니 그것을 듣고 그대로 행하라고 하시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 유행승들은 말이 없어졌고 의기소침하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초췌하여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앉아 있었다. 마라에 마음이 사로잡혔기 때문이다.⁸²⁾

⁸²⁾ 중부 견서계경 등을 통해서 보면 고행자들이 고행을 하는 이유는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이다. 니그로다 유행승의 무리도 결국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존께서 아무리 고구정녕히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는 길, 해탈·열반의 길을 가르쳐주려고 하셔도 거기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마라에 사로잡혀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자체가 이미 즐거움이나 쾌락을 관장하는 마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경은 본서 제 1권의 '깟사빠 사자후경'(D8)과 대조가 된다. 꼭 같이 고행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꼭 같이 고행보다 더 수승한 길을 제시하셨지만, '깟사빠 사자후경'에서 고행승 깟사빠는 세존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고행의 길의 한계를 절감하고 고행을 버리고 세존의 제자가 되어 아라한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니그로다 유행승은 고행의 길의 한계를 절감하지 못하고 그냥 고행을 통한 금욕에 주저앉고 만다. 아마 이것은 니그로다 유행승이 3천 명이라는 많은 대중을 거느리면서 이미 사회적으로 명성과 이양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가 이룬 조그마한 성취에 도취되어 더 큰길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범부 인간들의 속성일 것이다.

그때 세존께 이런 생각이 드셨다. '이 쓸모없는 인간들은 모두 빠삐만에게 붙잡혔구나. 단 한 명도 '오, 참으로 우리는 구경의 지혜를 얻도록 사문 고따마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도록 하자. 7일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이렇게 말하는 자가 없구나.'

 

 

7. 2023년 초불 서울경기모임 5월 발제문 P.2-3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 이유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 가르침의 정수는 '사성제'이고 이에 대한 지혜를 '정견'이라 부른다. 정견을 보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 중 필수적 조건은 기존의 세속적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마음이 다른 대상들에게로 헤매면서 정견을, 우둠바라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니그로다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니그로다와 그의 유행승들은 어떤 대상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결정적 순간에 멍한 상태로 있었던 것일까?

세상의 기원의 문제
이들은 위에서 말했듯이 온갖 주제들을 놓고 논쟁을 하고 있었다. 이 주제들은 사실상 세상에서 다룰 수 있는 모든 주제들이라 할 수 있다. 니그로다는 이런 주제들에 대해 토론과 논쟁을 하는 것이 통찰지, 지혜를 기르는 방법이라 여겼던 것 같다. 세상에 대한 모든 주제들에 대한 지혜, 즉 '일체에 대한 지혜'의 추구가 그들의 목표였던 셈이다. 이들이 다룬 수많은 주제들은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로 정리되는데 이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을 보면 '이렇다는 이야기'는 영속, 증장, 감각적 쾌락(kāma-sukha)에 관한 것이고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는 단멸, 쇠퇴, 자기학대(atta-kilamatha)에 관한 것이라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로 호명되는데 "[해탈의] 출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천상과 해탈의 길(sagga-mokha-magga)과는 평행선을 긋게 되는 이야기"라는 이유에서 그렇다. 이렇듯 '쓸데없는 이야기'는 크게 상견과 단견으로 나뉠 수 있고 니그로다는 정황상 바라문 출신의 나이 든 유행승이었으며 상견론자였던 것 같다.

 

 

8. 2023년 초불 서울경기모임 5월 발제문 P.4-5

이들이 특정 전생을 본 뒤 생긴 느낌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렬했을 것이고 거기서 아주 강한 갈애가 파생되었다. 이 갈애는 다시 그 세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욕망(kāma)으로 발전했고 그것이 견해로 굳어져 취착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 세계로 떨어진 이유가 자신들의 한계, 실수, 잘못이라고 여겼으니 그것을 만회해서 다시 그 세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속죄'가 필요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이 속죄에 대한 생각은 괴로움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속죄하기 위해서는 어떤 괴로움이라도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괴로움이라도 감당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그 천상 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은 속죄해야 하며 이것을 위해서 괴로움을 꼭 겪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행복이 생긴다'는 그들의 사유와 행위의 밑바탕에 깔린, 그걸 정당화하면서도 토대가 되는 논리가 생겨나게 된다. 괴로울수록 속죄가 빨리 되어서 영원하고 행복했다고 여긴 그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여겨서이다.

괴로움은 행복의 원인이 아니다.
문제는 과연 괴로움이 행복을 가져오느냐는 것이고 이는 '인과'의 문제이기도 하다. 괴로움이라는 원인이 있어야 행복이라는 결과가 나온다는 말인데 부처님께서는 얼핏 보기에 인과관계처럼 보이는 이 견해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왜냐면 인과관계가 아닌 것을 인과관계라고 착각한 것이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경에서 나오는 이와 관련된 부처님의 말씀을 종합해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괴로움에서 행복이 나온다고 여기는 것은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한 것일 뿐이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목적과 수단, 목표와 방법 그리고 도닦음과 수행에 관련한 중대한 문제이다. 결과인 C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원인인 A가 있어야 한다고 하자. 그런데 C와는 상관관계에 있는, 혹은 그것을 이루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인 B를 C의 원인이라고 착각하면 그 목적과는 영원히 '평행선'을 그어버리게 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공부하러 독서실에 간다고 하자. 그 사람은 독서실에 가면 괴로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 곳에 가는 것이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의자에 오래 앉아 생기는 허리의 통증을 참아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그 고통이 더 세질 수도 있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이렇게 고통과 좋은 성적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연관성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공부를 잘하게 된 원인을 허리의 통증이라고 여기게 되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왜냐면 나중에 그 사람은 의도적으로 허리가 아픈 상태에서 공부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거나 그 괴로움의 수준을 일부러 더 높게 만들기에 그렇다. 왜냐면 괴로울수록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해서이다. 하지만 성적은 더 떨어지게 될 뿐이고 행여 공부가 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없게 된다.¹²⁾ 그리고 정작 좋은 성적을 얻게 한 진정한 원인은 도외시하게 된다.

¹²⁾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사람은 그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을 아예 하지 않게 된다는 데 있다. 나중에는 괴로움에서 행복이 나온다고 여기는 수준이 아니라 괴로움 자체가 행복이라고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전교 1등이 되거나 성적이 하위권에서 머무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러 능력들이 조화롭고 총체적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괴로운 상태보다는 행복한 상태가 더 집중이 잘 되며 여러 유익한 능력들이 방해 없이 잘 발현되기 마련이다.¹³⁾  이런 건 어찌 보면 상식에 속하는 문제처럼 보인다. 현자처럼 보이는 저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행복이 나온다' 같은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을 리가 없다고 여길 정도로 이 생각은 말도 안 되는 논리이고 거부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¹³⁾ 그럼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겠다. '감각적 쾌락을 누릴 때는 행복을 느끼니까 쾌락을 누리면서 공부하면 더 좋은 성적을 낼 것이다.' 당연히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 왜? 감각적 쾌락은 공부에 필요한 여러 유익한 능력들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인과에 대한 사유는 몇 가지를 전제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고유성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유성질에 대해 잘 모르거나 고유성질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위와 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행복이 나온다고 착각하면 다음과 같은 경우도 생기게 된다. 개나 소를 보니 무척 평화롭고 욕심이 없어 보이며 온갖 괴로움을 다 겪어도 묵묵히 견디어 낸다. 고행자들도 괴로움을 묵묵히 견디어 낸다. 고행을 통해 천상에 간다고 여기니까 말이다. 개나 소는 고행자들보다 더 괴로움을 많이 겪으니 개나 소처럼 살면 자신은 다음 생에 더 수승한 과보를 얻을 것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선 개나 소의 행동을 모방하면 다음 생에 축생으로 태어날 뿐이고 개나 소의 행동을 모방해서 천상에 태어난다는 '사견'까지 지니게 되면 더 안 좋은 악처에 태어나게 된다고 하신다.

'우둠바리까 사자후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경의 초반부에 거론된 '고행을 통한 금욕의 완성'이라는 말은 '고행을 통한 금욕의 청정함'이라는 말로 바뀌는 걸 확인할 수 있고 후자는 더 이상 고행자들의 수행방식이 아닌 청정함을 이루기 위한 도닦음인 계정혜 삼학과 닮았다. 그리고 이 고행을 통한 금욕의 청정함마저도 '천안통'에서 끝이 난다. 이것은 고행으로는 그 이상의 단계에 이를 수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들린다. 즉 괴로움으로는 청정함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8. 2023년 초불 서울경기모임 5월 발제문 P.5-6

니그로다 유행승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정수를 눈 앞에 두고도 고개를 돌렸다. 그 이유가 마라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며 경에 나오며 이는 그들의 강한 갈애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 갈애는 '세상의 기원'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뿐만 아니라 당시 대다수 사문·바라문들 역시 이런 갈애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사유, 실천을 발전시키고 유지시켜 나간 것 같다. 이 경에서는 그들의 사유 방식으로 세상의 모든 주제들을 놓고 토론, 논쟁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실천으로서 고행을 통한 금욕이 거론됨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이렇게 수많은 주제들을 놓고 논쟁하고 괴로움을 추구하는 고행을 했던 이유는 '일체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였고 부처님께서는 이를 옛 아라한·정등각자들의 전통과 대비시키셨다. 이는 외도 사문·바라문들의 사유와 실천으로는 진정한 '통찰지의 완성'에 이를 수 없다는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외도 사문·바라문들 사유를 '빠빤쨔 산냐 상카(papañca-saññā-sańkha)'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하셨다. 마음챙김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갈애, 사견, 자만이 활개를 치게 되면 이와 결합된 인식이 온갖 해로운 사유들을 파생시킨다는 것이다. 이 해로운 사유들은 상견과 단견으로 나뉘고 이러한 사유들 밑바탕에는 그걸 정당화시키는 논리인 '괴로움에서 행복이 생긴다'라는 잘못된 인과관계 혹은 인과관계의 부정이 전제되어 있다. 인과관계처럼 보이는 이 논리는 또 다른 착각이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고행은 이 생각이 겉으로 드러난 양상일 뿐이다. 이 경에서 부처님께서 미래에 전하시려는 메시지는 이런 착각을 지니고 있으면 절대 '우둠바라'를 볼 수 없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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