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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청정도론

가르침의 6가지 덕목 - ⑥ 지혜로운 이들이 각자 스스로 알아야 한다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고 말하는 이유 2가지

by Rihan 2025.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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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섯 번째 덕목 - 지혜로운 이들이 각자 스스로 알아야 하는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

 

Dhamm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i.

가르침은 각자 스스로 알아져야 한다 지혜로운 이들에 의해.

 

  • Pacattaṃ각자, 스스로, 개별적으로: paṭi(~에 대하여, ~를 향하여) + atta(자기, 자아)
  • veditabbo알아야 하는, 체득되어야 하는: √vid(알다, to know) + -tabba(~되어야 할) + -o(남성 주격 단수 어미)
  • viññūhi지혜로운 사람들에 의해, 현자들에 의해: vi-(분리하여, 명확하게, 특별하게) + √ñā(알다) + -ū(행위자) → viññū(지혜로운 자) + -hi(~에 의해서 - 도구격 복수 어미)

 

1) '빳짯땅 웨디땁보'는 '스스로 아는 것'을 뜻한다. 법은 각자가 노력하여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다.

 

출세간법은 각자가 자신의 존재상속에서만 스스로 알 수 있다.

각자가 얻은 출세간의 행복은 그 자신만 경험하고 누릴 수 있다.

 

낮은 단계의 성자들은 높은 단계 성자들의 출세간법을 알지 못한다.

각자가 자신의 단계에 따라서 자신의 존재상속에서만 알 수 있다.

 

아무리 존경하는 스승과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 해도 스승의 성취를 나의 것으로 가져올 수는 없다.

마치 내가 축제를 보고 설명해 주어도 듣는 사람이 똑같이 그것을 느낄 순 없는 것과 같다.

병은 스스로 먹은 약으로만 낫는다.

 

번뇌의 제거란 스스로 직접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도로써 번뇌를 제거한 자만 결과에 행복하게 머물고, 열반을 직접 경험한다.

 

본인이 직접 법을 알아야 하고, 스스로 깨달은 법을 깨달은 만큼만 직접 누릴 수 있다.
깨닫기 위해서 각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깨달은 후에도 각자 알아서 누리는 법이다.

 

 

2) '윈뉴히'는 체득하는 주체가 '지혜로운 사람들'임을 나타낸다. 법은 어리석은 자의 영역(visaya)이 아니다.

 

출세간법은 지혜 있는 자(viññū)에겐 분명히 드러나지만 어리석은 자(bāla)에게는 체험될 수 없는 영역이다.

지혜로운 성자는 각자 스스로가 자신 안에서 도를 닦았고, 과를 얻었고, 열반을 실현했다고 알게 된다.

 

이번 생에 도와 과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바라밀이나 지혜가 충분하지 않은 이들은 출세간법을 알 수 없다.

즉, 준비된 현자들만 출세간법 아홉 가지를 알 수 있다.

 

때문에 열반을 성취하길 바라는 수행자는 윤회를 거듭하는 생 속에서 스스로 부지런히 준비해나가야 한다.

부지런히 배우고, 빠라미 공덕을 쌓고, 지혜를 닦는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85. (6)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리한 지자 등 모든 지자는 '나는 도를 닦았고, 과를 얻었고, 열반을 실현했다'라고 각각 자신 안에서 알아야 한다. 은사가 도를 닦을 때 [제자가] 함께 머문다 해서 그의 오염원들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은사가 과를 증득했다 해서 제자가 행복하게 머무는 것도 아니요, 은사가 열반을 실현했다 해서 제자가 실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타인의 머리에 꾸며놓은 장식처럼 [밖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지자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볼 수 있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경계가 아니다.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517, 초기불전연구원(2021)

 

인용한 청정도론 85번 문단의 마지막 문장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경계가 아니다.'의 원문은 "bālānaṃ pana avisayo cesa."다.

필자는 여기서 '경계'를 '영역'으로 해석하면 더 쉽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계'로 번역된 visaya는 주로 '대상, 영역, 범위'의 뜻을 지닌다. 비슷한 용어로 gocara가 있다.

이렇게 볼 때 해당 문장은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영역이 아니다bālānaṃ pana avisayo cesa."로 번역할 수 있다.

 

고짜라의 어원은 'go(소, cow) + cara(가다, 거닐다, 돌아다니다)'로, 직역하자면 소가 거닐며 풀을 뜯는 곳, 목초지를 의미한다.

수행에서의 고짜라는 영역, 범위를 뜻한다. 영어로는 domain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법을 직접 체험하고 깨닫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이해와 경험의 영역(gocara) 밖의 일이다.

참고로 고짜라는 네 가지 삼빠자나 중 gocara-sampajañña로도 언급된다.

 

'분명한 앎'이라는 뜻의 sampajañña(saṃ-완전히 + pa-앞으로 + √ñā알다)는 sati-sampajañña라는 구절로 자주 등장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단지 사띠로 알아채는 것을 넘어, 그것이 유익한지, 적절한지 등을 지혜롭게 꿰뚫어 아는 것이 삼빠자나다.

 

삼빠자나는 선·불선을 구별하고 식별하므로 담마위짜야(dhamma법을 + vi-분리하여 + √ci찾다 → 법을 조사함, 택법각지)와 같은 것이다.

 

  1. Sātthaka-sampajañña이익됨을 알아차림
    • 지금 하는 행동이 유익한가(kusala), 해로운가(akusala)를 지혜롭게 안다.
    • 초기불교에서 kusala의 기준은 무엇인가? '열반으로 향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이다.
    • e.g. 화가 나서 거친 말을 하려고 할 때, 그 말이 나와 남에게 해롭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멈추는 지혜
  2. Sappāya-sampajaña적당함을 알아차림
    • 지금 하는 행동이 때와 장소, 상황에 적절한 것인지 지혜롭게 안다.
    • 이익되는 좋은 일을 하더라도 불선업이 나타날 수 있는 때라면 적당한 때가 아니다.
    • e.g. 법담은 유익하지만, 조용히 해야 할 자리에서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을 아는 것. 명상에 좋은 장소를 선택하는 것.
  3. Gocara-sampajañña(수행)영역을 알아차림
    • 마음이 머물러야 할 '수행의 영역(목초지)'을 벗어나지 않도록 지혜롭게 알아차린다.
    • 수행자에게는 자신의 수행대상, 명상주제가 자신의 고짜라이다. 자기 대상을 놓치지 않고 그 안에서 머무른다.
    • 우리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감각적 욕망의 대상(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소리 등)이라는 '엉뚱한 목초지'로 달려가려 한다. '고짜라 삼빠자나'는 마음이 수행의 대상인 몸과 마음에서 벗어나 감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방황하려 할 때, 그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본래의 수행 영역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지혜다. 마치 목동이 소가 위험한 곳이나 남의 밭으로 가려할 때 지팡이로 이끌어 다시 목초지로 데려오는 것과 같다.
    • 고짜라 삼빠자나는 수행자의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대상을 정신과 물질로 해체해서 볼 수 있는 수행자라면 그와 같이 본다. 자기 대상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보지 못하는 수행자는 단지 선업 대상과 영역을 놓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전자는 마음에서 생긴 물질 때문에 몸이 가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경우이다. 후자는 '들숨이다, 날숨이다'라고 알고 단지 선업을 지으면서 수행하는 경우이다.
    •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자기가 지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대상'에 '만족하여 머무는 관점'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세속적인 표현으로는 메타인지를 통해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잘 알고 지금 해야 하는 것에 만족하며 머무는 것으로도 표현할 수 있겠다.
  4. Asammoha-sampajañña미혹되지 않음의 알아차림
    •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몸, 느낌, 마음 등)을 있는 그대로, 즉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의 관점에서 미혹(= sammoha완전한 어리석음)없이 실상대로 꿰뚫어 아는 것이다.
    • 이것은 위빳사나의 분석적 지혜다. '나', '내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sakkāya-diṭṭhi) 없이, 단지 조건 따라 일어나는 정신적-물질적 현상의 흐름으로 파악한다.
    • 따라서 아사모하 삼빠자나는 16가지 위빳사나 지혜 중 첫 번째 Nāma-rūpa-pariccheda-ñāṇa(정신·물질 구별 지혜)를 통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볼 수 있을 때부터 시작되는 삼빠자나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위빳사나 지혜는 '미혹(sammoha)'의 핵심인 '나'라는 착각을 체험적으로 깨뜨리는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들의 원인이나 특성을 관찰할 수 없다. 즉, 나마-루빠-빠리쩨다-냐나는 일상의 알아차림(sati)을 넘어 분석적이고 통찰적인 지혜(paññā)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 혹은 정신-물질을 뚜렷이 구별할 수 있을 때부터(즉 Nāma-rūpa-pariccheda-ñāṇa 단계) ‘미혹없음(asammoha)’이 첫 걸음을 뗀다고 보지만, 삼특상의 직접 체험이 드러나는 'Sammasana-ñāṇa(철저한 이해의 지혜 - 3번째 위빳사나 지혜) ~ Udaya-bbaya-ñāṇa(생멸의 지혜 - 4번째 위빳사나 지혜)'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한 아사모하 삼빠자나가 성립된다고 볼 수도 있다.
    • e.g. 다리가 저려올 때, '내 다리'가 아프다고 괴로워하는 대신, 그것을 단지 '몸에서 일어난 불유쾌한 느낌(vedanā)일 뿐'이며, 이 느낌 또한 변해가고 실체가 없다고 꿰뚫어 보는 지혜.

 

어리석은 자(bāla)의 마음은 늘 '남의 영역', '감각적 욕망의 영역'에서 방황한다.

때문에 이익을 얻지 못하고, 열반이라는 궁극의 영역에 들어갈 수도 없다.

 

현명한 자(viññū)의 마음은 나의 영역, 올바른 영역(수행대상)을 능숙하게 구별하여 그곳에 행복하게 머문다.

때문에 출세간법은 현자에 의해서만 스스로 체득될 수 있다.

 

6. 스스로 아는 것(paccataṃ veditabbo)

... 성자 모두는 도를 얻은 뒤에 스스로 이 사실들을 알아낸다. 다시 말해 자신이 성스런 수행을 했으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도와 결과를 성취했고 열반을 증득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왜냐면 번뇌의 제거란 스스로 직접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까운 제자라 하더라도 스승이 얻은 도를 통해 번뇌를 제거할 수는 없다. 또한 스승이 성취한 결과를 통해 도의 결과에 머물 수도 없다. 스승이 열반을 마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통해 자신 또한 마음의 대상으로 열반으로 삼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단지 자신의 노력으로 도를 얻는 것에 의해서만 내면 속의 번뇌를 제거할 수 있으며, 스스로 도지를 성취했을 때만 결과에 머무는 일이 가능하다. 열반 역시 직접적인 경험의 주제이지,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 증득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9가지 출세간법이 다른 사람을 장엄하는 장식물이라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성자의 재산으로서 그만이 누릴 수 있다. 출세간법은 슬기로운 자에게 속한 것이며 어리석은 자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처럼 9가지 출세간법은 성자들의 재산이니, 그들만이 자신의 마음으로 증득하고 누린다. 그러므로 스스로 아는 것이라 한다.

- 밍군 사야도 지음, 『대불전경 제10권』 pp.75~76, (주)한언(2009)
현자들이라면 각자 알 수 있는 가르침

마지막 여섯 번째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자들에 의해서viññūhi 각자paccattaṃ 알 수 있는veditabba 법이기 때문에 '현자들이라면 각자 알 수 있는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i'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먼저 현자들만 출세간법 아홉 가지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번 생에 도와 과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바라밀이나 지혜가 충분하지 않은 이들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각자가 자신의 존재상속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이의 장식을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축제를 보고 설명해 주어도 듣는 사람이 똑같이 그것을 느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얻은 출세간의 행복은 그 자신만 누릴 수 있습니다. 스승이 깨달은 법을 단지 같이 지낸다고 하여 제자가 알 수는 없습니다. 낮은 단계의 성자들도 높은 단계의 성자들의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단계에 따라서 자신의 존재상속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현자들만 각자각자 스스로를 대상으로
알수있고 경험하는 거룩한- 법이라네

- 비구 일창 담마간다 지음, 『가르침을 배우다』 pp.63~64, 도서출판 불방일(2021)
깨달은 분들이 제각각 알고 누리는 법.

...윈뉴히(깨달은 성인들), 위(특별하게), 뉴(깨달았던), 히(자들이). 이 분들은 모르는 분들이 아니고 깨달은 분들입니다. 빳짯땅(각자 각자가), 웨디땁보(알아 누리고 있다). 그래서 열반을 즐기는데 각각이 나름대로 즐기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열반을 즐기고 사리불은 사리불의 열반을 즐깁니다. 열반이 하나만 있어서 돌려가면서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열반을 즐길 때 사리불이 줄서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깨달으면 본인의 열반을 본인이 즐기는 겁니다. 다른 것은 즐길 때 모자라면 뺏으려고 전쟁을 하며 서로 싸우지만, 부처님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깨달은 자들은 각각의 법을 알아서 편안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불법은 누가 대신 해 주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도 나를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스승이 제자 대신 수행을 하여 제자로 하여금 열반을 보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본인의 마음으로만, 닷탑보(즐길 수 있고), 아누바위땁보(누릴 수 있고), 윈뉴히(알 수 있기 때문에), 발라나(지혜 없는 바보들은) 누릴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열반을 즐기고 누리려면 본인이 직접 법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깨달은 법을 스스로 알고 직접 누릴 수 있습니다. 깨달은 자만 누릴 수 있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누릴 수 없는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법을 깨달은 만큼 최상의 행복을 각자가 누린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들은 각각의 행복을 누리고, 깨닫지 못하면 알 수 없는 법입니다. 깨닫기 위해서 각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깨달은 후에도 각자 알아서 누리는 법입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517~521, (사)법승 담마야나(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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