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열반/아비담마

왜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는 탐욕의 뿌리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일까?

by Rihan 2023. 9. 22.
728x90

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을 보면 23번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삿된 음행과 간탐과 그릇된 견해는 탐욕의 뿌리에서... 일어난다.

 

필자는 그릇된 견해가 탐욕의 뿌리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업의 길(kamma-patha)에서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는 주로 인과를 부정하는 도덕적 허무주의를 뜻한다고 배운다.

물론 사견의 종류는 다양하기 때문에 꼭 그릇된 견해가 도덕적 허무주의만을 뜻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23번 문단에 달린 스님들의 해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는 마음부수법들 가운데 속하는 사견의 한 형태이다.

 

마음부수법으로서의 사견(diṭṭhi)은 해로운 때때로들 10가지 마음부수들 중에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이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날 수 있는 3가지 마음부수 중 하나이다.

탐욕(lobha), 사견(diṭṭhi), 자만(māna)의 3가지가 탐욕과 관계된 마음부수법들이며, 이들은 '거머쥠'의 특징을 공통으로 가진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246-248)

(5) 탐욕(lobha): 

'탐욕'으로 옮기는 lobha는 √lubh(be lustful)의 남성명사이다...

"...이 가운데서 탐욕은 마치 끈끈이처럼 대상을 거머쥐는 특징을 가진다. 마치 달구어진 냄비에 놓인 고깃덩이처럼 달라붙는 역할을 한다. 마치 염색하는 안료처럼 버리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족쇄]에 묶이게 될 법들에서 달콤함을 봄이 가까운 원인이다. 탐욕은 갈애의 강물로 늘어나면서 마치 강물의 거센 물살이 큰 바다로 인도하듯 중생을 잡아 악처로 인도한다고 알아야 한다."

(6) 사견(diṭṭhi)

'사견'으로 옮긴 diṭṭhi는 √dṛś(to see)의 여성명사로 견해를 뜻한다... diṭṭhi가 단독으로 쓰이거나 여기서처럼 해로운 마음부수법으로 나타나면 잘못된 견해나 그릇된 견해를 뜻하기 때문에 '사견'으로 옮기고 있다...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유신견, sakāya-diṭṭhi)', 즉 자아가 있다는 견해는 불교에서 그릇된 견해의 표본이다. 사실 모든 잘못된 견해는 이런 존재론적인 발상에 기인한 것이며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어떤 식으로든 갈애, 특히 존재에 대한 갈애(유애, bhava-taṇhā)는 생기게 마련일 것이다. 한편 『청정도론』 에서는 micchā-diṭṭhi(그릇된 견해)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의 특징은 이치에 어긋나는 천착이다. 집착하는 역할을 한다. 그릇된 천착으로 나타난다. 성스러운 제자들을 친견하고자 하지 않음 등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7) 자만(māna)

'자만'으로 옮긴 māna는 √man(to think)의 남성명사로서 자신을 [많이, 높게]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자만을 뜻한다. 경에서 나타나는 거만(교만, atimāna)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겠다. 초기불전에서 자만은 "뛰어나다, 동등하다, 못하다"라는 세 가지 자만으로 나타난다(필자 주 - 자신과 남을 비교하는 심리현상 자체가 전부 자만이며, 열등감도 일종의 자만이다)...

여기서 보듯이 열등감도 니까야와 아비담마에서는 자만에 포함된다. 사견이 내가 존재한다는 견해라면 이 자만은 '나'라는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남과 비교해서 평가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한편 경에서 많이 나타나는 "이것은 내 것이다(etaṃ mama). 이것은 나다(seo 'haṃ asmi).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eso me attā)."(M22 §15 등)라는 구문을 각각 탐욕과 자만과 사견의 세 가지에 배대해서 설명하기도 한다.(MA.ii.110 등) 모든 종류의 탐욕에는 항상 이런 세 가지 측면이 함께하는 것이고 그래서 탐욕과 사견과 자만을 탐욕의 세 개 조(lobha-tika)로 묶은 것이다...

"... 이 [자만]의 특징은 오만함이다. 건방짐이 그 역할이다. 허영심으로 나타난다.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탐욕이 가까운 원인이다. 광기와 같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그릇된 견해를 '사견' 마음부수로 인지하고, 이 마음부수가 탐욕과 함께하는 마음부수임을 상기한다면 모든 의문은 간단히 해결된다.

그러나 사견이 왜 탐욕과 함께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좀 더 깊게 이해해보는 노력을 하면 사견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불변하는 존재 더미, 자아가 있다는 견해가 유신견, 사견이라고 했다.

여기서 상견, 단견이 생기고 단견에서 도덕적 허무주의가 생겨날 것이다.

 

윤회를 믿거나 알고 있는 자라고 해도 상견을 가진 자는 '윤회하는 자아'에 집착하고 그 견해에도 집착할 것이다.

단견을 가진 자는 죽은 뒤에 모든 것이 끝이니 원인과 과보를 부정함으로써 도덕적 허무주의로 견해가 심화될 것이다.

 

유신견이 있는 한 존재에 대한 갈애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변하지 않는 '나'라는 존재가 있는데 어떻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유신견은 왜 생기는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니 유신견이 생긴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해 꿰뚫지 못하고, 사물의 본질이 아닌 현상만을 본다.

 

현상을 보는 마음은 다섯 무더기의 적집에 불과한 오온은 불변하는 존재, 자아로 인식한다.

결과적으로 오온을 실체가 있는 것, 집착할 만한 대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의미가 있는 것에는 욕심이 난다. 갈애를 가지고 집착하기 마련이다. 오온은 취착의 대상이 되면서 오취온이 된다.

존재론적 견해에 강하게 집착할수록 이 정신과 물질에도 자아라는 허황된 생각을 거머쥐게 된다.

 

이로 인해 끝없이 윤회로 치달리며, 더 나쁘게는 악처를 전전할 수도 있게 된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134-135)

...그릇된 견해(사견)는 어떤 것에 대해 잘못된 확신이나 믿음이나 견해를 가지고 이론화시키는 것으로(VṬ.77)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과 함께한다. 견해는 집착을 강화시켜서 마음에게 논리적 정당화를 제공하거나 아니면 견해 그 자체가 생겨나면서부터 집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릇된 견해는 모두 네 가지 마음과 연결된다... 나머지 4가지는 그릇된 견해가 없는 마음인데 여기서 탐욕은 견해가 제공해주는 정당화가 없이 작용을 한다.

 

있는 그대로를 알고 보지 못할 경우 결과는 당연히 대상에 대해 사랑스러움을 보고, 달콤함을 보며, 대상을 탐하게 된다.

사견과 함께하는 마음이 당연히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일 수밖에 없다.

 

진리는 네 가지로 설해진다.

모든 형성된 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을 보지 못하니 집착하는 것이고, 이것을 보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궁극의 자유, 궁극의 행복은 형성된 것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적멸이다. 오염원으로부터 해탈하여 업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다.

 

매순간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고 실체가 없는 괴로움의 무더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실체가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을 탐욕으로 거머쥐게 만드는 것이 사견의 역할이다.

 

사견은 견해이다. 견해는 논리적, 이성적 근거를 만들어내는 특징이 있다.

잘못된 견해는 논리적 정당화, 이론화의 과정을 통해 그 견해를 떳떳한 것으로 여기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강하게 인식된 견해는 그 자체로 사랑스럽고 의지할 만한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따라서 실제 대상 뿐 아니라 이 그릇된 견해, 사견 자체도 집착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해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나머지 4가지는 그릇된 견해가 없는 마음인데 여기서 탐욕은 견해가 제공해주는 정당화가 없이 작용을 한다."라고 한다.

이것은 자만 마음부수가 함께할 수 있는 마음들이다. 이것은 유신견이 부수어지더라도 작동할 수 있는 더 뿌리깊은 오온에 대한 취착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P.284~285)

탐욕, 사견, 자만은 모두 여덟 가지 탐욕이 함께한 마음에서 작용한다.

그중에서 탐욕은 여덟 가지 모두에서 작용하는 것이 당연하겠고
사견과 자만이 탐욕과 함께 포함되는 이유는 이 둘은 모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견은 대상을 여실지견하지 못하여 일어나는 현상이고
자만은 자부심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 남과 동등하다, 남보다 못하다라는 마음의 현상이다.

그런데 사견이 '사견과 결합된 4가지 마음'에서 반드시 발견된다고 하여 자만이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4가지 마음'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만은 반드시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4가지 마음에서만 일어나므로 이 넷과 연결지어 분류하는 것이다.

 

대상을 더 확장하여 같은 '탐욕' 카테고리로 묶인 '자만' 마음부수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오취온을 취착하는 것은 같지만, 자만은 사견과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견과 함께하지 않은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들에서도 자만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고정되지 않은 것이다.

 

사견이 여실지견하지 못해 일어나는 견해, 이론, 생각이라면

자만은 그것보다 더 뿌리깊고 미세한 무명의 영역, 흔히 잠재성향 등으로 일컫는 인식과 마음의 뿌리깊은 습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일례로 사견은 예류자의 단계에서 부수어지지만, 자만은 더욱 미세하여 아라한에 이르러서야 그 족쇄가 풀린다.

오온을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오온에 대해서 '이것은 나다', ’나는 있다‘, ’오온이 나다‘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박혀있는 것이다.

 

이러한 뿌리깊은 무명은 윤회를 거듭하며 축적된 인식과 마음의 습관, 전도(위빨라사, vipallāsa, 顚倒)현상 때문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위빨라사에 대해 견해, 인식, 마음 세 가지 위빨라사를 말한다.

 

범부는 유신견이 있어 오온을 자아라고 인식하며, 이 때는 세 가지 위빨라사가 모두 작동할 것이다.

유신견이 부수어진 성자들 중 아라한을 제외한 성자들은 견해의 위빨라사는 부수어졌다.

 

사견이 없더라도 산냐와 찟따가 너와 나라고 자주 자주 인식하고 비교할 수 있다.

이것은 습관이다. 때문에 사견 없이도 자만심이 생긴다. 자만은 산냐 위빨라사, 찟따 위빨라사와 함께한다.

 

딧티 위빨라사는 왜곡된 인식인 산냐 위빨라사로 이어지고, 왜곡된 인식은 왜곡된 생각하는 방식, 찟따 위빨라사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딧티 위빨라사가 없어지더라도 몸과 마음에 익은 습관은 쉽게 뿌리뽑히지 않는다.

 

자만의 두 측면은 존재자만과 비교자만이다.

'이것은 나다'는 존재자만이고, '뛰어나다, 동등하다, 못하다'의 생각은 비교자만이다.

 

습관적으로 오온을 '나'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이것이 나다'라는 존재자만도 있고, 습관적으로 비교하는 비교자만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견과 자만의 대상은 동일하게 오취온임을 알 수 있다.

 

차이점으로는 사견은 오온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발생한 취착이다.

이것은 허황된 이론, 철학, 논리 등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만은 오온에 대한 잘못된 인식 내지 마음에서 발생한 취착이다.

이것은 '나'라는 빤냐띠를 집착하는 주관적인 인식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오온을 취착하며, 거머쥐려 하기 때문에 사견과 자만은 탐욕과 함께하는 마음부수들이다.

참고로 사견과 자만에 대해서는 일전에 고찰해본 바 있다. 아래 글에서 그 내용을 볼 수 있다.

 

사견과 자만의 ‘상반되는 성질’이란 무엇일까?

아비담마 1권 285쪽을 보면 아래와 같이 말한다. “사견과 자만은 상반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이 둘이 동시에 생기지는 못한다.” 필자는 이 부분을 읽으며 ‘사견과 자만이 무엇이 상반되는

rihankim.tistory.com

 

 

마지막으로 사견과 자만의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 오취온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S22:15 92번 주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는 괴로움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형성된 것들에 대한 견해에서 내 것이라는 생각(mamaṃ-kāra)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아니고'라는 것은 무상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이런 견해에서 나라는 생각(ahaṃ-kāra)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것은 이런 견해에서 자아를 거머쥠(atta-ggāha)이 없기 때문이다."(MAṬ.ii.200)

"이 셋은 [각각] 갈애와 자만과 사견(taṇhā-māma-diṭṭhi)으로 거머쥠을 내던지는 것(gāha-paṭikkhepa)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봐야 한다(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는 것은 원인(hetu)과 이유(kāraṇa)와 위빳사나와 함께하는 도의 통찰지(sahavipassanāyamaggapaññā)로써 봐야 한다는 뜻이다."(AA.ii.380)


(맛지마 니까야 1권 P.136-142)


...본서 제2권 「교리문답의 짧은 경」 (M44) §2에서 담마딘나 비구니는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취착의 [대상인] 이들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들을 존재 더미라고 하셨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듯이 존재 더미(유신)는 오취온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모든 법들(sabbe dhammā)'은 오취온 즉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에 포함된 것으로만 제한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류도 등의 네 가지 도와 예류과 등의 네 가지 과와 열반이라는 출세간의 경지를 제외한 삼계의 법들만이 모든 법들에 포함된다.

그리고 복주서는 '모든 법들의 뿌리(sabba-dhamma-mūla)'로 갈애(taṇhā)와 자만(māna)과 사견(diṭṭhi)을 들고 있는데(MAṬ.i.57)..."범부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라고 나타나듯이 무명(avijjā)도 뿌리가 된다고 복주서는 밝히고 있다.(Ibid)

본경에서 모든 법들(제법)은 존재 더미(유신) 즉 오취온을 뜻하고 모든 법들의 뿌리 즉 오취온의 뿌리는 갈애와 자만과 사견과 무명이라는 주석서와 복주서의 이 설명은 중요하다. 특히... 계속해서 나타나는 '생각하다(maññati)'를 주석서는 갈애와 자만과 사견의 세 가지 허황된 생각(공상, maññanā)을 통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처럼 세 가지 허황된 생각(공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모든 법들 즉 오취온의 뿌리가 된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그가 일단 이 땅을 이와 같이 전도된 인식으로 인식하고 나면 다음 단계에서 갈애와 자만과 사견에 의한 사량분별(taṇhā-māna-diṭṭhi-papañca)은 힘을 얻는다. 여기서 그는 허황된 생각(공상, maññanā)이란 이름으로 설한 이러한 사량 분별을 통해 생각하고 헤아리고 이리저리 헤아리고 여러 측면으로 다르게 취한다...

"'[자신을] 땅이라 생각한다.'는 것은 세 가지 허황된 생각(공상, maññanā)을 통해 '나는 땅이다.'라고 생각하고, '나의 땅이다.'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는 땅이다.'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의 땅이다.'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혹은 내적인 땅을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taṇhā-maññanā)을 통해 생각하고, 자만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māna-maññanā)을 통해 생각하고,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diṭṭhi-maññanā)을 통해 생각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는 머리털, 몸 털 등에서 욕망을 일으키고, 머리털을 즐기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집착한다. 이와 같이 내적인 땅을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미래에 나의 머리털은 이렇게 될 것이고, 나의 몸 털도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거기에 기쁨을 일으킨다. '이 계행과 청정범행으로 나의 머리털은 이렇게 윤기 있고 부드럽고 가늘고 검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얻지 못할 것을 얻기 위해 갈망한다. 이와 같이 내적인 땅을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머리털 등에 대해 원하는 바를 성취한 것과 성취하지 못한 것을 두고 '내가 뛰어나다거나 혹은 동등하다거나 혹은 저열하다.'라고 자만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내적인 땅을 자만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영혼(수자, 생명, jīva)이 바로 몸이다."라고 전해 내려오는 방법에 따라 머리털이 영혼이라고 천착한다. 이 방법은 몸 털 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내적인 땅을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혹은 "내적인 땅의 요소이든 외적인 땅의 요소이든 그것은 단지 땅의 요소일 뿐입니다. 이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 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 보아 땅의 요소를 염오하고 마음이 땅의 요소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합니다."라는 가르침과는 반대로 머리털 등으로 분류되는 이 땅은 내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천착한다. 이와 같이 내적인 땅을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이처럼 내적인 땅을 세 가지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외적인 땅에 대해서도 세 가지 허황된 생각을 통해 생각한다."(MA.i.26~27)

...혹은 "어떻게 물질에서 자아라고 여기는가? 여기 어떤 이는 느낌을... 인식을... 심리현상들을... 알음알이를 자아라고 여긴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 이 나의 자아는 이 물질에 있다.'라고 이와 같이 물질에서 자아라고 여긴다."... 그 방법대로 느낌 등의 법들을 자아라고 거머쥐고 내적인 땅과 외적인 땅 가운데 어떤 땅을 자기의 장소라고 상상하면서 '이 나의 자아는 땅에 있다.'라고 땅에서 생각한다. 이것은 그의 사견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diṭṭhi-maññanā)이다. 그러면 그 자아에 대해 애정(sineha)과 자만(māna)도 일어나기 때문에 갈애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과 자만에 기인한 허황된 생각도 [일어난다고] 알아야 한다."(MA.i.27~28)

...즉 범부는 ① 땅과 자신을 같은 것으로 동일시하고 ② 땅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고 ③ 땅과 자신은 다르거나 자신을 땅에서부터 생겨난 것으로 여기고 ④ 땅을 자신의 소유물이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범부는 이렇게 모든 대상에 대해서 허황되고 전도되고 잘못된 생각(공상, maññanā)을 가진다고 부처님께서는 설파하고 계신다...


(M35 §21의 주해)

"'괴로움에 들러붙는다'는 등은 이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의 괴로움(pañca-kkhandha-dukkha)에 갈애와 사견에 의해 들러붙는다는 말이다."(MA.ii.279)

"'괴로움은 나의 자아다(dukkhaṃ etaṃ mama)'라는 등을 본다는 말은 다섯 가지 무더기의 괴로움을 갈애와 자만과 사견으로써 본다는 말이다."(MA.ii.279)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악기웻사나여. 비록 그와 같다 하더라도 그대는 괴로움에 들러붙고 괴로움에 의지하고 괴로움을 고수하여 괴로움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보고 있지 않은가?"...

 

출세간 법 9가지(네 가지 도, 네 가지 과, 열반)를 제외한 삼계의 모든 형성된 법들은 모두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가 될 수 있다.

존재 더미 모두가 취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형성된 법들은 갈애, 자만, 사견, 무명으로 생겨난 것이다.

거머쥐려 하기 때문에 형성하는 것이고, 철저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형성하는 것이다.

 

철저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갈애와 자만과 사견의 세 가지 허황된 생각(공상, maññanā)을 통해서 생각한다.

세 가지 허황된 생각(공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법들, 즉 오취온의 뿌리가 된다.

 

오취온을 대상으로 욕망을 일으키고, 즐기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집착하여 갈애로써 허황되게 취착한다.

오취온을 대상으로 내가 뛰어나다, 동등하다, 저열하다라고 자만으로써 허황되게 취착한다.

오취온을 대상으로 이것이 나의 영혼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사견으로써 허황되게 취착한다.

 

이렇게 안의 대상, 밖의 대상에게 똑같이 취착한다.

반대는 무엇인가?

 

내적인 대상과 외적인 대상 모두가 단지 요소임을 안다.

이것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통찰지로 본다.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 볼 때 대상인 요소를 염오하고 마음이 대상인 요소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한다.

 

범부는 존재 더미 뿐 아니라 오온의 구성요소에 대해서도 취착한다.

물질에 대해서도, 느낌과 인식, 심리현상들과 알음알이 각각에 대해서도 자아라고 여길 수 있다.

 

이 물질이 나의 것이고 나의 자아이며, 이 느낌이 내 것이라고 거머쥔다.

몸에 대한 집착이 강한 자라면 이 몸이 나의 자아이고, 그것을 애정하고, 그것을 비교하며 자만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범부는 모든 대상에 대해 취착하고 들러붙는다.

 

사성제의 진리는 이렇게 형성된 것들이 괴로움이라고 알려준다.

우리는 '괴로움'에 대해 갈애와 사견과 자만으로 들러붙는다.

 

본질적으로 '괴로움'인 대상을 행복이라 보고 들러붙고, 의지하고, 집착함을 고수한다.

오직 있는 그대로 통찰지로 보는 수행을 통해서만 대상을 염오하고 대상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할 수 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