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실(sacca)'은 최소단위 법인가?
- 진실은 지혜(paññā), 정진(vīriya)처럼 최소단위 법(paramattha-dhamma)은 아니다.
- 다만 삿짜와 연관된 구경법은 있다. 절제(virati)의 마음부수들 3가지와 의도(cetanā)가 그것들이다.
2. 성전 진실(pariyatti-sacca)과 수행 진실(paṭipatti-sacca)
(『대불전경』 2권 pp.432~459 참고)
- '성전 진실'(교학적 진실, 이론적 진실)은 경전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진리들이다. 삼무띠 삿짜(세속적 진실)와 빠라맛타 삿짜(궁극적 진실), 사바와 삿짜(본성적 진실)와 아리야 삿짜(성스러운 진실)가 그 내용들이다. 이 진리들을 통해 우리는 관념과 궁극적 실재, 그리고 사성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이것들을 이해하면 우리는 세상과 윤회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배우게 되는 것인데, 올바르게 배운 자는 그에 따라 인생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배운 것을 어떻게 스스로 실현시켜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 반면 일상에서 실제 '진실 바라밀'을 성취하게 하는 것은 '수행 진실'이다. 수행 진실은 vacī sacca, 즉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피하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수행으로서의 삿짜(sacca)다.
- 이러한 수행 진실에는 3가지가 있다. '다른 사람을 믿게 만드는 진실한 말', '바라는 결과를 성취하는 진실한 말', '거짓말을 피하는 진실한 말'이 그것들이다.
- 첫 번째는 맹세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맹세하는 자는 진실한 말과 함께 이 맹세를 어길 시 치명적인 벌칙을 받게 될 것임을 함께 말함으로써 청자로 하여금 화자의 맹세를 믿게 만든다.
- 두 번째는 선언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선언하는 자는 그 자신의 거짓 없는 진실을 말한 뒤, 그 진실한 말의 힘으로 바라는 결과를 실현시킨다.
- 세 번째는 '어떤 경우에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나에게 불행한 결과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상되더라도 거짓을 말하지도, 침묵하지도 않고 진실만을 말한다. 진실을 수행하는 자는 앞의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한 모든 경우에서 이 세 번째 진실의 언어에 의존하게 된다.
- 다른 바라밀과 비교하여 진실 바라밀이 지니는 독특한 특징은 진실을 말하는 언어의 힘으로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진실한 말은 그 자체로서 힘을 가진다.
- 따라서 "세상의 모든 맛 가운데서 가장 달콤한 것은 진실의 맛"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진실만한 피난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 모든 보살은 항상 거짓을 피하는 언어를 연마하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세세생생 진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진실 바라밀을 충족했다.
- 여기에 더해 진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려고까지 할 때, 진실 바라밀은 3가지 바라밀 중 최상의 진실 바라밀로 성취된다.
- 특이한 점은, '진실한 말'의 '진실'이라는 바탕이 ① 선한지, ② 불선한지, ③ 무기인지에 상관없이 '진실한 말'은 결과를 가져오는 힘을 가진다는 것이다. 선함을 지녔든 그렇지 않든 그 말의 바탕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 선함에 바탕을 둔 진실한 말은 당연히 바람을 충족시키는 힘을 가진다.
- 메추라기 경에서 닥쳐오는 불길을 피하기 위해 선하지도, 불선하지도 않은 자신의 상황을 사실대로 말하여 바라는 바를 실현시키는 보살처럼, 무기에 바탕을 둔 진실한 말 역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실현시키는 힘을 가진다.
- 아이의 뱀독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부끄러운 사실을 드러내는 디파야나 자타카의 보살의 선언처럼, 불선한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한 말 역시 언어 상의 진실이 되어 바람을 성취하는 힘을 가진다.
- 반대로 선하더라도 진실한 말이 아니라면 언어 상의 진실도 아니고, 힘을 가지지도 못하며, 결과를 낳지도 못한다. 오직 진실한 말만이 힘을 지니고 결과를 낳는다. 더하여 거짓을 피하기 위해, 진실을 준수하기 위해 침묵하는 것 역시 순수한 언어 상의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 침묵하는 것은 단지 거짓을 회피한 것일 뿐이다.
삿짜빠라미의 락카나는 진실을 진실 그대로 되게끔 하는 것입니다. 옳으면 옳은 대로, 틀리면 틀린 대로,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움직이거나 다르게 조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진실 그대로 말하는 것도 삿짜(진실)이지만 잘못을 변명하거나 숨기지 않고 잘못한 그대로를 말하는 것도 삿짜입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68, (사)법승 담마야나(2017)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진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진실을 그대로 정직하게 말해 보세요. "이 진실한 말의 힘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를!" 그 말이 진실이라면 힘이 있을 것입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70~71, (사)법승 담마야나(2017)
3. 삼무띠 삿짜(sammuti-sacca, 세속적 진실)와 빠라맛타 삿짜(paramattha-sacca, 궁극적 진실)
(『대불전경』 2권 pp.414~421 참고)
진실은 2가지로 나뉘며, 이 2가지 모두 진실(sacca)이다.
이 2가지를 제외한 진실이란 없다.
Sammuti의 어원은 saṁ+man 이다.
'함께' + '생각하다'인데, 이러한 이유로 삼무띠는 '합의'를 의미한다.
즉,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정해진 사물의 명칭, 혹은 개념이 삼무띠인 것이다.
따라서 삼무띠 삿짜는 그 자체로 절대적 진리는 아니며,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위해 통용되는 약속, 관습적 진리, 세속적 진리다.
반면에 궁극적인 진리인 빠라맛타 삿짜(Paramattha-sacca)는 사물을 구성하는 최소단위 법들에 대한 것이다.
모든 정신·물질은 아비담마에 기술된 최소단위 구경법들이 모여서 구성된다.
Paramattha의 어원은 'parama(최고의, 궁극의) + attha(주제, 이익, 목적)'로, 궁극적인 것을 의미한다.
Paramattha-dhamma는 흔히 말하는 구경법(究: 연구할 구, 竟: 다할 경)이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 마음부수, 물질, 열반 4가지 법들을 구경법이라 한다. 궁극적인 것(빠라맛타)은 고유성질(사바와)을 가진다.
이것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궁극의 단위인 법(dhamma)이다. 이것들이 개념적 존재들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다.
이 최소단위 법들은 각각의 고유한 특성(사바와 락카나), 공통된 특성(사만냐 락카나)을 가진다.
이 궁극적인 것(빠라맛타)을 식별하는 것은 지혜(통찰지)로써만 가능하다.
'나', '사람', '나무', '남자', '여자' 같은 용어는 삼무띠에 해당한다. 이들은 현실에서 보이는 개념이다.
이것들을 해체해서 보면 궁극적으로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 궁극적 진실, 빠라맛타 삿짜다.
이러한 용어, 개념들이 나타나는 대상은 그 자체로 분해하거나 해체할 수 있다. 아비담마의 표현으로는 이들은 고유성질(sabhāva)을 가진 것이 아니다.
고유성질을 가진 여러 궁극적인 것(빠라맛타)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들이 '남자'와 '여자' 등으로 각각 다른 이름(빤냣띠)으로 불리는 것뿐이다.
삼무띠 삿짜는 인식(saññā)의 대상이다. 사물의 '모양'에 따라 사물을 인식하는 표상(表: 겉 표, 象: 모양 상) 작용이다.
빠라맛타 삿짜는 지혜(paññā)의 대상이다. 최소단위 법에 모양이란 없다. 지혜는 대상의 성질을 통찰한다.
이것은 마치 과학에서의 현실 세계와 미시 세계의 대비와도 같다.
현실 세계의 원자, 분자 단위 이상의 물체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모양'을 가진다.
미시 세계의 소립자들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양'이 없다. 그것들은 '특성'을 통해 그 존재가 파악된다.
- 소립자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물체처럼 구체적이거나 일정한 모양을 가지지 않는다. 입자들은 고전적인 의미에서 '모양'이 없다고 볼 수 있다.
- 소립자들은 물리적 크기나 형태보다는 그들의 에너지, 운동량, 상호작용 특성으로 정의되며, '모양'이라는 개념은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마치 빠라맛타가 고유한 성질과 공통된 성질을 가질 뿐 특정한 형태를 가지지 않는 것과 같다.
- 현대 과학에서 입자들은 고전적으로 ‘본다’기보다는 에너지, 운동량, 상호작용 같은 특성을 통해 그 존재가 '파악된다'. 빠라맛타는 집중된 마음과 빤냐의 기능에 의해서 그 실재와 특성이 '드러난다'.
- 따라서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이 '진실'의 세계는 명칭이나 개념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집중과 마음의 통찰을 통해 직관적으로 이해되고 경험되는 실재라고 볼 수 있다. 빠라맛타는 수행을 통해 그 본성이 마음에 드러나게 된다.
- 참고로 사마타 수행에서 자주 언급되는 니밋따(nimitta)는 특정한 명상을 수행할 때 나타나는 특정한 상(모양 또는 징후)을 의미하는데, 이는 집중 상태에서 마음이 형성해내는 시각적 혹은 정신적 이미지로 볼 수 있다. 니밋따는 개념적이고 형상화된 요소로 빤냣띠에 속한다.
따라서 '인식으로 보는 자'는 궁극적 실재를 볼 수 없고, '지혜로써 보는 자'는 세속적 진리를 볼 수 없다.
지혜를 통해 보는 것은 너무나도 미세하여 모양이 사라진다.
표상 작용으로 볼 때는 '없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볼 수 없다.
표상 작용으로 구체적인 형상의 나타남을 본다면 그것은 빠라맛타가 아니라 빤냣띠(paññatti)다.
표상 작용은 모양, 형상, 실물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혜는 모양과 형상을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혜는 사물을 분해하고 해체하여 빠라맛타와 그 성질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한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도 진실이고,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진실이다.
전자는 세속적인 삼무띠 삿짜, 후자는 궁극적인 빠라맛타 삿짜이다.
만일 궁극적인 용어로만 사물들을 설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 고, 무아라고 말해야 한다.
'나, 그, 남자, 여자'와 같은 것이 실존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따라서 궁극적인 의미에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정신적 자질을 구비한 자는 위빳사나 명상을 연마하여 열반으로 나아간다.
이런 궁극적인 것은 정신·물질적인 현상의 구체적 본질로서 존재하지만 너무 미세하고 심오해서 훈련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이것들을 인식할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은 대부분 개념(paññatti)들로 뒤덮여 있어서 궁극적인 것을 보지 못한다. 대상을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yoniso manasikāra)으로써 인간은 개념을 넘어서 보게 되고 궁극적인 것을 앎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궁극적인 것은 최상의 지혜(uttama ñāṇa)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1』 pp.107~108, 초기불전연구원(2017)
4. 2가지 빠라맛타 삿짜 - 사바와 삿짜(sabhāva-sacca), 아리야 삿짜(Ariya-sacca)
(『대불전경』 2권 pp.421~432 참고)
궁극적 진실(빠라맛타 삿짜)은 본성적 진실(사바와 삿짜, 자성제)과 성스러운 진실(아리야 삿짜, 성제)로 다시 한번 나뉜다.
궁극적인 것에는 육체적 즐거움인 sukha, 정신적 즐거움인 somanassa가 분명히 존재한다.
바라는 감각대상에 접촉하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 바라는 심적대상에 접촉하면 정신적인 즐거움을 느낀다.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Sukha와 somanassa는 느낌(vedanā)의 5가지 고유성질(본성) 분류 내에 포함된다. 그리고 vedanā는 모든 마음에 반드시 함께한다.
모든 궁극적인 것들에는 즐거운 것, 괴로운 것,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궁극적인 것들에 대한 성스러운 진실, ariya-sacca는 무엇인가?
모든 궁극적인 것들이 본성상 괴로움의 성질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로 성스러운 진실이다.
-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고통스러운 것은 그 자체로 괴로움이다.
-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즐거운 것은 끝내 변하여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원인이 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 행고성(行苦性, saṅkhāra-dukkhatā): 생멸의 현상에 지배받을 뿐인 형성된 오온을 '나', '내 것', '나의 자아'로 취착하므로(오취온) 괴로움이다.
Dukkhatā는 'dukkha + -tā'로 괴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이를 나타내는 苦性은 괴로운 성품, 괴로운 성질을 의미한다.
고통은 그 자체로 괴로움이고, 즐거운 것은 무너지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형성된 것은 실체를 가진 것으로 착각하게 하여 윤회에 결박되게 만들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이 괴로움의 진실, 괴로움의 진리를 좀 더 부연설명 해보자.
- 이 즐거운 느낌들은 영구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며, 지속적인 변화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이 쾌락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다.
- 지성은 적고 갈망은 큰 무지한 사람들은 쾌락이 무너지고 퇴화하기 전까지 그 쾌락을 즐길 만하고 기뻐할 만한 것으로 본다.
- 그러나 변하는 것은 쾌락의 본성이다. 결국 변화가 일어나면 그들은 이전에 기뻐했던 것보다 훨씬 더 슬퍼하게 된다.
- 형성된 모든 것들은 즐거움과 슬픔의 양면을 가진다. 범부는 감각적 쾌락을 즐길 만한 것으로 본다. 부처님은 그것들에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은 훨씬 더 많다고 설하신다. 부처님의 제자는 감각적 쾌락을 즐길 만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 지혜와 복덕을 갖춘 자는 어떤 대상에 직면했을 때 그것에 결점이 있는지 먼저 살핀다. 즐거움이 있는지, 괴로움이 있는지를 먼저 살피지 않는다. 결점이 있다면 그것에 즐거움이 있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이 바랄 만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결점이 없다면, 비록 감각적 즐거움이 없더라도 바랄 만한 것으로 간주한다.
-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멸할 수밖에 없음을 보는 성자들은 일시적인 쾌락을 붙잡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사라지기 전까지만 누릴 만한 것으로 존재할 뿐이다. 오로지 다음과 같이 성찰할 때 성자가 될 수 있다. "세상에 즐거움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이란 없고 슬픔뿐이다."
-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본성상 괴로움임을 성찰하여 통찰할 때에만 성자가 될 수 있다. 그러한 명상의 대상이 되는 현상들의 집합체(=유위법, 정신·물질)를 성스러운 진리라고 부른다. 성자들은 세속적인 현상들의 집합체를 있는 그대로 보며, 그것을 일러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현실에서 덧없음을 느낄 때 "해탈한다"라고 표현하며, 이때 실제로 대상에 대한 욕망이 빛바랜다.
마찬가지로 수행에서 정신-물질 현상들의 끊임없는 소멸을 관찰하며 덧없음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아리야 삿짜를 직접 경험하며 해탈하여 성자가 된다.
사바와 삿짜에 천착하여 육체적, 정신적 즐거움이 존재한다는 견해에 집착하면 세속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성자의 경지를 획득할 수 없다.
성자가 되고 싶다면 육체적, 정신적 즐거움조차 모두 괴로움이라고 볼 줄 알아야 한다.
간략히 말해 오온과 삼계의 존재들은 모두 괴로움이다. 괴로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존재 자체가 괴로움임에 사무치지 못하는 자들은 결코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가 없다.
삼계를 윤회하는 동안 즐길 만한 것이란 없으며 오직 괴로움뿐이라는 통찰력은 정견에 입각한 것이다.
이런 정견은 성자의 경지를 획득하고자 노력하는 자들이나 이미 그것을 획득한 자들이 지니고 있다.
이것이 진리이며, 그러므로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 즉 고성제라고 한다.
성스러운 진실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실(dukkha-ariya-sacca, 고성제) 외에 3가지가 더 있다.
- 괴로움이 있다면,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실'이다.
- Dukkha-samudaya-ariya-sacca, 고집성제, 집성제, 집제(集: 모을 집), samudaya-sacca
- Samudaya: "함께 일어남", "발생함" / saṁ: "함께", "합쳐서", "전체적으로" / udaya: "일어나다", "출현하다", "생겨나다"
- 5취온은 스스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각 대상들에 대한 갈애로 인해 발생한다.
- 삼계의 모든 존재들은 괴로움에 종속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갈애에 의한 것이다.
- 우리가 행복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은 괴로움이며, 이 고통은 갈애에서 야기된다.
- 갈애가 바로 고집성제이다. 갈애야말로 내생의 고통, 오취온의 근원이다. 갈애야말로 고통을 형성하는 근본 원인이다.
- 인간은 생존을 위해 매일 수고해야 한다. 더 나은 삶을 갈망하면 괴로움은 더 커져만 간다. 최소한의 필수품으로 단순한 인생을 사는 것에 만족한다면 우리의 불행은 단순한 삶에 맞추어서 완화될 것이다.
- 더 나아가 다음 생에 더 나은 것을 바라는 것의 결과로 재생하였을 때, 이 재생의 원인조차 그러한 행위를 야기한 갈애임을 발견할 수 있다.
-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이 없는 상태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실'이다.
- Dukkha-nirodha-ariya-sacca, 고멸성제, 멸성제, 멸제, nirodha-sacca, 무위계, asaṅkhata-dhātu, 무연법, appaccaya-dhamma, 무위법, 상주법
- 갈애는 여러 세속적 감각 대상에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열반에 들러붙을 수는 없다. 느낌이라는 감각 작용이 빠진 열반은 갈애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연기법에 따르면 갈애는 느낌에서 발생한다(vedanā paccayā taṇhā). 갈애의 근원은 느낌이다. 그러나 열반은 느낌과 전혀 관계가 없다. 열반은 감각의 즐거움이 아니다. 감각 작용이 완전히 빠져 있다.
- 열반의 즐거움은 적멸락(santi-sukha / santi: '평화', '고요함', '안정')이다.
- 2가지 즐거움이 있다. 느낌에서 비롯되는 즐거움(vedayita sukha), 고요함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다.
- 갈애를 지닌 자는 갈애를 자극하는 느낌이야말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지혜로운 자는 느낌을 자극하는 대상(e.g. 음식)과 관련된 어떤 수고로운 일도 하지 않은 채 평화롭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 똑같은 방식으로 갈애는 적멸락을 바라지도, 욕구하지도, 높게 평가하지도 않는다. 산띠 수카는 느낌이 사라진 진정한 평화이기 때문이다.
- 지혜가 없는 범부들은 괴로움의 진리인 5온을 즐거움으로 본다. 지혜 있는 범부나 성자들은 5온이, 고통이 멸진(소멸)하는 것을 보며 즐거움으로 여긴다. 마치 자신을 곤혹스럽게 하던 고통이 멈추었을 때 고통이 사라졌다고 하며 기뻐하는 것과 같다.
- 네 가지 도의 지혜에 의해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는 무위계(asaṅkhata-dhātu)인 열반을 깨닫게 될 때 모든 번뇌들은 완전히 제거되고 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생에서건 아라한도를 얻으면 사후에 5온의 형태로 된 고통이 단 한 번에 모두 멈춘다.
- 열반은 도와 과의 대상이 되는 궁극적인 실체다. 반열반은 5온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 최후의 삶에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완전히 소멸한다는 뜻이다. 열반의 조건이 되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고통과 슬픔의 소멸을 위해 기도한다는 뜻이다. 고통과 슬픔의 소멸이란, 이번 생에 더 이상 윤회하는 업을 짓지 않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아 정신·물질을 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
- 열반의 고요함은 지혜로써 갈애를 극복한 후에 그것을 곰곰이 생각할 때 비로소 열망의 대상이 된다. 갈애가 사유의 압도적 요소로 존재하고, 지혜로써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자라면 열반의 고요함이야말로 추구할 만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있다면, 그 원인 역시 있을 것이다. 그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실'이다.
- 열반은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고, 항상 있는 법이다. 우 실라 사야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항상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그러나 그것을 스스로 알고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각할 수 있게 하는 충분한 원인이 필요하다. 그 원인은 오직 한 가지, '성스러운 수행'이다.
- Dukkha-nirodha-gāminī-paṭipadā, 괴로움의 소멸로 향해 가는 수행,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길, 도성제, 도에 대한 성스러운 진실,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로 이끄는 길
-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실은 2가지로 정리된다. 중도와 팔정도가 그것이다.
- 중도(majjhima-paṭipadā)
-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탐닉'인 까마수칼리까누요가(Kāma-sukha-allika-anuyoga)다. 이것은 천한 행위로 불린다.
- Kāma: "감각적 욕망", "육체적 쾌락"
Sukha: "행복", "육체적 즐거움"
Allika: "달라붙음"
Anuyoga: "몰두하다", "헌신하다", "전념하다" - 까마수칼리까누요가는 요즘 말하는 뇌의 보상 시스템과 도파민 내성 현상과도 비슷하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소금물을 먹는 것과 같다. 자극적인 경험을 반복할수록 뇌는 점점 더 많은 도파민을 필요로 하게 되고, 더 큰 자극을 찾아 나선다. 처음에는 큰 만족감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쾌락에 익숙해지고, 같은 수준의 자극에서 더 이상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더 큰 자극이나 새로운 경험을 찾게 된다.
- 갈애는 마실수록 목마르다. 감각적 쾌락에 만족이란 없다. 자극과 보상은 더 많은 자극과 보상을 원하게 만든다.
- 이렇게 감각적 쾌락에 탐닉할 때 일상적인 활동에서 느끼는 쾌감은 줄어들고, 심하면 일상에서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하물며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변할 때(=괴고성)에는 더욱더 괴로움을 느낄 것이다.
- 감각적 쾌락에 중독되어 있는 마음이 온전히 마음 집중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러한 마음 상태는 마음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다. 따라서 쾌락을 탐닉하는 길은 성스러운 진실을 알 수 있는 원인을 지을 수 없는 길이다.
- Kāma: "감각적 욕망", "육체적 쾌락"
- 반대로 종교의 영역에서는 흔히 '자기 학대적 고행'을 깨달음을 얻기 위한 구도자적 행위로 인식하는 경우가 잦다. 이는 아따낄라마타누요가(Atta-kilamatha-anuyoga)에 해당된다. 이것 역시 천한 행위로 불린다.
- Atta: "자신", "자아"
Kilamatha (낄라마타): "피로", "고행"
Anuyoga (아누요가): "몰두함", "열중함" - 우리는 명상을 통해 정신-물질 법을 구별해내고, 인과를 보고, 법의 소멸을 보면서 탐욕을 빛바래고 열반을 직접 볼 수 있게 된다. 청정한 마음집중이 없다면 고성제를 통찰하는 이 모든 과정은 일어날 수 없다. 즉, 명상을 통해서만 우리는 해탈·열반할 수 있다.
- 그렇다면 마음이 제 역할을 하게 하는 명상의 조건이 무엇인가? 몸과 마음의 편안함이다.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삼매의 가까운 원인은 무엇인가? 행복이다. 마음과 육체가 모두 고요해야지만 삼매를 성취할 수 있다. 삼매를 성취해야 사물, 현상, 법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여실지견을 행할 수 있다.
- 자기 학대적 고행은 이와는 반대로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한다. 즉, 정작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인 명상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고, 지적 게으름에 불과한 '종교적 의식' 등에 마음이 가도록 만들 수 있다.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 엄숙주의로 인한 맹목적 자기 학대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 본질을 이해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할 일'을 해야 한다. 성적을 올리려는 학생은 '공부 잘하는 법'을 찾아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교과목을 공부해야 한다. 성과를 내려는 직장인은 단순히 근무시간을 채우는 게 아니라 그 시간에 실제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행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진리를 배우고(교학), 명상을 실천(수행)해야 한다.
- 필자는 고행을 열 가지 족쇄 중 하나인 계금취(sīlabbata-parāmāsa)와 같다고 여긴다. 잘못된 계율이나 종교적 의식에 대한 집착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수행자가 실제 치열한 수행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금욕적인 규칙을 지키는 것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시도다.
- 특정한 제사나 종교적 의례를 수행하는 낮은 경지의 마음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 수행의 진정한 목표는 괴로움의 본질과 그 소멸을 보고 해탈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계금취는 이것을 비본질적인 외적인 형식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특정한 금식이나 고행, 혹은 특정 의식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룰 순 없다. 신성한 강에서 목욕을 하면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외부적이고 인위적인 행위에 구원을 기대하는 신앙이다.
- 이 족쇄를 끊어낸 수다원 성자는 계율을 단순히 지키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의 본질을 이해한다. 즉,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치열한 자기 수행을 통한 마음의 변화와 내적 성장이 필요하며, 단순한 의식이나 형식적인 규범 준수만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음을 안다.
- Atta: "자신", "자아"
- 중도는 '쾌락의 추구'나 '자기 학대'가 아닌, 너무 편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고요한 마음 집중의 상태로 해야 할 일(명상)을 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의미한다.
-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탐닉'인 까마수칼리까누요가(Kāma-sukha-allika-anuyoga)다. 이것은 천한 행위로 불린다.
- 팔정도(Aṭṭhaṅgika magga)
- 그렇다면 까마수칼리까누요가, 아따낄라마타누요가 둘 중 어느 하나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행하여 올바른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팔정도(Aṭṭhaṅgika magga)다.
- Aṭṭha: "여덟"
Aṅga: "구성 요소", "부분", "팔다리", "가지"
Magga: "길", "도" - 팔정도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무엇이 양 극단에 매몰되지 않는 중도인지 알려면 먼저 사성제에 대한 정견을 지녀야만 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 그리고 생계 활동을 올바르게 실천한다. 더하여 바른 노력을 다하고 수행의 영역을 잘 마음챙겨 마음집중을 이룬다. 그 결과 여실지견을 할 수 있게 되고 열반 대상을 알고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팔정도는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실천적 길, 실천적 방법론이 된다.
- 팔정도를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이렇다.
- 정견: 사성제(고성제, 고집성제, 고멸성제, 도성제)에 대한 앎이 정견이다. 성스러운 진실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춘다.
- 정사유: 출리에 대한 사유(감각적 대상 및 그에 대한 애욕을 생각하지 않음),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치지 않음에 대한 사유 3가지가 정사유다.
- 정어: 거짓말, 이간하는 말, 거친 말, 말에 이익과 핵심이 없는 잡담의 4가지 악한 언어를 금한다. 올바른 말씨로 타인을 해치지 않는 말을 한다.
- 정업: 살생, 도둑질, 부정한 성적 행위의 3가지 악한 행위를 금한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한다.
- 정명: 앞서 언급한 악한 행위 3가지, 악한 언어 4가지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금한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게 생계를 유지한다. 타인을 해치고 괴롭게 하는 무기매매, 인간과 가축 매매, 술이나 독이나 마약 매매 역시 악한 생계다.
- 정정진: 악이 일어나지 않도록, 일어난 악을 제거하도록, 선이 일어나도록, 일어난 선을 증대시키도록 하는 4가지 노력이 바른 노력이다.
- 정념: 몸, 느낌, 마음, 법(현상)의 4념처가 바른 마음챙김이다.
- 정정: 4가지 선정이 바른 삼매다.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고요함과 명료함을 얻는다.
- 수행자는 팔정도를 통해 해탈과 깨달음, 괴로움의 멸진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인 길을 걸을 수 있다. 팔정도는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윤리적, 정신적 훈련 방식을 제시한다. 바른 견해와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올바른 행위, 노력, 집중을 통해 마음의 평온과 궁극적인 해탈을 추구할 수 있다.
- 중도(majjhima-paṭipad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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