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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아비담마

주의(mānasikara)와 일으킨 생각(vitakka), 지속적 고찰(vicāra), 의도(cetanā)는 어떻게 다를까? (2)

by Rihan 202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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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는 cetanā(의도, 의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Cetanā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마음이 대상을 알 때, cetanā는 그 자신은 물론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들이 대상에 대해서 작용하도록 조정하고 지시한다.
  2.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에서 cetanā는 함께 일어나는 다른 담마들이 역할을 성취하도록 노력하고 자극한다. (= 의지)
  3. 과보의 마음, 작용만 하는 마음에서 cetanā는 노력하지 않는다. 단지 다른 마음부수들을 조정하기만 한다. (= 의도)

따라서 우 실라 사야도께서는 cetanā에 대해서 "방향을 잡고, 대상을 잡으며, 앞으로 가기 위한 노력도 한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1. 주의(manasikāra)에 대해서

 

이제 주의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 실라 사야도께선 주의(mānasikara)에 대해 "마나시까라 역시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주의'는 빠알리어로는 manasikāra이고, 영어로는 attention으로 번역한다.

'마음에 잡도리함', '주의', '마음기울임' 등으로 번역한다.

(7)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

...manasikāra는 manasi-karoti에서 파생된 명사이며 산스끄리뜨 manas(마음)의 처소격에 √kṛ(to do)를 붙여서 '마음에 만든다, 마음에 둔다, 마음에 새긴다'는 뜻이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그 초보적인 의미이며 영어로는 attention으로 옮기고 있다. 역자들은 manasi(마음에) kāra(만듦)라는 원래 의미를 존중하여 마음에 잡도리함으로 직역하였다. 한편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으로 번역되는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지혜로운 주의)는 초기불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는, 불교에만 나타나는 전문용어이다.

마음에 잡도리함(주의)에 의해서 대상은 마음에 나타나게 된다. 마음에 잡도리함은 목적지로 향하게 하는 배의 키(방향타)와 같고, 잘 훈련된 말들(함께하는 마음부수들)을 그들의 목적지(대상)로 보내는 마부와 같다. 마음에 잡도리함은 일으킨 생각(vitakka)과 다르다. 마음에 잡도리함은 마음부수를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인 반면 일으킨 생각은 그들을 '대상에 적용시키는 성질을 가진 것'이다.(VṬ.106) 마음에 잡도리함은 모든 마음에 다 일어나는 없어서는 안 되는 마음부수(반드시들)이지만 일으킨 생각은 더 전문화된 마음부수(때때로들)이다.

[청정도론 XIV]: "152. 행위를 함(kiriyā)이 지음(kāra)이고, 마음에(manasi) 지음(kara)이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이다. 이전의 마음과는 다른 마음을 만들기 때문에 마음에 잡도리함이라 한다. ① 대상에 대한 제어, ② 인식과정에 대한 제어, ③ 속행(javana)에 대한 제어 - 이 세 가지 측면에서 그렇게 한다.

그 중에서 ① 대상에 대한 제어란 마음에 짓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잡도리함이다. 이것은 관련된 법들을 대상으로 내모는 특징을 가진다. 관련된 법들을 대상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대상과 대면함으로 나타난다. 대상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스스로 심리현상들의 무더기(행온)에 속해 있으면서 대상을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련된 법들의 조어자(필자 주 - 잘 이끌고 제어하는 사람)라고 알아야 한다.

그런데 ② 인식과정에 대한 제어란 오문전향의 동의어이다. ③ 속행에 대한 제어란 의문전향의 동의어이다. 이 둘은 여기(필자 주 - 행온, 마음부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233~234, 초기불전연구원(2017)

 

 

마나시까라에 대해서 주목할 것은 3가지다.

  1. 마나시까라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2. '마나시까라'는 ① 마나시까라 마음부수(행온), ② 오문전향의 마음(식온), ③ 의문전향의 마음(식온)을 칭한다.
  3. '요니소 마나시까라'는 지혜와 결합한 속행이 일어날 때 ① 오문전향의 마음, ② 의문전향의 마음을 의미한다.

 

이 3가지에 초점을 맞춰 마나시까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2. "마나시까라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에 대해서

 

3가지 중 1번은 마음부수로서의 마나시까라의 정의이다.

 

마나시까라는 마음부수들을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cetanā(의도, 의지)의 역할과 비슷하다.

 

그러나 마나시까라는 쩨따나(의지)처럼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들이 역할을 성취하도록 자극하지는 않는다.

마나시까라는 단순히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함께 일어난 마음부수들을 대상으로 내몰고 연결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7. Manasikāra 주의기울임
Attention

주의기울임을 마나시까라manasikāra⁸⁸라고 한다. 그 기능은 무언가를 마음속에 불러들이는 것이다... 주의기울임의 세심한 힘 때문에 이런저런 대상이 끊임없이 마음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⁸⁸ ...영어로는 attention, mental advertence 등이라 한다...

...감각을 느낄 때는 느낌의 마음부수vedanā-cetasika가 두드러지며, 무언가를 기억할 때에는 인식의 마음부수saññā-cetasika가 두드러진다. 유익한 행이나 해로운 행을 할 때는 의도cetanā가 두드러진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는 집중ekaggatā이 두드러진다. 나머지 세 가지 마음부수인 감각접촉phassa, 생명기능jīvitindriya, 주의기울임manasikāra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p.134~135, 법보시자 위데히(2023)

 

 

대상과 연결시키는 역할만을 주로 하는 마나시까라 마음부수는 쩨따나와 달리 인식과정에서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는 듯하다.

 

 

3. "'마나시까라'는 ① 마나시까라 마음부수(행온), ② 오문전향의 마음(식온), ③ 의문전향의 마음(식온)을 칭한다."에 대해서

 

위에서 인용한 청정도론에서는 마나시까라에 대해 세 가지 측면을 말한다.

① 대상에 대한 제어, ② 인식과정에 대한 제어, ③ 속행(javana)에 대한 제어 - 이 세 가지가 그것이다.

 

여기서 ① 대상에 대한 제어는 심리현상들의 무더기(행온)에 속해 있다. 즉, 마음부수이다.

② 인식과정에 대한 제어는 오문전향의 동의어다. 즉, 알음알이의 무더기(식온)이다.

③ 속행에 대한 제어는 의문전향의 동의어다. 이것 역시 알음알이의 무더기(식온)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① ārammaṇa paṭipādaka manasikāra 대상을 일으키는 마음기울임 (= manasikāra 마음부수)

② vīthi paṭipādaka manasikāra 인식과정을 일으키는 마음기울임 (= 오문전향 마음)

③ javana paṭipādaka manasikāra 속행을 일으키는 마음기울임 (= 의문전향 마음)

 

따라서 ②, ③은 심소법이 아니다. 심법이다.

 

즉, 우리는 청정도론의 해당 부분에서 '마나시까라'라는 용어가

 

① 같은 명칭의 마음부수(『아비담마 길라잡이』 7번 마음부수)를 칭할 때도 있고,

② '마나시까라'라는 용어를 빌려 오문전향의 마음(『아비담마 길라잡이』 28번 마음)이나

③ 의문전향의 마음(『아비담마 길라잡이』 29번 마음)을 칭할 때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

마음에 잡도리한다는 뜻인 '주의(manasikāra, 마나시까라)'는 모든 마음과 함께하는 공통된 마음부수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문전향의 마음도 마나시까라입니다. 이 마음은 오문인식과정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마음으로 대상으로 전향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문인식과정의 통제자'라고 하지요.

다른 마나시까라는 의문인식과정에서 대상으로 전향하는 의문전향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의 뒤를 이어 속행(자와나)의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것을 '속행의 통제자'라고 합니다.

...'주의'로 번역하는 마나시까라는 '대상에 대한 통제자' 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대상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관습적으로 '산만'하다고 할 때에는 주의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의'는 모든 마음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산만한 들뜸의 순간에도 있습니다. 들뜸과 함께하는 탐욕에 뿌리한 마음이 일어날 때에도 마음은 대상을 인지하고, 주의(마나시까라)는 마음 그리고 함께 하는 다른 마음부수들을 '묶어서' 대상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모든 마음들이 대상을 알려면 이 마나시까라가 필요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마음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나시까라도 있어야 합니다. 마나시까라는 마음이 대상을 경험할 수 있게 부딪치게 만드는 감각접촉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집중이라는 마음부수와도 다릅니다. 마나시까라는 자신의 일은 물론 마음이 대상을 인지하도록 지원하는 역할도 합니다.

마나시까라는 육문 가운데 하나를 통해서 나타난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그 대상에 주목하고 마음과 동반하는 마음부수들을 '묶어서' 대상으로 전송합니다...

안식이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는 반드시들은 자신들만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안식과 함께하는 감각접촉은 형상을 접촉하는 눈의 접촉입니다. 눈의 접촉이 일어난다는 것은 눈의 토대, 형상이라는 대상과 안식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의 느낌은 형상이라는 대상의 '맛'을 경험하는 무덤덤한 느낌입니다. 인식은 형상이라는 대상에 '표시'를 하고 기억을 합니다. 의도는 함께하는 담마들의 과제들을 조정합니다. 안식은 과보의 마음이므로 여기서의 '의도'는 조정만 합니다. 즉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를 하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집중은 형상이라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지 다른 대상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생명기능은 마음과 함께하는 마음부수들이 사라질 때까지 생명을 유지시켜 줍니다. 주의는 마음과 함께하는 마음부수들을 대상으로 전송합니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pp.115~120,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4. "'요니소 마나시까라'는 지혜와 결합한 속행이 일어날 때 ① 오문전향의 마음, ② 의문전향의 마음을 의미한다."에 대해서

 

우리는 초기불교를 공부하면서 요니소 마나시까라를 자주 듣는다.

그런데 이 요니소 마나시까라는 정확히 무엇인가?

 

요니소 마나시까라는 지혜와 결합한 속행이 일어나도록 올바르게 마음기울이는 전향 마음을 의미한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주석서와 복주서에서는 통찰지가 결합한 속행 앞에서 일어나는 오문전향 마음과 의문전향 마음을 '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전향 마음이 지혜와 결합한 속행의 생겨남을 위해 바른 방법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기에 그 속행들과 비슷하고, 때문에 똑같이 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부르는 것이다.
  2. 인식과정의 흐름으로 확장하여 본다면, 이후의 인식과정에서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일어나도록 하는 조건이 되는 이전 인식과정의 전향 마음과 속행 마음 역시 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부른다. 즉, 법의 고유성품 혹은 무상·고·무아의 공통된 특성을 사실대로 바르게 아는 지혜와 결합한 속행 마음 역시 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볼 수 있다.
  3. 그렇다면 지혜와 결합하지 않은 유익하거나 작용만 하는 마음은 요니소 마나시까라인가, 아요니소 마나시까라인가? 선업이 생겨나도록 올바르게 마음기울이는 모든 것이 요니소 마나시까라이다. 지혜와 결합하지 않았더라도 선법을 성취하게 하는 이러한 8가지 마음 역시 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업이 생겨나도록 하는 속행 마음, 전향 마음 모두가 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요니소 마나시까라는 지혜가 일어나도록(yoniso) 마음기울이는 전향 마음(manasikāra)을 의미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인지하고, 아래 마하시 사야도의 설명을 살펴보자.

올바른 마음기울임

선업이 생겨나도록 올바르게 마음기울이는 모든 것이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제1장에서 감각기능단속을 설명할 때 설명했다. 여기에서는 위빳사나와 관련된 올바른 마음기울임을 설명하겠다.

생겨나고 있는 물질과 정신을 고유특성(sabhāvalakkhaṇā) 등을 통해서, 또는 생겨남과 사라짐, 무상의 특성(aniccālakkhaṇā) 등을 통해서 마음기울이고, 관찰하고, 아는 것을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한다. 직접관찰 위빳사나가 성숙되었을 때 직접 알 수 없는 물질과 정신들을, [직접] 알 수 있는 물질과 정신들로부터 유추해서 관찰하고, 반조하고, 결정하는 것도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다. '나중에 특별한 위빳사나 지혜들과 도와 과라고 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바른 방법, 바른 길이 되는 마음기울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Yonisomanasikāro nāma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하는 것은 upāyamanasikāro바랄 만한 번영을 얻게 하는 바른 이유, 바른 방법으로 마음기울임, pathamanasikāro바른 길로서의 마음기울임이다. Anicce항상하지 않은 법들에 대해 aniccanti vā항상하지 않다고, dukkhe괴로움인 법에 대해 dukkhanti vā괴로움이라고, anattani자아가 아닌 법에 대해 anattāti vā자아가 아니라고, asubhe더러운 법에 대해 asubhanti vā더럽다고 manasikāro마음기울이는 것이다.

특별한 위빳사나 지혜들, 도와 과가 위빳사나를 관찰하는 수행자들이 원할 만한 진짜 번영이고 행복이다. 그것들을 생겨나게 할 수 있는 관찰, 새김, 마음기울임을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한다... '무상 등으로 마음기울임'이라는 구절에 의해서 '특성 등으로 마음기울이는 것'도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빳사나를 관찰하는 이는 사실대로 바르고 분명한 물질과 정신들만을 알고 보려 한다. 개인, 중생, 나, 여자, 남자 등을 보려 하지 않는다. 번뇌를 사라지게 하는 생겨남, 소멸함, 무상의 특성 등만을 알고 보려 한다. 번뇌들을 계속 생겨나게 하는 항상함, 행복함, 좋은 것, 주재할 수 있는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 등과 만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이에게는 여섯 문에서 여섯 대상이 드러나면 ‘물질과 정신일 뿐이구나. 생멸하고 있는 것들일 뿐이구나, 무상한 것일 뿐이구나’라는 등으로 숙고하고 반조하는 것처럼 다섯 감각문 전향 마음, 마음 문 전향 마음들이 바른 방법, 바른 길에 따라 마음기울이며 제일 먼저 생겨난다. 그렇게 마음기울이는 대로 마음 문(意門)에 위빳사나 속행들이 관찰하고 새기고 마음기울이며 생겨난다. 이 위빳사나 속행의 연속들을 ‘물질과 정신의 성품들을 사실대로 바르게 알기 때문에, 그 뒤에 생겨나는 특별한 위빳사나 지혜들, 도와 과가 생겨나게 하는 바른 법이기 때문에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한다. 제일 먼저 생겨나는 전향도 그 위빳사나 속행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한다. 그래서 「새김확립 긴 경(大念處經)」의 복주서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Yonisomanasikāro nāma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하는 것은 kusalādinaṁ 선(善) 등의 taṁ taṁ sabhāvarasalakkhaṇādikassa 고유성품, 역할, 또는 무상·고·무아 [라는 공통특성] 등을 yāthāvato avabujjhanavasena 사실대로 바르게 아는 것에 의해 uppanno 생겨나는 ñāṇasampayuttacittuppādo 지혜와 결합하는 마음일어남이다. ((사실대로 바르게 아는 마음일어남이라는 말이다.)) hi 맞다. so 그것, 그 마음일어남은 aviparītamanasikāratāya 그릇됨이 없이 사실대로 바르게 마음 기울이는 것이기 때문에 yonisomanasikāroti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부른다. āvajjanāpi 전향도 tadābhogatāya 그 속행의 생겨남을 위해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기 때문에 taggatika eva 그 속행과 같을 뿐이다.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부른다.]

이 복주서에 따라 그 앞의 인식과정에서 생겨나는 전향과 위빳사나 속행을 ‘뒤의 여러 인식과정에서 생겨나는 선업들의 조건이 되는 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알아야 한다. [하지만] 여러 주석서, 복주서들에서는 일률적으로 한 인식과정 내에서 생겨나는 선업, 불선업들의 원인이라는 이유로 전향만을 올바른 마음기울임,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상황에 따른 설명이라고 알아야 한다.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이라는 것은 바랄 만한 번영을 얻게 하는 바른 방법이 아닌 마음기울임이다. (("Akaṅkhitassa hitasukhassa pattiyā anupayabhūto manasikāro(바라는 이익과 행복을 얻게 하는 방법이 아닌 마음기울임이다)"라는 복주서에 따라 해석한 것이다.)) 바르지 않은 길로서의 마음기울임이다. 항상하지 않은 법들에 대해 항상하다고, 괴로움인 법에 대해 행복이라고, 자아가 아닌 법에 대해 자아라고, 더러운 법에 대해 깨끗하다고 마음기울이는 것이다.

여섯 문에서 드러나는 물질과 정신을 항상한 것으로, 행복하고 좋은 것으로, 원하는 대로 성취할 수 있는 자아나 중생인 것으로, 아름답고 깨끗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이다. 항상한 것 등으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여섯 문에서 드러나는 물질과 정신들을 관찰하지 않고 새기지 않으면서 생각하고 반조하는 것은 위빳사나의 영역에서는 대부분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일 뿐이다. 무엇 때문인가? 그러한 생각, 반조와 관련하여 돌이켜 다시 생각하게 되면 항상한 것 등으로만 마음기울이는 것이 분명하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볼 때 '본다'하며 새기지 않기 때문에 단지 보는 것으로만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때 '누구를 보았다, 그를 과거에도 본 적이 있다, 지금까지 그가 있구나'라든가, 보고 나서 나중에도 '그는 어디로 갔었다, 지금쯤이면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보는 나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라는 등의 마음기울임이 생겨난다. 이것은 다 '항상하다'라고 마음기울이는 것이다. '여성을 본다, 남성을 본다, 그는 행복하다, 그를 보고 만나서 좋다'라는 등으로 행복한 것으로 마음기울이는 것도 생겨난다. 보이는 대상과 보는 것을 '개인, 중생, 나'라고 마음기울이는 것도 생겨난다.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마음기울이는 것도 생겨난다. 무상 등으로 마음기울이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때가 되어서야 다시 마음기울여도 무상 등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 볼 수 없다. 하물며 도와 과가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도달하는 대상들을 관찰함이 없이 원하는 대로 반조하고 숙고하는 것은 '진실로 원하고 바랄만한, 진짜 번영, 행복인 위빳사나 [지혜], 도와 과들을 생겨나게 할 수 없고 불이익만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이라고 한다.

모든 불선법들은 이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을 근본원인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나중에 생겨나는 인식과정에 관계된 불선법들의 원인을 말한다고 하면 앞에 [생겨나는 인식과정에] 포함된 전향과 불선 속행들도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이라고 알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의 인식과정에서 불선 속행들의 원인을 말한다면 전향만을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이라고 알아야 한다. 범부들은 일반적으로 불선업이 생겨나게 하는 대상들만을 바라고 있다. 그래서 여섯 문에 대상들이 드러나는 것과 동시에 '좋아할 만한 것인가, 싫어할 만한 것인가'라는 등으로 반조하고 전향하는 것처럼 전향 마음들이 바르지 않은 방법, 길에 따라 마음기울이며 제일 먼저 생겨난다. 귀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밤에 '쉭, 쉭'하는 음산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귀신인가?'라고 마음기울이는 것과 같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사람이 보는 사람마다 '내 친구인가?'라고 마음기울이는 것과 같다.

다섯 감각문에서는 그 전향 마음에 따라 접수 마음, 조사 마음들이 생겨나고, 그 뒤에 결정 마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다, 싫어할 만한 것이다'라는 등으로 결정한다. 그래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속행들이 생겨난다. 마음 문에서도 좋아할 만한 것, 싫어할 만한 것 등으로 전향 마음이 마음기울인 것에 따라 불선 속행들이 생겨난다. 이상이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 때문에 불선법들이 생겨나는 모습이다.


요약

위빳사나에서는 관찰하고 새기는 것을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한다. 그러한 관찰, 새김에 도움을 주는 마음기울임도 올바른 마음기울임이라고 알아야 한다. 관찰하는 것에 도움을 주지 않고, 도달하는 대상들을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반조하는 것을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이라고 한다. 이 장애를 아는 모습에서는 장애들을 생겨나게 하는 처음의 반조함을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이라고 한다. 이 [올바른, 올바르지 않은] 마음기울임 두 가지가 생겨날 때마다 새겨 아는 것은 "yathā ca anuppannassa kāmacchandassa uppādo hoti, tañca pajānāti. Yathā ca uppannassa kāmacchandassa pahānaṁ hoti, tañca pajānāti(전에 없던 감각욕망 바람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분명히 알고, 생겨난 감각욕망 바람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분명히 안다)"라고 하는 경전내용과 일치한다.

- 마하시 사야도 지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pp.498~504, 이솔출판(2013)

 

 

마나시까라가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되기 위해서는 속행에서 지혜와 결합한 속행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왜 '속행 마음'이 중요한가?

 

요니소 마나시까라는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 '현명한 주의력'으로 번역된다.

최대 17 심찰나의 인식과정에서 유익하거나 해로울 수 있는 것, 지혜가 일어날 수 있는 곳은 속행(javana) 뿐이다.

나머지 심찰나의 마음들은 수동적인 과보의 마음이거나 원인 없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중 전향의 마음들은 원인 없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으로서 그 심찰나에 지혜가 함께 일어날 수 없는 마음이다.

그러나 뒤따라 일어나는 속행 마음에서 지혜가 일어난다면 이 전향의 마음은 '요니소 마나시까라'라는 이름을 얻는다.

 

오문전향과 의문전향에서 지혜가 결합하는 것이 아니다.

속행 과정에서 지혜가 일어나야 전향의 마음들은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된다.

속행의 순간에 지혜가 일어나도록 전향의 마음들이 올바르게 마음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속행의 순간에 단속이 일어나지만, 통칭 눈의 감각기능을 단속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래 청정도론의 내용을 살펴보자.

57. 그런데 여기서 눈의 감각기능 자체를 가지고 단속이나 단속하지 않음을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눈의 감성을 의지하여 마음챙김이나 혹은 잊어버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상인 형상이 눈의 영역에 나타날 때 존재지속심(bhavaṅga)이 두 번 일어난 뒤 멈추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노의 요소가 전향의 역할을 하면서 일어났다가 멸한다. 그 다음에 눈의 알음알이가 보는 역할을 하고, 그 다음에 과보로 나타난 마노의 요소가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고, 그 다음에 원인 없는 과보로 나타난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가 조사하는 역할을 하고, 그 다음에 원인 없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가 결정하는 역할을 하면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 직후에 속행(javana)이 일어난다. 여기서 존재지속심의 시기나 전향 등의 어느 시기에도 단속이나 단속하지 않음은 있지 않다. 그러나 속행의 순간에 만약 나쁜 계행이나 잊어버림이나 알지 못함이나 참을성 없음이나 게으름이 일어나면 단속하지 않은 것이 된다.¹⁰⁵⁾ 이와 같이 할 때 비로소 눈의 감각기능을 단속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¹⁰⁵⁾ 아비담마에 의하면 눈의 알음알이 그 자체는 과보의 마음이기 때문에 미래에 업을 생산할 유익하거나 해로운 마음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유익함이나 해로움은 결정하는 마음 다음에 일어나는 속행(javana)의 과정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일곱 마음순간 동안 진행되는 이 속행의 과정이 유익하거나 해로운 업을 짓는 마음순간이라고 아비담마는 말하고 있다...

58. 왜 그런가? 이와 같이 되면 문도 보호되지 않고, 존재지속심도, 전향 등의 인식과정들도 보호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과 같은가? 만약 도시의 4대문을 단속하지 않으면 비록 도시 안의 집의 대문과 창고와 실내 등을 잘 단속했다 하더라도 도시 안의 모든 재물은 보호되지 않을 것이고,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시의 문으로 도적들이 들어와 제 멋대로 설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속행에서 나쁜 계행 등이 일어날 때 그것이 단속되지 않으면 문도 보호되지 않고, 존재지속심이나 전향 등의 인식과정들도 보호되지 않는다. 그러나 속행에서 계 등이 일어나면 문도 보호되고, 존재지속심과 전향 등의 인식과정들도 보호된다. 무엇과 같은가? 도시의 문을 단속했을 때는 비록 어떤 집안 등을 단속하지 않더라도 도시 안의 모든 재물은 안전하게 보호되고 지켜지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도시의 문을 잠가버리면 도적들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속행에서 계 등이 일어날 때 문도 보호되고, 존재지속심과 전향 등의 인식과정들도 보호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속행의 순간에 일어나지만 눈의 감각기능을 단속한다고 설한 것이다.

- 대림스님 옮김, 『청정도론』 pp. 156~158, 초기불전연구원(2004)

 

 

"감각기능을 단속한다"고 말할 때 바왕가, 전향, 육문 등의 단계에서 단속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속행이 잘 단속될 때 비로소 감각기능이 단속되었다고 말하고 바왕가, 전향, 육문 등의 인식과정들도 보호된다고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익함, 해로움, 지혜는 속행의 순간에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속행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마음기울이는 전향의 마음들이 현명한 주의력, 어리석은 주의력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담마간다 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청정도론에서 해설한 내용과 같은 논지의 내용이다.

"이때 그 마음 문 전향이나 오문 전향에 마음기울임(필자 주 - 마나시까라)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에 따라서 선한 속행, 불선 속행이 생겨나고 선한 속행에서는 통찰지가 결합될 거고, 불선 속행에서는 어리석음이 결합될 것이기 때문에 이때 결합된다고 하는 것은 마음 문 전향이 생겨날 때, 오문 전향이 생겨날 때 통찰지가 결합된다는 뜻이 아니라 나중에 속행 때 통찰지와 어리석음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 담마간다 스님 해설

 

 

파욱 사야도의 경우 '오문전향'은 제외하고 '의문전향'(= '결정하는 마음')만을 '요니소 마나시까라/아요니소 마나시까라'로 본다.

자와나가 직전 심찰나에 생멸한 의문전향/결정 마음을 의지하여 일어나므로, 이것만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는 관점이신 듯 하다.

질문7.12 : 주의력과 7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를 수행하는 것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대답7.12 : 칠각지를 수행할 때, 주의력을 포함해서 34가지 정신현상이 있다. 때때로 34가지 정신현상을 통찰지라 부른다. 왜냐하면 34가지 정신현상 중에서 지혜(pañña)가 주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 속에서 3가지 주의력을 알아야 한다.

1. 대상에 대한 근본 원인으로서의 주의력........(ārammaṇa patipādaka manasikāra)
2. 인식과정의 근본 원인으로서의 주의력..........(vīthi patipādaka manasikāra)
3. 자와나의 근본 원인으로서의 주의력..............(javana paṭipādaka manasikāra)

대상에 대한 근본 원인으로서의 주의력은 마음부수로서의 주의력이다. 그 기능은 수행자의 마음에 대상을 분명하게 만든다.

인식과정의 근본 원인으로서의 주의력은 오문 인식과정에서의 오문 전향의식이다. 이 주의력 때문에 오문 인식과정이 각기 자기 대상을 취하게 한다.

자와나의 근본 원인으로서의 주의력은 의문 인식과정에서의 의문전향의식과 오문 인식과정에서의 결정의식이다. 이 주의력은 현명한 주의력이거나 어리석은 주의력이다. 이 주의력에 의지해서 자와나가 일어난다.
 만일 현명한 주의력이라면, 자와나는 범부에게나 수행자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에게는 단지 작용만 할 뿐이다. 어리석은 주의력일 때 자와나는 항상 해로운 것이다. 이것은 아라한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 파욱 사야도, 『사마타 그리고 위빠사나』

 

 

그렇다면 현명한 주의력은 어떻게 계발해야 할까?

 

관념, 우연, 영원한 것, 즐거운 것, 주재하는 내가 있음, 깨끗한 것으로 본다면 어리석은 주의력이다.

요소, 인과, 무상, 괴로움, 무아, 더러운 것으로 보거나 표상에 집중한다면 현명한 주의력이다.

욕계의 인식과정이 건전하거나 불건전할 수 있다. 그것은 현명한 주의력(yoniso manasikāra)인가 어리석은 주의력(ayoniso manasikāra)인가에 달려있다. 주의력은 욕계의 마음이 유익한지 아니면 해로운지를 결정한다.

대상을 보고 그것을 물질-정신, 원인과 결과, 무상 고 무아, 또는 혐오감으로 본다면, 그 주의력은 현명한 주의력이고 자와나 의식은 유익하다.

만일 관념으로써 대상을 본다면, 즉 사람, 남자, 여자, 생명체, 금, 은, 또는 항상, 행복, 자아로 본다면, 그 주의력은 어리석은 주의력이고 자와나 의식은 해로운 것이다.

그런데 관념으로 보는 자와나 의식이 때로는 건전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자애관을 수행하거나, 보시를 할 때이다. 이러한 인식과정을 식별할 때 그 차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여기서 현명한 주의력(yoniso-manasikāra)과 어리석은 주의력(ayoniso-manasikāra)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수행자가 아나파나 사띠를 수행할 때 그는 자연스런 호흡에 집중한다. 이때의 주의력이 현명한 주의력이다. 욱가하 니밋따와 빠띠바가 니밋따가 나타날 때, 수행자는 그 니밋따에 집중한다. 이때의 주의력이 현명한 주의력이다. 

위빠사나 명상에서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정신이다, 이것이 원인이다, 이것이 결과다, 이것이 무상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무아이다’라고 관찰한다면, 이때의 주의력이 또한 현명한 주의력이다. 그러나 ‘이것이 남자, 여자, 아들, 딸, 아버지, 어머니, 신, 동물이다’ ‘이것이 금이다, 이것이 돈이다’라고 본다면, 이때의 주의력은 어리석은 주의력이다.

현명한 주의력은 많은 건전한 생각이 일어나게 하고, 어리석은 주의력은 많은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나게 한다. 이 불건전한 생각은 집중을 감소시키고, 후퇴시키고,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현명한 주의력으로 명상 주제를 계속해서 관찰한다면, 건전한 생각이 증가한다. 빠띠바가 니밋따와 같은 표상에 주의력을 완전히 개발하면, 근접삼매에서 본삼매를 얻는 것이다.

...

질문7.11 : 수행자가 일상생활에서는 어떻게 현명한 주의력을 수행합니까? 그리고 사마타-위빠사나 명상에서는 어떻게 현명한 주의력을 수행합니까?

대답7.11 : 가장 현명한 주의력이 위빠사나이다. 위빠사나 수준까지 수행할 수 있다면, 가장 현명한 주의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위빠사나를 수행할 수 있다면 도・과와 같은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준까지 수행할 수 없다면,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諸行無常)’의 진리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 또한 현명한 주의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약하고, 이차적인 현명한 주의력이다.

그대는 또한 사무량심(四無量心) 특히, 평온 무량심(捨無量心)을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은 수승한 주의력이다. 왜냐하면 평온 무량심은 ‘모든 존재는 자기 업의 소유자이다’라는 업의 법칙을 관찰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어리석은 주의력 때문에 많은 악업이 하나하나씩 일어난다. 이 악업은 4악도에서 많은 고통을 일으킨다. 이것을 아는 것이 현명한 주의력이다. 당신은 이것을 일상생활에서 수행해야 한다.

- 파욱 사야도, 『사마타 그리고 위빠사나』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각 심찰나마다 대상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마음부수로서 마나시까라이다.
  • 인식과정을 일으키는 오문전향과 자와나 과정을 일으키는 의문전향 역시 마나시까라라고 칭한다.
  • 선 속행을 생겨나게 하는 전향 마음이 요니소 마나시까라이다. 불선 속행을 생겨나게 하는 전향 마음이 아요니소 마나시까라이다. 이것은 kusala(선)와 akusala(불선)의 구분에 의해서 분류한 것이다.
  • 그러나 amoha(통찰지), moha(어리석음)의 구분에 의해서 우리는 더 정확하게 요니소 마나시까라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즉, 통찰지와 결합한 속행을 생겨나게 하는 전향 마음이 요니소 마나시까라이다. 어리석음과 결합한 속행을 생겨나게 하는 전향 마음이 아요니소 마나시까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혜가 결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가?

  • 육문의 대상에 대해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정신이다, 이것이 원인이다, 이것이 결과다, 이것이 무상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무아이다’라고 관찰한다면, 즉 대상을 볼 때 자상과 공상과 인과를 관찰한다면 이때의 주의력은 현명한 주의력이다.
  • ‘이것이 생명체, 사람, 남자, 여자, 아들, 딸, 아버지, 어머니, 신, 동물이다’, ‘이것이 금, 은, 돈, 항상하는 것, 행복, 자아이다’라고 관념으로서 대상을 본다면, 이때의 주의력은 어리석은 주의력이고 자와나는 해롭다.
  • 명상 주제를 올바른 방법으로 계속해서 관찰한다면 현명한 주의력이다. 빠띠바가 니밋따와 같은 표상에 주의력을 완전히 개발하면 삼매를 얻고 요니소 마나시까라를 성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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