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열반/아비담마

의도(cetanā)와 주의(mānasikara), 일으킨 생각(vitakka), 지속적 고찰(vicāra)는 어떻게 다를까? (1)

by Rihan 2023. 11. 16.
728x90

바른 사유에서 '사유'로 옮기는 saṅkappa는 생각, 혹은 일으킨 생각으로 옮기는 vitakka와 동의어이다.

따라서 바른 사유는 출리(nekkhamma), 악의 없음(avyāpāda), 해코지 않음(ahiṃsa)으로 향하는 일으킨 생각(vitakka)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268쪽의 해설에도 바른 사유는 마음부수로는 일으킨 생각(vitakka)에 포함됨을 말하고 있다.

 

마음부수 중 생각을 대상에 적용하는 것으로는 vitakka 외에 vicāra와 mānasikara, cetanā도 있다.

이 넷은 각각 어떻게 다른 것일까?

 

 

1.

우 실라 사야도께선 배를 모는 것에 비유해서 이 마음부수들의 역할을 설명해 주셨다.

 

  • 의도(cetanā)는 배의 앞에서 방향을 잡고, 대상을 잡으며, 앞으로 가기 위한 노력도 한다.
  • 주의(mānasikara) 역시 방향을 잡는 역할을 한다.
  • 일으킨 생각(vitakka)과 지속적 고찰(vicāra)은 배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방향에 대한 생각 없이 계속해서 앞으로 가는 노력만 한다.

 

2.

먼저, 의도에 대해서 살펴보자.

(4) 의도(cetanā)

'의도'로 옮긴 cetanā는 citta나 cetasika처럼 √cit(to know)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자신과 결합된 법들을 대상에 묶는다는 뜻이다... 쌓는 역할은 유익함과 해로움에만 있다... ① 먼저 의도하는 특징을 가진 [욕계·색계·무색계·출세간의] 네 가지 경지에 속하는 의도는 대상을 알려는 최소한의 자극을 뜻한다. 이것이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일곱 가지 반드시들에 포함되는 의도이다. ② 쌓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에만 있는 의도는 업(kamma)을 뜻한다.

... 그리고 주석서들에서 의도는 관련된 마음부수들을 대상에 대해서 활동하도록 묶는 것(abhisandahati)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무엇이 업(kamma)인가?"... "㉠ 의도(cetanā)와 ㉡ 의도와 결합된 어떤 법들(ekacce ca cetanā-sampayuttakā dhammā)"(DhsA.88)이라고 업을 정의한다... "간탐(abhijjhā), 악의(vyāpāda),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 간탐 없음, 악의 없음, 바른 견해라는 이 여섯과 더불어서 의도와 결합된 법들을 알아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DhsA.89) 그러므로 업(kamma)을 종합적으로 정의해 보면 업은 유익한 의도(kusala-cetanā)나 해로운 의도(akusala-cetanā), 그리고 이러한 유익한 의도와 해로운 의도와 결합된 [마음부수]법들(cetanāsampayutta-dhammā)이고 이러한 업은 12연기의 두 번째인... 업형성의 상카라(abhisaṅkharaṇaka-saṅkhāra)와 동의어이다.

... [청정도론 XIV]: "135. 의도한다(cetayati)고 해서 의도(cetanā)라고 한다. 묶는다(abhisandahati)는 뜻이다. 이것은 의도하는 성질을 특징으로 한다. 격려하는 역할을 한다. 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치 상수제자와 대목수처럼 자기의 일과 남의 일을 성취한다. 급한 일을 기억하는 것 등에 대해 관련된 법들을 실행하게 하는 성질에 의해서 이것은 분명하다."

-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227~230, 초기불전연구원(2017)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 설명하는 cetanā는 다음과 같다.

  • 의도는 대상을 알려는 정신적인 자극이다.
  • 이 자극은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 법들을 '격려'하고 '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 따라서 의도는 자신과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 법들을 대상에 대해서 활동하도록 묶는 역할을 한다.
  •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에서는 업을 쌓는 역할도 한다. 즉, 의도가 업이다.

 

여기서 몇 가지 추가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1)

의도는 유익하거나 해로운 마음에서 특히 '자기의 일과 남의 일을 성취'하는 특징을 보인다.

즉,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에서 의도는 다른 마음부수들을 '조정'하면서 스스로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를 '하려고' 한다.

 

스스로의 일과 남의 일을 모두 성취하는 상수제자처럼 2배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보의 마음이나 작용만 하는 마음에서 의도는 다른 마음부수들을 '조정'하기만 할 뿐 스스로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2)

업(kamma)은 의도(cetanā)와 의도와 결합된 [마음부수]법들(cetanāsampayutta-dhammā)이라고 했다.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가 각각 유익한 업, 해로운 업이 되는 것은 알겠다.

그러면 '의도와 결합된 마음부수법들'이 업이 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필자는 우 실라 사야도께 이 부분을 여쭈었고, 사야도는 아래 2가지 경우를 설명해 주셨다.

① 함께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마음부수로 인해 업의 과보가 차이가 난다.

② 같은 마음-마음부수가 일어나더라도 '수준' 차이에 인해 업의 과보가 차이가 난다.

 

①의 경우 욕계 유익한 마음에서 그 예시를 찾을 수 있다.

기쁨이 있으면 더 수승하다. 지혜가 있으면 더 수승하다. 자극을 받지 않은 마음이 더 수승하다.

이렇게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가 무엇인지에 따라 의도(=업)의 과보는 더 수승하거나 저열하게 된다.

 

②의 경우 선정이나 빳타나에서 공부하는 '지배의 조건'(adhipati paccaya)에서 그 예시를 찾을 수 있다.

초선을 얕게 닦으면 범중천에 태어난다. 중간으로 닦으면 범보천에 태어난다. 최상으로 닦으면 대범천에 태어난다.

이 초선의 마음들은 모두 같은 마음-마음부수가 일어나는 마음이지만, 그 깊이 수준에 따라 업의 과보가 차이가 나게 된다.

 

지배의 조건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지혜'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최상이다. 같은 '정진'도 지배의 조건이 되는 정진이 있고 지배의 조건이 되지 못하는 정진도 있다.

        
이렇게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법들에 의해 의도가 쌓는 업의 과보는 차이가 나게 된다.

이는 해로운 마음에서도 같은 메커니즘일 것이다.

 

3)

cetanā와 saṅkhāra가 동의어라고 했다.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이 두 가지가 동의어라고 말할까?

 

상카라는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의 상카라는 오온 중 행으로 번역하는 상카라saṅkhāra이다.

 

사야도의 설명에 따르면 cetanā의 동의어로 표현되는 saṅkhāra는 오온 중 '행온'을 의미하며, '형성된 것들' 모두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4)

의도라는 업은 업형성의 상카라(abhisaṅkharaṇaka-saṅkhāra)와 동의어라고 했다.

아비상카라에 대해서는 아래 글에서 다룬 바 있다.

 

 

네 가지 업, 아비상카라와 상카라, 업과 업의 길에 대한 이해 (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

III. 네 가지 업 Kamma-catukka '업(業)'³⁹⁷⁾이라는 용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깜마(kamma, Sk. karma)는 √kṛ(to do)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영어에서 do 동사의 의미가 아주 광범위하게 행위 일반을 나

rihankim.tistory.com


(2024년 6월 17일 수정) 

아래 취소선을 그은 설명에 대한 종전 필자의 의견을 수정한다. 

 

현재 필자는 아비상카라를 '강한 상카라'라고 말하는 퓨어담마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며, 관련한 설명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에 대한 잘못된 이해 교정하기' 글에 작성하였다. 

 

현재 필자는 아비상카라를 의도적 행위, 업형성, 업형성의 상카라, 혹은 업과 동의어로 정의하여 이해하고 있다.

더하여 아비상카라는 재생연결의 과정만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업을 형성하는 상카라라고 이해한다.


 

업의 과보로는 살아가면서 감관을 통해 경험하는 '삶의 과정에서의 과보'가 있고, 태어날 곳을 정하는 '재생연결식의 과보'가 있다.

그리고 후자에 해당하는 업을 '업의 길'(kamma-patha)이라고 부름을 공부한 바 있다.

 

상카라의 경우도 비슷하다.

단순히 행위를 하는 것은 '상카라'이고, 무명과 탐진치로 오염되어 재생연결의 과정을 이끄는 강한 상카라를 '아비상카라'라고 부른다.

 

물론 탐진치가 없는 유익한 행위도 업을 짓는 무명이 있는 행위이므로 아비상카라가 될 수 있다.

무명이 없는 아라한만이 어떠한 업도 짓지 않는 '작용만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무명이 없으므로 아비상카라를 짓지도 않고, 다시 태어나지도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재생연결의 업을 형성하는 '업형성의 상카라'(abhisaṅkharaṇaka-saṅkhāra)는 '업의 길'(kamma-patha)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겠다.

 

 

3.

의도에 대한 다른 설명도 소개한다.

4. Cetanā 의도
volition, goodwill

의도cetanā⁸⁵⁾는 마음citta과 함께 일어나는 다른 마음부수cetasika를 조정하는 마음부수이다.

⁸⁵⁾ ...cetanā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고 노력이 개입된 사고 작용이라 할 수 있겠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cetanā를 업이라고 말한다. 의도로써 업을 짓나니 몸과 말과 뜻으로써"라고 나타나듯이 의도는 모든 의도적인 행위를 나타내며 오온 중 행으로 번역하는 상카라saṅkhāra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위바위니 띠까」 Vibhavinī Ṭīkā는 쩨따나를 상카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빠라맛타디빠니 띠까」 paramatthadīpanī Ṭīkā는 대상을 얻는 행위의 성취를 위해서 작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아비담마에서 쩨따나는 의도라기보다는 고무나 격려, 혹은 자극의 뜻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렇게 고무하고 격려하고 자극하는 마음의 성질을 나타내는 술어로 정착되었다. 주석서들에서 의도는 관련된 마음부수를 대상에 대해서 활동하도록 묶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이 어떤 종류의 대상을 취할 때면 감각접촉phassa은 그 대상과 맞부딪친다. 그러면 느낌vedanā이 그 대상을 즐기거나 체험한다. 인식sañña이 그 대상에 대한 인상을 만든다. 나중에 설명할 집중ekaggatā, 생명기능jīvitindriya, 주의기울임manasikāra과 같은 다른 마음부수도 각각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마음과 동시에 일어난다. 마음이 어떤 대상을 취하면 믿음saddhā과 알아차림sati(필자 주 - 마음챙김) 같은 선하고 유익한 마음부수나 탐욕lobha과 성냄dosa과 같은 해로운 마음부수와도 결부된다. 마음부수cetasika는 각각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항상 마음citta과 함께 하며 각 마음부수는 마음보다 뒤처지지 않으며 기능을 수행하는 데 실패하지 않는다. 마음과 모든 마음부수는 동시에 일어나고 사라진다. 그들은 항상 조화를 이루며 쌍을 이룬다. 마음과 그 마음부수가 그 대상에 함께 있도록 자극하는 힘이 바로 의도cetanā이다.

부연설명: 마음과 마음부수가 대상을 취할 때 어느 하나의 마음의 상태도 뒤처지지 않기 때문에 함께 일어나는 마음과 마음부수를 하나의 이사회라고 생각해 보자. 이 협회에서 마음citta은 이사장이고 의도의 마음부수cetanā-cetasika는 비서다. 협회의 비서는 보통 열심히 일하느라 매우 바쁘다. 그 비서는 다른 일원들로 하여금 맡은 바의 책임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독려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이익을 위해 부지런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다. 그렇게 다른 일원들을 독려하기 때문에 비서는 두 배의 책임을 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도cetanā도 자신의 고유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동시에 마음과 마음부수와 같은 다른 심리상태를 조정하려고 애씀으로써 이들이 대상에 밀착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전쟁터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내면의 부추김, 즉 의도cetanā가 약하면 마음과 다른 마음부수도 또한 약해진다. 하지만 내면의 부추김, 즉 의도가 강하고 열정적이라면 마음과 다른 모든 마음부수도 따라서 맞춰갈 것이다. 그러므로 의도는 어떠한 대상이든 간에 그 대상을 취하는 기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의도cetanā는 업kamma이다.

어떤 사내가 폭도의 잔혹한 공격을 받아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잔인무도한 행위에 가담한 대부분의 폭도가 사내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죽음에 이르기까지에는 효과가 없다. 강력한 의지에 촉발된 폭도 중의 어느 한 사람의 무자비한 몇 차례의 가격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이 사람만이 살인범이 된다. 이와 같이 마음과 마음부수가 한데 뭉쳐 보시dāna, 지계sīla와 같은 유익한 행을 하거나 살생pāṇātipātā과 같은 해로운 행을 하면 그 가운데 의도cetanā가 가장 효과적이면서 강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도의 잠재력만이 중생의 정신의 흐름 속에 남는다. 그리하여 행위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이 있는 것을 하나 찾아야 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이 의도라고 결정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의도는 업 행위의 진정한 범인이자 창조자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의도에 그 책임을 부여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가 업이라고 말한다.

『앙굿따라 니까야』 「꿰뚫음 경」 Nibbedhika sutta(A6.63)

이 말씀에 따라 의도가 강력할 때 업도 강력해지고, 의도가 약해지면 업도 약해진다고 알아두자.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130~132, 법보시자 위데히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에서 설명하는 cetanā는 다음과 같다.

  • 아비담마에서 cetanā는 사실 '의도'라는 말보다 '의지, 자극, 노력, 고무, 격려'의 뜻에 가깝다. 이를 통해 대상을 얻는 행위의 성취를 위해 작용한다.
  • 같은 맥락에서 cetanā는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의 고유역할을 성취하고, 다른 마음부수들을 '조정'하고 '묶는' 지휘자 역할을 함으로써 그들의 역할을 성취하도록 2배로 노력하는 마음부수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에서의 cetanā의 역할에서 드러난다.
  • 따라서 '내면의 부추김'이자 '의지', '자극'에 해당하는 cetanā가 약하면 함께 일어나는 마음과 마음부수들도 약해진다. Cetanā를 통해 마음과 마음부수들은 그 대상을 실패하지 않고 취할 수 있다.
  • 그러나 과보의 마음과 작용만 하는 마음에서 cetanā는 조정의 역할만 한다. 의지를 가지고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 마음과 마음부수가 한데 뭉쳐 유익한 행을 하거나 해로운 행을 할 때, 그 가운데 cetanā가 가장 효과적이면서 강력한 것이므로 중생의 정신의 흐름, 상속과정 속에 남는다. 이로써 행위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cetanā가 된다. 이것이 의도가 업인 이유이다.
  • 따라서 cetanā가 강할 때 업도 강력해지고, cetanā가 약해지면 업도 약해진다.

 

4.

의도에 대한 마지막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제4장. 의도(cetanā)

...앗타살리니에 의도(cetanā)는 대상 때문에 일어나는 다른 법들(마음과 다른 마음부수들)을 조정하는 것이 특징이고, 기꺼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 그 역할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정하는 것이 특징인 의도가 없다면 4개의 존재계(중생계 - 역자)와 같은 것도 없다. 모든 의도들은 '조정'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하려고 하는' 역할은 오로지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의 상태에서만 작용한다. 지시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관련되는 마음부수들을 지시한다. 마치 상수제자 혹은 대목수 등과 같이 자신의 일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도 보아주는 것과 같다.

청정도론의 정의도 이와 비슷합니다. 의도(cetanā)의 특징은 (각 부분이 조화롭게 움직이도록 - 역자) 조정하는 것입니다. 의도(cetanā)는 마음 그리고 이 마음과 함께하는 다른 마음부수들을 조정합니다. 이때 마음은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마음은 대상을 앎에 있어 '리더'의 역할을 합니다. 이 마음과 함께 하는 마음부수들도 이 마음과 같은 대상을 공유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예를 들면 감각접촉은 대상에 부딪치게 하고, 느낌은 대상의 '맛'을 경험하거나 혹은 즐기고, 인식은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미래에 다시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를 하는 등 자신들만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지요. 의도(cetanā)는 자신과 함께 하는 다른 모든 마음부수들이 공유하는 대상에 대하여 자신들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지 지켜봅니다.

모든 의도(cetanā)는 함께 하는 다른 현상(담마)들의 역할을 조정합니다. 즉 유익한 마음, 해로운 마음, 과보의 마음 혹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냐 상관이 없습니다. 한편 유익한 마음이나 해로운 마음에 함께 하는 의도(cetanā)는 조정이라는 역할 이외에 '~하려고 하는' 혹은 '업을 짓는' 역할을 합니다. 앗타살리니에 의도(cetanā)는 도덕적인 행위(선행)나 비도덕적인 행위(악행)를 할 때, 다른 마음부수들은 제한적으로만 움직이는데 반해서 의도는 매우 원기왕성하게 활동한다고 나옵니다. 이때에 의도(cetanā)는 함께 일어난 다른 마음부수들의 일도 조정하면서,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배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앗타살라니에 의도(cetanā)가 두 배의 역할을 하는 것이 마치 농장주가 다른 인부들의 일을 지시하고, 그들이 일하는 것을 돌보고도 똑같은 몫에 해당하는 자신의 일도 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두 배의 힘과 두 배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의도는 선(kusala)과 악(akusala)을 행함에 있어서 두 배의 힘과 두 배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시'라는 의도(cetanā)의 역할에 대하여 앗타살리니에는 자신도 법문을 하고 다른 제자들도 법문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수제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치 대목수가 자신의 일도 하고 다른 목수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이 혹은 전장에 나간 장군이 자기도 전투를 함은 물론 다른 병사들도 잘 싸우도록 지휘하는 장군에 비유합니다.

"그가 시작하면, 다른 추종자들은 그의 행동을 본받아 뒤따른다. 이렇게 의도가 어떤 대상에 대한 역할을 시작할 때, 함께 하는 다른 마음부수들도 각자의 역할을 수행토록 한다."

한편 과보의 마음이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과 함께하는 의도(cetanā)는 다른 담마들의 역할만을 조정합니다. 이 의도(cetanā)는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를 '하도록 혹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를 하도록 동기를 자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과보의 마음인 안식과 함께 하는 의도(cetanā)도 역시 과보인데, 이 때는 함께 하는 다른 담마들의 역할만을 지시합니다. 예를 들면 감각접촉은 형상을 접촉하도록 하고, 느낌(vedanā)은 대상의 맛을 즐기며, 인식은 형상을 기억하고 다음에 다시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를 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유익한 마음이나 해로운 마음과 함께 하는 의도(cetanā)는 다른 것들보다 두 배로 원기왕성하게 일을 합니다. 다른 담마들을 조정하는 것 외에도 선행이나 악행을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선업이나 악업에는 그 행위를 자극하는 의도가 있고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선업과 악업이란 사실 유익한 의도와 해로운 의도를 말합니다...


제5장.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에서 의도

의도(cetanā)는 모든 마음들과 함께 하는 마음부수입니다... 이 의도는 함께 일어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담마(현상)들을 조정하는 역할도 수행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유익하거나(kusala) 해롭거나(akusala), 과보의 마음이거나(vipāka) 혹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과는 무관합니다.

의도가 유익한 마음이나 혹은 해로운 마음과 함께 할 때에는 조정하는 역할 이외에도 유익한 행동을 '하려는' 혹은 해로운 행동을 '하려는 역할을 추가로 수행합니다. 그래서 이 의도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유익한 행위나 해로운 행위를 하도록 동기를 유발합니다. 이 유익한 의도와 해로운 의도를 우리는 유익한 업 그리고 해로운 업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업들은 각각에 상응하는 과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익한 업과 해로운 업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재생연결식이라는 형태의 과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혹은 금생에 몸의 감관에서 감촉을 경험하는 몸의 알음알이, 혀의 알음알이, 코의 알음알이, 귀의 알음알이 혹은 눈의 알음알이와 같은 형태의 과보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즐거운 대상이나 불쾌한 대상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감관을 통한 즐거운 경험이나 불쾌한 경험을 하는 것은 모두 업 때문입니다.

선한 행위나 혹은 해로운 행위를 하게 만드는 의도(업)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서는 즉시 사라져 버립니다. 하지만 마음은 다음 마음에 의하여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에 업은 쌓여만 갑니다. 이것이 나중에 바른 조건을 만나면 과보를 만듭니다. 심지어 이 업은 금생이 아닌 다음 생에서도 무르익습니다. 그럼 다음 생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무명 때문에 상카라가 일어난다."

상카라는 12연기의 두 번째 연결고리입니다. 상카라는 유익한 의도 혹은 해로운 의도를 말합니다. 즉 과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업이 상카라입니다.

"상카라 때문에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알음알이는 12연기의 세 번째 연결고리로 재생연결식도 될 수 있고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안식이나 이식과 같은 과보의 마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 12연기에서 두 번째 연결고리인 상카라는 과보를 만드는 업을 말합니다. 업은 의도입니다. 이 의도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윤회는 계속됩니다. 상카라는 종종 '업의 형성(kamma-formation)'으로 번역합니다. 이런 의도를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비(abhi)는 전치사인데 때때로 '우세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유익한 업이나 해로운 업인 의도는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우세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유익한 마음이나 해로운 마음과 함께 하는 의도만이 아비상카라가 됩니다.

과보의 마음이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과 함께 하는 의도는 아비상카라가 되지 못합니다. 모든 아비상카라 혹은 '업의 형성들'은 12연기의 한 연결고리로 무명 때문에 일어납니다. 비록 함께 하는 마음에 어리석음(무명)이 없는 유익한 마음일지라도 유익한 업은 여전히 무명에 의하여 조건 지워집니다. 무명이 있는 한 우리는 과보를 만드는 업을 짓습니다. 그래서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윤회를 계속해야 합니다. 무명에 싸인 사람을 청정도론(XVII, 119)에서는 마치 맹인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태어나면서 장님인 자가 인도해 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에는 바른 길로 어떤 때에는 길이 아닌 곳으로 가듯
윤회에 돌고 도는 어리석은 자는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공덕이 되는 행위를 어떤 때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를 짓는다.

하지만 법을 알고서 진리들을 관찰할 때 무명은 가라앉고 고요하게 다닐 것이다.

다른 종류의 마음들과 함께 하는 의도는 다른 것입니다. 유익한 마음과 함께 하는 혹은 해로운 마음과 함께 하는 의도는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과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의 마음은 예외입니다.

한편 색계나 무색계의 마음들과 함께하는 의도는 색계 범천의 세계나 무색계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의도는 12연기의 연결고리에 해당합니다.

해로운 업이나 유익한 업 때문에 생긴 과보의 마음과 함께하는 의도도 역시 과보입니다. 이 과보의 마음과 함께 하는 의도는 함께 하는 다른 담마들을 조정하는 역할만 수행합니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과 함께 하는 의도는 유익하지도 해롭지도 않으며, 과보도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작용만 하며 함께 하는 담마들을 조정하는 역할만을 수행합니다.

출세간의 마음과 함께 하는 의도는 12연기의 연결고리가 아닙니다. 출세간 마음은 도의 마음인데, 바로 과의 마음이라는 과보를 만듭니다. 도의 마음 다음에 과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도의 마음은 오염들을 제거하므로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과보를 만드는 업을 짓지 않습니다. 아라한의 마음은 단지 작용만 합니다. 이 아라한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과 함께하는 의도 그리고 아라한의 미소 짓는 마음인 '뿌리 없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은 아비상카라가 아닙니다. 12연기의 연결고리도 아닙니다. 아라한에게는 유익한 마음도 없고 해로운 마음도 없습니다. 즉 과보를 만들 수 있는, 업을 짓는 마음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신에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만 있습니다.

... 이것은 그러한 마음들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해로운 마음과 유익한 마음은 유익함과 해로운 행위를 하려고 하는 과거부터 누적된 성향에 의하여 영향을 받습니다. 반면에 즐겁거나 불쾌한 경험을 하는 안식이나 이식은 과보로 업에 의하여 조건 지워집니다.

의도는 상카라 담마, 조건 지워진 담마입니다. 이것은 마음 그리고 그 마음과 함께 하는 다른 마음부수들에 의하여 조건지워진 것입니다. 상카라는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릅니다. 12연기에서 상카라는 무명 때문에 '형성되는 업'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다시 태어나게 하는, 윤회의 과보를 일으키는 업을 형성한다는 의미입니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P.75~101,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쩨따시까』에서 설명하는 cetanā는 다음과 같다.

  • Cetanā의 역할은 '기꺼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의지'나 '자극'과 같다.
  • Cetanā의 특징은 대상 때문에 일어나는 다른 법들(마음과 다른 마음부수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도록 '조정'하고 '지시'하는 것이다.
  • 모든 의도들은 '조정'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하려고 하는', '업을 짓는' 의지나 자극이나 지시의 역할은 오로지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의 상태에서만 작용한다.
  • 도덕적인 행위(선행)나 비도덕적인 행위(악행)를 할 때, 다른 마음부수들은 제한적으로만 움직이는데 반해서 의도는 매우 원기왕성하게 활동한다. 이때에 의도(cetanā)는 함께 일어난 다른 마음부수들의 일도 조정하면서,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두 배의 노력'을 한다. 의도는 선(kusala)과 불선(akusala)을 행함에 있어서 두 배의 힘과 두 배의 노력을 기울인다.
  • 과보의 마음이나 작용만 하는 마음과 함께하는 의도(cetanā)는 다른 담마들의 역할만을 지시하고 조정한다. 이 의도(cetanā)는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를 '하도록 혹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유익하거나 해로운 행위를 하도록 동기를 자극하지 않는다.
  • 유익한 마음이나 해로운 마음과 함께 하는 의도(cetanā)는 다른 것들보다 두 배로 원기왕성하게 일을 하며, 다른 담마들을 조정하는 것 외에도 선행이나 악행을 '하려고' 한다. 의도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유익한 행위나 해로운 행위를 하도록 동기를 유발한다. 그래서 선업과 악업이란 유익한 의도와 해로운 의도를 말하는 것이 된다.
  • 이러한 업들은 각각에 상응하는 과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업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재생연결식이라는 형태의 과보를 만들어 낸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업은 금생에 눈, 귀, 코, 혀, 몸, 마노라는 몸의 감관에서 눈, 귀, 코, 혀, 몸, 마노의 알음알이와 같은 형태의 과보로 나타난다. 감각기관을 통해 즐거운 대상이나 불쾌한 대상을 경험한다.
  • 선한 행위나 혹은 해로운 행위를 하게 만드는 의도(업)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서는 즉시 사라져 버리지만, 마음은 다음 마음에 의하여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에 업은 쌓여만 간다. 이것이 나중에 바른 조건을 만나면 과보를 만든다. 이것은 금생뿐만 아니라 내생에도 이어진다.
  • 무명 때문에 상카라가 일어난다. 12연기의 상카라는 '의도적 행위', 즉 유익한 의도 혹은 해로운 의도이다. 과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업이다. '업의 형성(kamma-formation)'으로 번역된다. 상카라 때문에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알음알이는 재생연결식, 혹은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과보의 마음이다.
  • 이 의도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윤회는 계속된다. 상카라 중 특별히 윤회를 계속시키는 강한 상카라(의도)를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라고 한다. 오로지 유익한 마음이나 해로운 마음과 함께 하는 의도 중 무거운 업만이 아비상카라가 된다. 과보의 마음이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과 함께 하는 의도는 아비상카라가 되지 못한다.
  • 모든 아비상카라 혹은 '업형성들'은 12연기의 한 연결고리로 무명 때문에 일어난다. 비록 탐진치가 없는 유익한 마음일지라도 유익한 업은 여전히 무명에 의하여 조건 지워진다. 무명이 있는 한 우리는 과보를 만드는 업을 짓는다. 그래서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윤회를 계속해야 한다.
  • 무명에 싸인 사람을 청정도론에서 마치 맹인과 같다고 표현한다. 인도해 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공덕이 되는 행위를 어떤 때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를 짓는다. 법을 알고서 진리들을 관찰할 때 무명은 가라앉고 고요하게 다닐 수 있다.
  • 출세간의 마음과 함께 하는 의도는 12연기의 연결고리가 아니다. 윤회를 계속시키는 업을 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의 마음은 바로 과의 마음이라는 과보를 만든다. 도의 마음은 오염들을 제거하므로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에서 벗어나게 한다.

 

5.

앞서 의도(cetanā)에 대해 살펴본 내용은 사야도께서 의도에 대해서 "방향을 잡고, 대상을 잡으며, 앞으로 가기 위한 노력도 한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과 그 궤가 같다.

 

'대상을 아는 것'인 마음이 대상을 향해서 일어날 때, 의도는 그 자신은 물론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들이 대상에 대해 밀착하여 활동하도록 조정하고 지시할 것이다.

특히 유익하거나 해로운 마음에서는 마음의 적용을 유익하거나 해로운 방향으로 잡고, 마음과 마음부수법들이 그 역할과 방향을 성취하도록 노력하고 자극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