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을 듣고 나서 하는 회향은 무엇을 회향하는 것일까?
1.
이전에 회향을 다룬 글에서 보시의 공덕은 회향할 수 있지만, 지계와 수행의 공덕은 회향할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지계와 수행의 공덕은 직접 지어야 하는 것이다.
보시는 재물을 보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봉사하는 것, 회향하는 것, 법을 보시하는 것 모두가 보시에 속한다.
지계를 통해 평화롭고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보시를 통해 부유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수행자는 이렇게 지은 선업의 공덕으로 편안하고 행복하게 출세간을 향한 수행을 할 수 있다.
성자들을 친견하고, 법문을 듣고, 법에 대해 질문하고, 좌선과 행선을 하는 것이다.
2.
그렇다면 우리가 법문을 듣고 공덕을 회향할 때는 무엇을 회향하는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법문을 듣는 수행의 공덕은 직접 지어야 하는 것이며, 회향할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우 실라 사야도께 이와 관련해서 질문하였다.
사야도는 이와 관련하여 법문을 설한 사야도의 법보시 공덕을 모든 존재에게 회향하는 것이라고 답해주셨다.
즉, 사야도의 법문을 듣는 대중의 수행 공덕을 회향하는 것이 아닌, 법을 설해주시는 사야도의 보시 공덕을 모든 존재에게 회향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원이나 수행처에서 행한 지계나 수행의 공덕이 회향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계를 지키고 수행한 수행 공덕을 회향함으로써 다른 존재들로 하여금 함께 기뻐함의 공덕을 짓도록 유도할 수 있다.
다른 이의 유익한 행동을 보고 '사두! 사두! 사두!'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보시의 공덕을 향한 함께 기뻐함은 똑같은 보시의 공덕을 자신에게도 생기게 한다.
지계나 수행의 공덕을 향한 함께 기뻐함의 마음은 그와 같은 공덕을 생기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유익하고 바람직한 것에 대한 부드러운 마음, 기뻐하는 마음, 자극받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돕는 또 하나의 조건이 될 것이다.
3.
앞서 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을 공부하면서 '10가지 공덕행의 토대'에 대해 배운 바 있다.
이 10가지는 보시, 지계, 수행, 공경, 가까이 섬김, 덕을 타인에게 회향함, 타인의 공덕을 따라 기뻐함, 법을 배움, 법을 설함, 자기의 견해를 올곧게 가짐이다.
여기서 회향은 여섯 번째, 회향을 기뻐하는 것은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한 내용을 아래에 소개한다.
회향
보시와 관련하여 알아야 할 덕목으로 회향과 회향기뻐함이 있습니다. 회향은 공덕행토대 여섯 번째에, 회향기뻐함은 일곱 번째에 해당합니다.
회향pattidāna이란 선업을 행한 뒤 그 공덕몫patti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주는 것dāna 입니다. 여러 주석서들에는 보시 선업의 공덕몫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합송경>의 복주서에는 계 등 다른 선업의 공덕몫을 나누어 주는 것도 포함하여 설명했습니다(DAṬ.iii.206). 따라서 보시나 계, 수행이라는 선업을 행한 뒤에는 부모님을 비롯한 여러 존재에게 회향해야 합니다.
"지금 행한 저의 선업 공덕을(독송 공덕을; 보시와 계와 수행 공덕을) 부모님과 스승님, 친척, 친구, 도반들에게 회향합니다.
또한 저를 보호하는 천신들, 집을(정사를, 선원을) 보호하는 천신들, 지역을 보호하는 천신들, 도시를 보호하는 천신들, 주위를 둘러싼 여러 산들의 산신, 지신, 목신, 약초신, 풀초신과 강과 바다를 보호하는 천신들에게 회향합니다.
또한 모든 나라의 왕들, 염라대왕들, 비 천왕들, 구름 천왕들, 바람 천왕들, 다따랏타·위룰하카·위루빡카·꾸웨라라는 사대천왕들과 그 권속들인 간답바, 꿈반다, 용, 금시조, 야차 천신들과 제석천왕들과 대범천을 비롯한 31천의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에게 회향합니다.
이 모든 존재가 기뻐하며 '사두'를 불러 여러 위험 사라지고, 몸과 마음 건강하고 행복하게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행복을 누리길 기원합니다.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깟사빠 부처님 당시 수다원이었던 한 거사와 범부였던 이발사가 배를 타고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외딴섬에 남겨졌습니다. 이발사는 새를 죽여서 살아갔고 수다원 거사에게도 새를 죽여 먹도록 권했습니다. 하지만 거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의지할 것은 삼보뿐이라고 믿고 삼보의 공덕만 거듭 새기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용왕이 자신의 몸을 배처럼 만들고 해신이 뱃사공으로 변신하여 배에 칠보를 가득 채우고 "남섬부주로 갈 사람은 오시오"라고 알렸습니다. 먼저 수다원 거사가 도착하여 배에 탔습니다. 다음에 이발사도 와서 배에 타려 했습니다. 그러자 뱃사공은 "그대에게는 계의 공덕이 없어서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본 수다원 거사가 "나의 보시 공덕, 지계 공덕, 수행 공덕을 회향합니다. 사두를 외치시오"라고 이발사에게 회향했고, 이발사가 "사두"라고 외치자 배에 탈 수 있었다고 합니다(J190).
이러한 일화를 통해서 계 등의 다른 선업 공덕들도 회향하는 것이 가능하며, 실제로 실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회향을 하면 자신의 공덕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줄어들지 않습니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아누룻다Anuruddha 존자의 전생이었던 안나바라Annabhāra는 재정관 수마나Sumana의 집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우빠릿타Upariṭṭha라는 벽지불이 멸진정에서 출정한 뒤 안나바라를 섭수하기 위해(필자 주 - 섭수: 상대방을 도와 다행스러운 길로 인도해 주고자 하는 자비로운 생각, 관대한 마음으로 남을 받아들임,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거두어 들여서 보살핌)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안나바라는 자신의 식사를 보시했습니다. 그러자 재정관의 집에서 천신이 박수를 치면서 찬탄했습니다. 재정관이 그 이유를 알고는 안나바라로부터 그 공덕을 사려고 했습니다. 안나바라는 공덕을 나누어 주면 자신의 공덕몫이 줄어들지 않는지 벽지불에게 가서 물었고 벽지불은 "등불은 아무리 나누어 주어도 원래 빛이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등불로 인해 더 밝아진다"라는 비유와 함께 회향을 해도 원래 공덕몫은 줄어들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안나바라는 자신의 공덕몫을 재정관에게 대가를 받지 않고 회향했고 그 과보로 재정관과 같은 위치에 올랐습니다(Dhp.382 일화).
- 비구 일창 담마간다, 『가르침을 배우다』 P.118~120, 도서출판 불방일(2021)
회향기뻐함
회향기뻐함pattānumodana이란 회향해 준 공덕몫에 대해 pattiyā→patta "사두"라고 외치며 기뻐하는 것anumodana입니다.⁸²
⁸² 『담마상가니 주석서』에서는 자신을 지정하여 회향하지 않았어도 다른 이의 공덕행토대, 예를 들어 타인이 계를 잘 지키는 것에 대해 "사두"를 외치며 크게 기뻐하는 것abbhanumodana도 회향기뻐함에 해당된다고 설명한다(DhsA.203).
정리하자면 자신을 지정하여 회향한 공덕몫에 대해 기뻐하면 '회향기뻐함pattānumodana',
회향하지 않은 공덕에 대해 기뻐하면 '따라기뻐함anumodana',
다른 이의 번영과 부귀나 승진 등에 대해 기뻐하면 '같이기뻐함muditā'이다.
일반적으로 공덕몫에는 회향 받을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정하여 회향한 공덕몫인 '지정 공덕몫uddissika patti'과 구체적으로 지정하지 않은 '비지정 공덕몫anuddissika patti'이 있습니다. 이 중 현생에 과보를 직접 주는 것은 지정 공덕몫에 대해 사두를 외치며 기뻐하는 '지정 회향기뻐함'입니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지계자에 보시한뒤 시아귀로 태어난이
지정하여 회향하여 그가알고 사두하면
보시한것 따라서만 현생과보 누린다네
먼저 '지계자에 보시한뒤'라는 표현은 계를 잘 지키는 이에게 보시한 뒤 그 공덕몫을 회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계를 지키지 않는 이들에게 보시한 뒤 그 공덕몫을 회향한 경우는 현생과보를 생겨나게 하지 못합니다... 딸이 계를 잘 지키지 않는 바라문들에게 보시한 뒤 회향을 했기 때문에 회향을 받지 못하여 이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자따삿뚜 왕은 부처님을 위시한 승가에 보시한 뒤 그 시아귀를 대상으로 회향했고, 그 시아귀는 천상의 음식과 의복 등을 얻었다고 합니다(Pe.152:peA.99).
이렇게 계를 지키는 이에게 보시한 뒤 그 보시의 공덕몫을 회향해야 하는데, 그때 그 대상이 회향을 받아야 먹을 것 등을 얻을 수 있는 시아귀라야만 현생의 과보를 즉시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아귀로 태어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은 이가 다음 생에 천신이나 인간, 축생, 지옥 중생, 혹은 아귀 중에서도 매우 목마르고 배고파하는 기갈 아귀, 불에 타면서 괴로움을 받는 소갈 아귀, 찌꺼기나 오물 등을 먹고 사는 구토물 아귀, 몸집은 크나 입이 작아 매우 고통 받는 깔라깐지까 아수라 아귀로 태어났다면 아무리 그 죽은 이를 대상으로 해도 과보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이 시아귀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한 회향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회향을 할 때는 보통 이전에 친척이었던 시아귀들에게도 회향하기 때문에 그들이 사두를 외치면 회향의 이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친척이었던 시아귀들이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다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길기 때문에 그 긴 윤회에서 친척이었던 시아귀가 한 명도 없을 수 없습니다. 설령 그러한 친척들이 없다 하더라도 보시자가 보시한 공덕, 회향한 선업은 보시한 이에게 설령 코끼리나 말 등 축생으로 태어났을 때라도 수명, 용모, 행복, 힘, 지혜라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큰 결과를 주기 때문에 무의미하지 않다고 부처님께서 「자눗소니 바라문경」에서 설하셨습니다(A10:177).
'지정하여 회항하여'란, 구체적으로 공덕몫을 회향할 대상을 지정하고서 회향해야 현생의 과보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일화는 매우 많습니다. 반대로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정하지 않고 회향한 것에 대해 기뻐한 경우, 현생의 과보를 받은 일화가 여러 문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알고 사두하면'이란, 이렇게 지정하여 회향했을 때 그 시아귀도 회향하는 곳에 와서 그 사실을 알고 사두를 외치며 기뻐해야 이익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시아귀들은 항상 회향 받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경우가 적지만 간혹 모르는 경우는 이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대는 임종하지 않았습니까? 정사를 비롯하여 많은 것을 보시한 과보로 천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회향도 했는데 회향을 받지 못했습니까?"라고 스님이 물었습니다. 창건주 여신도는 자신이 임종에 즈음해서 정사를 보시한 선업 등을 잘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데 갑자기 손녀가 손을 잡으며 "할머니, 저희를 두고 가시면 어떡해요?"라고 울먹이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손녀와 가족에 대한 애착이 생겨나 시아귀로 태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시아귀 동료들이 불러 위쪽 지방에 폭포가 있는 곳으로 잠시 다녀온 사이 회향을 하여 회향식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래서 다음날 자신을 대상으로 다시 회향을 해 달라는 부탁을 하러 온 것이라는 사실 등을 스님께 말했습니다...
'보시한것 따라서만'이란, 회향에 대해 기뻐할 때 보시한 것에 따라서만 시아귀가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음식을 보시한 뒤 회향하면 천상의 음식 등 먹을 것이 시아귀에게 생겨납니다. 옷이나 가사를 보시한 뒤 회향하면 입을 것이, 정사나 깔개 등을 보시한 뒤 회향하면 천궁 등 지낼 곳이, 물을 보시한 뒤 회향하면 천상의 연못 등이 생겨납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시와 보시의 이익, 회향에 대해 「담장 밖 경」을 설하셨습니다(Khp.7~8).
죽은 이들은 자기 집에 와서
담장의 밖에 서서 머문다네.
혹은 여러 갈래 갈라진 틈이나
혹은 문기둥에 의지해 서 있다네.
하지만 많은 먹을 것과 마실 것,
씹을 것과 삼킬 것, 친지들에게 있어도
그들의 불선업, 바로 그것 때문에
아무도 죽은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네.
죽어 버린 이들을 연민하는 이라면
친척에게 이와 같이 보시한다네.
적당한 시간에 깨끗하고 훌륭하고
올리기에 적당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이 공덕이 친척에게 도달하기를
죽은 친척들이 행복하기를'
그러면 죽은 친척이었던 아귀들,
그들도 또한 그 자리에 모여들어
먹을 것과 마실 것, 많은 보시 대해서
공손하게 사두를 외치면서 기뻐한다네.
"그들 때문에 이러한 것 얻었다.
살아 있는 친척들이 오래오래 살기를
우리에게 공양도 또한 올렸다.
보시한 이들도 큰 결실을 얻었다."
죽은 이들 사는 곳엔 농사도 없다네.
소 키우는 목축업도 찾아볼 수 없다네.
장사를 하는 상업도 없으며
돈으로 사고파는 그런 일도 없다네.
목숨을 마친 그곳의 죽은 이들
오직 이곳의 보시로만 살아가네.
높은 곳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아래로 아래로 계속 흘러가듯
이곳에서 보시한 그것이
죽은 이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네.
흘러 내려오는 냇물로 넘치는
강물이 바다를 가득 채우듯이
이곳에서 보시한 그것이
죽은 이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네.
"나에게 이러한 것 주었고 해주었다.
나의 친척이고 친구이자 동료였다."
망자들이 해주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죽은 이들 위해서 공양을 올려야 하네.
우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도
죽은 이들 위해서는 아무 이익 없는데도
남은 친척들은 그렇게만 지낸다네.
훌륭하게 실천하며 잘 머무는 승가에
올릴 만한 공양을 잘 올린다면
오랫동안 자신에게 복덕이 생겨나고
즉시 이익을 가져다준다네.
보시한 이 친지 의무 다한 것이고
망자 위해 뛰어난 공양 행한 것이고
비구들에게 힘도 선사한 것이어서
보시한 이 큰 공덕 실천한 것이라네.
회향은 자식의 의무 중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돌아가신 지 사흘째부터 회향을 하라고 되어있지만 보통 미얀마 등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돌아가신 날, 그리고 일주일 뒤, 그 뒤로는 일 년에 한 번이든 혹은 기억날 때마다 스님들을 초청하거나 정사로 가서 여법하게 공양을 올린 뒤 돌아가신 분, 그리고 과거 생에 친척이었던 분들을 비롯하여 여러 천신에게 회향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물론 돌아가시기 전에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돌아가신 뒤에도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에 따라 여법한 방법으로 회향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 입니다.
- 비구 일창 담마간다, 『가르침을 배우다』 P.120~127, 도서출판 불방일(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