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9가지 덕목 - ③ 명행족vijjācaraṇasampanno, 8가지 지혜와 15가지 실천이 완벽한 분 (1)
3. 세 번째 덕목 - 명행족vijjācaraṇasampanno
1.
So bhagavā itipi Vijjācaraṇasampanno.
그 세존께서는 이런 이유로 지혜와 실천이 완벽한 분이시다.
윗자짜라나삼빤노는 '지혜와 실천이 완벽한 분'을 뜻한다.
이 단어는 윗자, 짜라나, 삼빤노로 이루어져 있다.
- Vijjā는 '지식, 지혜'를 뜻한다.
- Vijjā의 번역어 '명지(明知)'와 관련하여, 필자는 이 번역이 다소 헷갈리기 쉬운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명지'의 단어 그대로 뜻은 '밝은 지혜'다. 그러나 빠알리어 vijjā, 그리고 그 반대말인 avijjā는 사실 '밝음'이나 '어두움'이라는 뜻이 없다.
- 단어의 어근부터 살펴보자. Vijjā의 어근은 √vid(알다, 깨닫다, to know)다. 이것이 지식, 학문, 기술, 지혜를 뜻하는 'vijjā'가 되었다. 반대로 아윗자는 부정 접두사 a-가 붙어서 'a- + vijjā' → '앎(vijjā)이 없음' → '무지, 어리석음'을 뜻한다.
- 따라서 윗자는 원래 통찰하는 지혜(wisdom)만을 말하는 용어가 아니며, 학문적·기술적 지식(knowledge)이라는 뜻도 가진 일반적인 단어이기도 하다. 즉, 특별히 밝은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거나 특별히 지혜만을 뜻하는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3가지 혹은 8가지 윗자라고 통칭될 때는 지혜를 주로 뜻한다.
- 결론적으로 윗자는 단어 그 자체로는 그냥 지식이나 지혜를 뜻하는 말일 뿐이며, 아윗자 역시 빠알리어 그대로 직역하면 그냥 무지, 어리석음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 그러면 avijjā는 왜 '빛이 없음'이라고 해석되는 무명(無明)이라고 번역하는가? 어리석음, 무지는 지혜의 빛(흔히 비유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진실대로 말하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지혜가 함께한 마음은 실제로 밝은 빛을 가진다)이 없는 어두움과 같기 때문에 비유적으로 '없을 무, 밝을 명'을 써서 '무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 Vijjā 역시 마찬가지다. '명지'는 '밝을 명, 알 지'를 써서 지혜 자체가 지닌 밝은 특성을 강조한 의역일 뿐이다.
- 따라서 필자는 윗자의 번역인 '명지', 아윗자의 번역인 '무명'을 그대로 직역하여 그냥 '지식'이나 '지혜', 그리고 '무지'나 '어리석음' 정도로 받아들이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 Caraṇa는 '실천, 수행'을 뜻한다.
- √car(움직이다, 걷다, 행하다) → caraṇa: 행(行), 실천, 수행, 행위 (Conduct, practice, virtue)
- Sampanno는 '완전히 이루어진, 성취된'의 뜻이다.
- Saṃ(함께, 완전히) + pad(가다, to go) → sampajjati(이루어지다, 성취하다, 완성되다) → 과거분사 sampanno(완전히 이루어진, 갖추어진, accomplished, perfected)
- 무엇이 완전히 성취되었나? 지혜Vijjā와 실천Caraṇa이 모두 완성되었다(足).
후술하겠지만 8가지 윗자를 하나씩 살펴보면 환희심이 일어날 만큼 부처님이 대단하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대단한 것은 그러한 결과를 만든 부처님의 '짜라나'이다.
붓다께서는 8가지 지혜를 완벽하게 갖추기 위해서 15가지 실천을 완벽하게 하셨다.
얼마동안 하셨나? 4번의 불간아승기, 그리고 10만 대겁동안 하셨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부처님의 8가지 지혜는 그것을 성취할만큼 압도적인 양의 원인을 지었기에 주어지는 결과일 뿐이다.
부처님이 대 붓다, 크게 깨달으신 분이신 이유는 그 엄청난 양의 원인, 실천, 빠라미를 해내셨다는 것에 있다.
붓다께서는 붓다가 되시기 위한 모든 값을 다 지불하셨다.
그 값은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공덕을 다 합쳐도 붓다 한 분의 공덕에 미치지 못할 만큼의 공덕의 양이다.
윗자는 지혜이고 아윗자는 어리석음 · 무지 · 무명입니다. '윗자'라는 단어의 뿌리는 '윗디'입니다. '윗디'는 뚫는다, 관통한다, 찌른다는 뜻입니다. 즉 기계로 벽을 뚫듯이 관통하는 것입니다... '윗자'는 꿰뚫어 보는 지혜를 말합니다... 과거가 시간의 벽으로 가려져 있어도 과거를 알 수 있고,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원인을 꿰뚫어 보면서 앞으로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압니다. 지금 결과를 보면서 과거에 무슨 원인이 있었는지 꿰뚫어 압니다.
'윗자'는 우리가 자아라고 알고 있는 개념에서, 물질과 정신이라는 궁극적 실재를 꿰뚫어 보는 지혜입니다. 물질과 정신을 원인에 따른 결과로, 물질과 정신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다고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무상 · 고 · 무아를 알고 모든 번뇌를 버릴 수 있는 지혜가 '윗자'입니다... 뒤에 '짜라나'가 나오면서 윗자를 가지게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짜라나'에서 '짜라'는 계속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짜라나'는 반복해서 많이 하는 것으로 실천 수행을 가리킵니다. 수행은 한두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수십 만 번, 수백 만 번, 수천 만 번, 수억 만 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한 생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몇 생에 걸쳐서 하는 것인데, 붓다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겁을 포함하여 셀 수 없이 많은 무수한 겁 네 번을 지나고 또 십만 겁을 거쳐서 수행하여 붓다가 되셨습니다. 붓다만큼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수행했던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붓다가 되어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도 공짜로 알 수 없습니다. 수행은 조금만 하고 다 알고 싶다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붓다께서는 무수한 겁을 지나면서 수행하셔서 '윗자짜라나'가 완벽합니다. 해야 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면 두 가지를 다했고 세 가지가 있으면 세 가지를 다했고 네 가지 있으면 네 가지를 다 했습니다. 이와 같이 빠짐없이 해야 하는 '짜라나'들을 완벽하게 해왔습니다. 해야 하는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해야 되는 일도 완벽하게 됩니다... 붓다께서는 해야 하는 양도 빠짐없이 다 하셨고, 해야 하는 기간도 부족함이 없이 채우셨기에 붓다가 되셨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짜라나'가 원인입니까? 결과입니까? '짜라나'가 원인입니다. '짜라나'라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윗자'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붓다께서 모든 지혜를 갖추신 것은 결과입니다. 지혜를 갖추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다 했습니다. 그것이 짜라나삼빤나입니다...
실천도 이론도 완벽한 것이 붓다의 '윗자짜라나삼빤노' 공덕입니다... 우리가 그 정도만 알아도 붓다의 공덕을 아예 모르고 절하는 사람과는 공덕의 무게가 엄청나게 차이가 있습니다. 붓다께 무조건 절하는 것은 선업은 선업이지만 붓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어 믿음의 깊이가 얇습니다. 그러나 절도 안 하는 사람보다는 엄청 낫습니다. 붓다께 절하는 선업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똑같은 불자끼리 보면 지혜가 약한 믿음 불자보다는 큰 지혜를 가진 지혜 불자가 가지는 공덕이 더 큽니다... 그 공덕을 깊이 이해하면서 존경심으로 절을 올릴 때, 그 사람의 공덕이 아주 크다는 말입니다. 그런 공덕의 차이는 미래에 받게 되는 과보의 차이로 이어집니다.
...우리도 우리가 해야 하는 짜라나를 다 실천함으로써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352~358, (사)법승 담마야나(2017)
부처님을 2가지 키워드로 설명하면 '지혜'와 '연민'이다.
윗자짜라나삼빤노에서 윗자는 지혜를 상징하고, 짜라나는 연민을 상징한다.
- Caraṇa sampadā mahākāruṇikataṃ: 짜라나(실천 수행이), 삼빠다(완벽하기에), 마하까루니까땅(대연민을 가지게 된다)
- 혼자 깨닫고 끝내기보다는 모든 중생들에게 회향하여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셨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대연민심으로 모든 중생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무수한 겁을 지나면서 짜라나를 하셨다.
- 이렇듯 연민심의 결과로 짜라나를 하셨다. 그런 짜라나가 있었기 때문에 지혜가 완벽하게 되어 '삽반뉴따 붓다'가 되셨다.
- 지혜가 있어야 옳고 그른 것, 이익되는 것과 불이익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민이 있어야 중생들에게 손해되는 일을 하지 않고 이익이 있는 좋은 일을 하도록 가르친다. 알고 있더라도 연민의 마음이 없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바르게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 부처님께서 이렇게 중생들에게 애를 쓰며 가르치고 있는 모습이 마하까루나(대연민)이다. 그것은 짜라나에서 나오는 마하까루나이다. 부처님을 대연민과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 '윗자짜라나삼빤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 윗자에서 삽반뉴따냐나(모든 것을 아는 지혜)가 나온다. 짜라나에서 마하까루니까(대연민), 이 세상을 넘어서 만 개 우주를 충분히 덮는 부처님의 대연민심이 나온다.
...Caraṇa sampadā mahākāruṇikataṃ...
짜라나(실천 수행이), 삼빠다(완벽하기에), 마하까루니까땅(대연민을 가지게 된다)... 혼자 깨닫고 끝내기보다는 모든 중생들에게 회향하여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대연민심으로 모든 중생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무수한 겁을 지나면서 짜라나를 하셨습니다. 그런 짜라나가 있었기 때문에 지혜가 완벽하게 되어 '삽반뉴따 붓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지혜와 대연민'입니다.
...부처님의 핵심은 지혜와 대연민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옳고 그른 것과 이익되는 것 불이익이 되는 것을 알고, 대연민으로 우리들이 손해를 입지 않고 이익이 있는 좋은 일을 하도록 가르칩니다... 알고 있지만 대연민의 마음이 없으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바르게 인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중생들에게 애를 쓰며 가르치고 있는 모습이 마하까루나(대연민)입니다. 그것은 짜라나에서 나오는 마하까루나입니다... 부처님을 대연민과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 '윗자짜라나삼빤나'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윗자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삽반뉴따냐나(모든 것을 아는 지혜)가 나옵니다. 짜라나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마하까루니까(대연민), 이 세상을 넘어서 만 개 우주를 충분히 덮어줄 수 있는 부처님의 대연민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412~414, (사)법승 담마야나(2017)
2.
따라서 부처님을 본받아야 하는 불자로서, 우리는 윗자짜라나삼빤노의 덕목에 대해 공부할 때 먼저 짜라나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15가지 실천 수행을 다 하셨기 때문에 여덟 가지 지혜를 완벽하게 갖추게 되셨다.
15가지 짜라나는 3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 첫 번째 그룹: ① 계율을 잘 지킴, ② 육문을 잘 지킴, ③ 음식의 적당량을 알고 먹음, ④ 항상 깨어있음
- 두 번째 그룹: ⑤ 초선정, ⑥ 2선정, ⑦ 3선정, ⑧ 4선정
- 세 번째 그룹: ⑨ 지식, ⑩ 지혜, ⑪ 믿음, ⑫노력, ⑬ 사띠, ⑭ 도덕적 부끄러움, ⑮ 도덕적 두려움
첫 번째 그룹은 다음의 네 가지로 구성된다.
- 실라삼와로sīlasaṃvaro: sīla + saṃ(함께, 철저히, 완전히) + var(덮다, 막다, 보호하다) → 계율을 철저히 지킴
- 지계로 몸과 입을 깨끗하게 한다. 계율을 지켜야 몸과 입이 깨끗해진다.
- 몸으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좋은 일을 한다. 몸을 훈련시킨다.
- 입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좋은 말을 한다. 입을 훈련시킨다.
- 공짜는 없다. 스스로를 계속 훈련시킨다. 본인이 직접 해야한다. 반복해서 많이많이 노력하고 훈련시키면 잘 하게 된다.
- 죽이는 대신 살려주고, 훔치는 대신 보태주고, 잘못된 음행 대신 상대를 보호해준다. 거짓말 대신 진실을 말하고, 이간질 대신 화합하는 말을 하고, 거친말 대신 자비롭고 부드러운 말을 하고, 잡담 대신 핵심과 이익이 있는 말을 한다.
- 재가자는 오계나 팔계를 잘 지키고, 출가자는 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 계율을 잘 지킨다.
- 그러면 이번 생보다 다음 생이 더 좋아지게 되고, 다음 생보다 또 그 다음 생이 더 좋아지게 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날 깨달음을 얻고, 마지막 생에는 아라한과에 도착하게 된다.
- 인드리에수굿따드와라따Indriyesuguttadvāratā: indriya(감각기관) + -esu(복수 처소격) + √gup(보호하다) + -ta(과거분사) + dvāra(문) + tā(~인 상태, ~인 성질) → 감각 작용에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알아차리는 수행
- 보이고 들렸을 때 인지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그리고 그것을 아는 마음은 동시에 작용하여 촉을 일으키고, 이것이 느낌, 갈애 등으로 이어진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느낌 → 갈애'로 이어지는 마음의 습관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 몸과 마음의 감각기관들은 언제나 외부 대상을 알고자 한다. 애초에 알려고 해서 생겨난 것이 알음알이viññāṇa이고 우리의 눈·귀·코·혀·몸·마음에는 이러한 윈냐나가 모두 있다.
- 즉, 우리의 눈·귀·코·혀·몸·마음은 언제나 외부 대상을 향해 기울어져 있고, 끊임없이 외부 대상에 반응한다. 이 때 느낌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좋다, 싫다'는 마음이 곧 번뇌(갈애)다. 이 반응하는 순간 사띠하여 번뇌를 일으키지 않도록 단속하는 수행이 '인드리에수굿따드와라따'이다.
- 보거나 들을 때 일어나는 마음 작용을 알아채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반복해서 연습한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순간에 어떤 마음을 일으키는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대상에 집착하여 ‘좋다, 싫다’는 습관적 반응을 내고 있진 않은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지 살핀다.
- 즉, '무엇을 보고 듣든 그에 대해 과도한 반응이나 번뇌가 생기지 않도록 마음챙김을 유지하는 상태'를 연습한다.
- 이런 마음가짐이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불필요하게 두리번거리지 않고, SNS·잡담 등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으며,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들에 감정 이입을 하기보다 담담히 관찰하게 될 것이다. 수행자의 시선은 항상 밑으로 향해 있고, 마음은 안으로 향해 있다. 이것은 대념처경에 나오는 '세상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는' 모습과 같다.
- 이와 반대로 이리 저리 둘러보는 자, 이런 저런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자는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여기 저기 내고있는 자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정확히 갈애와 번뇌가 생기는 메커니즘이다.
- 사띠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의 현상을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 알아채는 것, 인지하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것, 선업을 기억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여기에 주의를 더 기울여 대상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지혜가 작동한다면 분명한 이해clear comprehension라고 말하는 삼빠자나sampajañña가 일어난다. 이것은 그 대상의 작용 원리, 메커니즘을 분명히 이해하고 꿰뚫어보는 통찰의 지혜다.
- 보자네 맛딴뉴따Bhojane mattaññutā: bhojana(√bhuj 먹다 → 음식, 식사) + -e(처소격 단수) + mattā(재다, 양, 적절한 양) + √ñā(알다, 이해하다) + tā(~인 상태, ~인 성질) → 음식에 적당량을 아는 상태
-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아 해야할 일을 못한다. 음식의 적절한 양을 몰라서 너무 적게 먹으면 배가 고파 힘이 없어서 해야할 일을 못한다. 즉, 적게 먹어도 양을 모르는 것이고 많이 먹어도 양을 모르는 것이다.
- 자신이 매일 쓰는 에너지가 있다. 소모되는 에너지만큼 공급할 수 있도록 먹어야 한다. 양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내 양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 미리 예상되는 일이 있으면 조금 더 먹어두어야 한다. 내가 평소 보다 오늘 할 일이 많아서 에너지 소모가 많다면,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 있다면, 조금 더 먹어도 괜찮다. 그것이 지혜다.
- 수행자는 수행하기 위해서 먹을 뿐이다. 8계를 지키며 오후불식을 한다면, 점심 식사 후 다섯 시나 여섯 시 쯤에 조금 배고픈 느낌이 있다면 적당히 먹은 것이다. 그래서 오후 5시 쯤에 조금 배고픈 느낌이 있을 때 생과일 주스를 마시거나 물을 마시면 9시까지는 편하게 수행할 수 있다. 밤 9시까지 힘이 빠지는 부족함이 없이, 지치지 않고 피곤하지 않게,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 음식의 양을 모르는 사람은 욕심 조절이 안 되어 다른 일에서도 양을 모른다. 그래서 음식의 양을 아는 사람이 여러 곳에서도 양을 아는 사람이다. 자기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다.
- 쟈가리야누요가Jāgariyānuyoga: √jāgar(깨어있다, 잠들지 않다) + Anu(따라서, 계속하여) +√yuj(몰두하다) → 깨어있음에 몰두하는 수행
- 쟈가리야누요가jāgariyānuyoga는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먹는 것도 양을 확실하게 알아 항상 적당히 먹어야 하듯이, 자는 것도 적당히 자는 습관을 들인다.
- '쟈가리야누요가'가 잘 되면 시계가 필요없을 정도로 시간을 정확하게 안다. 수행을 잘하는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도 정확하게 시간을 맞춘다.
- 일이나 수행이 잘 되는 것은 자신의 생활 리듬을 보면서도 알 수 있다. 생활의 리듬이 좋아지면 일이 아주 잘 되는 것이다. 일이 잘 안 되면 생활의 리듬이 계속 깨진다. 그래서 일과 생활 리듬을 보면서 스스로 수행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일이 제대로 되고 있으면, 먹는 양이 알맞고 배고픈 시간, 대소변 보는 시간이 다 리듬에 잘 맞게 되고 있다. 자는 시간과 깨는 시간도 정확하고, 꿈도 잘 꾸지 않고, 수행 잘 될 때는 꿈이 아예 없다. 이렇게 생활의 리듬이 좋아진다.
- 쟈가리야누요가 수행을 많이 하신 부처님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 밤에 열 시쯤 경행하시다가 열한 시쯤에 주무시면 새벽 한 시에 일어나신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 주무신다.
- 일어나셔서 다시 경행하시며 몸을 좀 풀다가 좌선하시면서 이 세상에 '마하까루나(대연민)'을 베푸신다.
- 그러고 나서 새벽 네 시나 다섯 시에 '오늘 내가 누구를 가르쳐야 되는가?'를 살펴보신다. 오늘 깨달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보시고 많이 깨달을 수 있는 곳, 제일 높게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로 가실 계획을 세우신다.
- 그리고 아침 여섯 시경에 나갈 준비하고 탁발하신다. 그 다음 발우 씻고 돌아와 절에 들어가서 개인 꾸띠로 들어가시기 전에 법문을 해주신다. 그러면 비구들은 법문을 들은 후 산이나 숲 속이나 자기 숙소로 가서 하루 종일 수행한다.
- 낮에는 외지에서 찾아오는 비구들에게 법문해 주시고, 오후가 되어 재가 신도들이 찾아오면 또 설법해 주신다. 그들이 모두 돌아가면 밤이 된다. 밤에는 신들이 찾아 올 때도 있다.
- 그러면 열한 시쯤이 되어야 누워서 두 시간 정도 주무시고, 일어나 경행하시고, 경행 후 선정에 드시고, 탁발하시고, 법문하시고, 하루 종일 이런 식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열심히 가르치고 베풀며 사셨다.
① 실라삼와로(계율을 잘 지킨다)
...계율로 몸과 입을 잘 챙기는 것입니다. 몸으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입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고, 몸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입으로 좋은 말을 하면서 그렇게 스스로를 계속 훈련시킵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본인이 직접 해야 됩니다. 본인의 몸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일을 피하고, 입으로 좋은 말을 많이 하고 나쁜 말을 피해야 합니다.
...살생 대신에 많이 살려주고, 훔치는 것 대신에 많이 보태주고, 삿된 음행 대신에 많이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대신에 진실을 말합니다. 이간질 대신에 서로서로 화합하고 서로서로 잘 지낼 수 있는 좋은 말을 합니다. 헤어지게 하는 말은 피합니다. 그리고 거친 말 대신에 자비로운 말과 부드러운 말을 하고, 쓸모없는 말 대신에 유익한 말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오계와 팔계를 열심히 지키는 것이 실라삼와라 입니다. 비구는 비구 계율을, 비구니는 비구니 계율을, 사미는 사미 계율을, 사미니는 사미니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 실라삼와로 입니다.
...반복해서 많이많이 노력하고 훈련시키면 잘 하게 됩니다. 공짜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면 안 되고 열심히 몸을 훈련시키고 입을 훈련시키면서 차차 더 좋아지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번 생보다 다음 생이 더 좋아지게 되고, 다음 생보다 또 그 다음 생이 더 좋아지게 되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날 마지막에는 깨달음에 도착하게 됩니다.
지계로 몸과 입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계율을 지켜야 몸과 입이 깨끗해집니다. 몸으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입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아야, 또 몸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입으로 좋은 말을 해야, 몸과 입이 깨끗해집니다. 그것이 실라삼와로 입니다.
② 인드리에수굿따드와라따(육문을 잘 지킨다)
...눈 · 귀 · 코 · 혀 · 몸 · 마음이라는 육입이 각각의 대상과 만날 때마다 항상 사띠하면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도록 수행하고 있는 것을 '인드리에수굿따드와라따'라고 합니다. 볼 때 눈에서 사띠하고, 들을 때 귀에서 사띠하고, 냄새 맡을 때 코에서 사띠하고, 맛을 볼 때 혀에서 사띠하고, 감촉이 닿을 때 몸에서 사띠하고, 이것저것을 생각할 때 마음에서 사띠합니다... 입구에서 아파트를 지키는 경비원처럼 육문에서는 사띠가 항상 기다리며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수행자의 시선은 항상 밑으로 향해 있고, 마음은 안으로 향해 있습니다. 눈이 별난 사람을 까마귀 같다고 말합니다. 까마귀 눈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여기를 봤다가 금방 저기를 봤다가 합니다... 그것은 사띠가 없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비구의 시선은 항상 밑으로 향해 있어야 됩니다. 시선을 밑으로 두라고 하는 것이지 고개를 숙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고개를 숙이면 신경을 누르게 되어 목 디스크가 올 수 있습니다. 될수록 머리와 목을 똑바로 세우고 눈만 밑으로 봐야 합니다. 시선을 발끝에서 1미터 반 정도에 두라고 하는데 그것은 시선을 밑으로 둘 때 가장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지키고 귀를 지킨다는 것은 눈이나 귀에서 번뇌가 생기지 않게끔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든, 나쁜 말을 듣든, 번뇌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욕을 들어도, 칭찬을 들어도, 어떤 말을 듣든지 번뇌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눈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귀가 있기 때문에 소리가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대상에 따라서 반응하면서 불선업을 짓지 않도록 육입을 사띠로 챙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드리에수굿따드와-라따'입니다.
③ 보자네 맛딴뉴따(음식의 양을 알고 먹는다)
보자네 맛딴뉴따(bhojane mattaññutā)는 적절한 음식을 적당하게 먹는 것을 말합니다. 보자네(음식), 맛딴뉴따(적당한 양을 알고 먹는다)...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수행을 못 합니다. 양을 몰라서 너무 적게 먹으면 배가 고파 힘이 없어서 수행을 못 합니다. 적게 먹어도 양을 모르는 것이고 많이 먹어도 양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주 적당히 먹어야 합니다. 자신이 매일 쓰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소모되는 에너지만큼 공급할 수 있도록 먹어야 합니다. 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내 양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점심 공양 후 다섯 시나 여섯 시 쯤에 조금 배고픈 느낌이 있다면 적당히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후 5시 쯤에 조금 배고픈 느낌이 있을 때 생과일주스를 한 잔 마시거나 물을 한 잔 마시면 9시까지는 편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양을 알고 적당히 먹은 것입니다. 그때 너무 일찍 배가 고프거나 너무 배가 부르거나 하면, 너무 적게 먹었거나 아니면 너무 많이 먹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먹는 양을 잘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수행하기 위해서 먹을 뿐입니다... 밤 9시까지 힘이 빠지는 부족함이 없이, 지치지 않고 피곤하지 않게,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미리 예상되는 일이 있으면 조금 더 먹어두어야 합니다. 내가 평소 보다 오늘 할 일이 많아서 에너지 소모가 많다면,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 있다면, 조금 더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음식의 양을 모르는 사람은 욕심 조절이 안 되어 다른 일에서도 양을 모릅니다. 그래서 음식량을 아는 사람이 여러 곳에서도 양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지요. '보자네 맛딴뉴따'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하루에 세 번 혹은 네 번 먹다가 지금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으로 두 끼만 먹고도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팔계를 지키며 법문 듣고 밤 아홉 시나 열 시까지 수행하고 있는 것이 '보자나 맛딴뉴따'의 수행을 아주 적절하게 잘하는 것입니다...
④ 쟈가리야누요가(항상 깨어있다)
쟈가리야누요가(jāgariyānuyoga)는 항상 깨어있는 것...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잠자는 시간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밤 열 시에 자고 새벽 세 시에 일어나는 것이 '쟈가리야누요가' 수행을 아주 잘하는 것입니다. '쟈가리야누요가'가 잘 되면 시계가 필요없을 정도로 시간을 정확하게 압니다.
...수행을 잘하는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도 정확하게 시간을 맞춥니다. 수행을 많이 하다 보면 시간을 잘 알게 됩니다. 지금은 30분 지났다, 지금은 1시간 지났다, 이렇게 확실하게 알고 다음에는 초까지 맞출 수 있습니다.
...잠은 습관들이기 나름입니다. 그래서 매일 여섯 시간만 자면 나중에는 여섯 시간 후에 저절로 눈을 뜨게 됩니다. 자신에게는 여섯 시간 자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잠도 훈련이고 습관입니다. 그렇게 먹는 것도 양을 확실하게 알고 항상 적당히 먹고, 자는 것도 적당히 자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 '쟈가리야누요가' 수행을 많이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되신 후 사실은 하루에 주무시는 시간이 두 시간 정도였습니다. 밤에 열 시쯤 경행하시다가 열한 시쯤에 주무시면 새벽 한 시에 일어나십니다... 그 다음 일어나셔서 다시 경행하시며 몸을 좀 풀다가 좌선하시면서 이 세상에 '마하까루나(연민)'을 베푸십니다... 그러고 나서 새벽 네 시나 다섯 시에 '오늘 내가 누구를 가르쳐야 되는가?' 그것을 보십니다... 부처님이 만나 주는 사람은 깨달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닫지 못하더라도 부처를 만남으로써 앞으로 깨달을 수 있는 씨앗이 될 것 같은 사람도 만나십니다... 새벽에 부처님께서는 그런 스케줄을 다 짜는 것입니다. '오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누구이구나.'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많이 깨달을 수 있는 곳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제일 높게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로 가십니다. 아라한으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수다원으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아라한으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 먼저 가십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가시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에 두 시간 정도만 주무시고 새벽에 사무량심(자비희사) 선정에 들어가서 사무량심을 베풀면서 부처님께서는 오늘은 누구를 만나야 되는가, 누구를 가르쳐야 되는가, 어떤 일이 있겠다고 하루를 다 보십니다. 그리고 아침 여섯 시경에 나갈 준비하고 탁발합니다... 그 다음에 발우 씻고 돌아와 절에 들어가서 개인 꾸띠로 들어가시기 전에 서서 법문을 해 줍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아홉 시나 열 시쯤 가까이에 있는 스님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스님들은 법문을 들은 후 산이나 숲속이나 자기 숙소로 가서 하루 종일 수행합니다. 또 낮에 외지에서 찾아오는 스님들에게 법문해 주고 그리고 오후가 되어 신도들이 찾아오면 또 설법해 주십니다. 그들이 모두 다 돌아가면 밤이 됩니다. 밤에 아홉 시 이후부터 열한 시까지 신들이 찾아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열한 시쯤이 되어야 누워서 두 시간 정도, 새벽 한 시까지 주무십니다. 다시 두 시에 깨어 세 시까지 경행하시고, 세 시에서 다섯 시나 여섯 시까지 선정에 드시고, 탁발하시고, 법문하시고, 하루 종일 이런 식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열심히 가르치고 베풀며 사셨습니다.
...수행이 잘 되는 것은 자신의 생활 리듬을 보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생활의 리듬이 좋아지면 수행이 아주 잘 되는 것입니다. 수행이 잘 안 되면 생활의 리듬이 계속 깨집니다. 그래서 수행과 생활 리듬을 보면서 스스로 수행 정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 제대로 되고 있으면, 먹는 양이 알맞고 배고픈 시간, 대소변 보는 시간이 다 리듬에 잘 맞게 되고 있습니다. 자는 시간과 깨는 시간도 정확하고, 꿈도 잘 꾸지 않고, 수행 잘 될 때는 꿈이 아예 없습니다. 이렇게 생활의 리듬이 좋아집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383~392, (사)법승 담마야나(2017)
두 번째 그룹은 다음의 네 가지로 구성된다.
- 빠타맛자나Paṭhamajjhāna: paṭhama(처음, first) + jhāna → 초선정
- 5가지 선정의 요소: 일으킨 생각vitakka, 지속적 고찰vicāra, 희열pīti, 행복sukha, 집중ekaggatā
- 선정이 깊어질수록 거친 요소들이 하나씩 제거된다.
- 두띠얏자나Dutiyajjhāna: dutiya(두 번째, second) + jhāna → 2선정
- 3가지 선정의 요소: 희열pīti, 행복sukha, 집중ekaggatā
- 거친 위딱카, 위짜라가 제거된다.
- 따띠얏자나Tatiyajjhāna: Tatiya(세 번째, third) + jhāna → 3선정
- 2가지 선정의 요소: 행복sukha, 집중ekaggatā
- 거친 삐띠가 제거된다.
- 짜뚯탓자나Catutthajjhāna: Catuttha(네 번째, fourth) + jhāna → 4선정
- 2가지 선정의 요소: 평온upekkha, 집중ekaggatā
- 떨림이 있는 수카가 제거된다.
- 선정을 가지는 것이 왜 부처님의 짜라나, 해야 하는 일일까? 색계 4선정 모두에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신통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신통력의 원인은 선정이라는 '짜라나'를 완성했기 때문이며, 우리도 역시 신통지를 가지고 싶다면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을 닦아야 한다.
- 뿝베니와사누사띠(숙명통, 전생을 아는 지혜)가 생기면서 본인과 모든 중생들의 전생을 다 아신다.
- 딥바짝쿠(천안통)가 생기면서 중생들이 죽어서 어디에 태어나는지를 다 아신다.
- 딥바소따(천이통)가 생기면서 듣겠다고 마음먹으면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다.
- 잇디위다(신통변화)가 생기면서 여러 가지를 마음대로 다 만들 수 있고 자기와 똑같은 사람도 만들 수 있다.
- 쩨또빠리야(타심통)가 생기면서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⑤ 빠타맛자나(paṭhamajjhāna초선정)
⑥ 두띠얏자나(dutiyajjhāna이선정)
⑦ 따띠얏자나(tatiyajjhāna삼선정)
⑧ 짜뚯탓자나(catutthajjhāna사선정)
...여기서는 무색계는 빼고 색계 사선정만 말합니다.
초선정은 선정의 5가지 요소인 일으킨 생각(vitakka위딱까), 지속적 고찰(vicāra위짜라), 희열(pīti삐띠), 행복(sukha수카), 집중(ekaggatā에깍가따)을 다 가지는 선정입니다. 선정이 깊어질수록 거친 요소들이 하나씩 제거되는데 위딱까 · 위짜라가 떨어지면서 삐띠 · 수카 · 에깍가따만 가진 2선정이 되고, 여기서 또 삐띠가 떨어지면서 수카 · 에깍가따만 가진 3선정이 되고, 수카도 떨림이 있어 수카 대신 우뻭카(upekkha평정...)가 되면서 우뻭카 · 에깍가따를 가지는 4선정이 됩니다.
선정을 가지는 것이 부처님의 짜라나(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부처님이 색계 사선정 모두에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신통¹⁵⁾을 가집니다. 뿝베니와사누사띠(숙명통, 전생을 아는 지혜)가 생기면서 본인의 전생과 모든 중생들의 전생을 다 아십니다. 딥바짝쿠(천안통)가 생기면서 중생들이 죽어서 어디에 태어나는지를 다 아십니다. 딥바소따(천이통)가 생기면서 부처님은 듣겠다고 마음먹으면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잇디위다(신통변화)가 생기면서 마법사 같이 여러 가지를 마음대로 다 만들 수 있고 자기와 똑같은 사람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쩨또빠리야(타심통)가 생기면서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신통력이 나오는 것이 선정이라는 '짜라나'를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런 신통지를 가지고 싶다면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번뇌가 소멸되는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선정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아라한이 되는 마지막 지혜인 '아사와카야냐나(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지혜)'를 위해서는 위빳사나와 도 지혜가 꼭 필요합니다.
¹⁵⁾ 5가지 abhiññā(신통지)...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392~394, (사)법승 담마야나(2017)
세 번째 그룹은 '일곱 가지 바른 법'이라고 일컫는 7가지 법이다.
(삿따삿담마sattasaddhammā: 일곱satta + 바른sad/sat(=sant) + dhamma)
이 7가지를 살펴보기 이전에 sant에 대해서 살펴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다.
Sant는 ① 존재하는, 있는(being,existing), ② 진실된(true, real), ③ 선한(good)의 뜻을 가진다.
Sant는 산스크리트 어근 √as(있다, 존재하다)에서 파생된 것이다.
- √as + 분사 접미사 -ant → asant → 어두 a 탈락 → sant (sat, sad도 같은 어근 √as에서 유래)
- '있다, 존재하다' 라는 뜻의 빠알리어 동사 atthi 역시 산스크리트 asti에서 온 것이고, sant는 atthi의 현재분사 형태이다.
그런데 왜 단순히 '있다(to be, to exist)'라는 뜻이 '바른, 진실된, 참된'의 뜻으로 확장되는 걸까?
'있는 그대로'의 상태 자체가 어리석음과 전도된 견해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진실된 상태, 참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불교에서 말하는 통찰 지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지혜paññā: pra-(앞으로) + jñā (알다) → 꿰뚫어 안다 → '통찰지')
이러한 단어 변화 양상은 재미있게도 초기불교의 수행 관점과도 정확하게 부합한다.
초기불교 수행 방향은 모두 사실을 가리는 '빤냣띠'를 넘어 사실 그대로인 '빠라맛타'를 직접 알고 보려는 수행으로 향한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평소 이런 저런 이미지·모양·형상nimitta에 뒤덮여서 사실이 아닌 것을 인식saññā으로 뭉뚱그려 보던 것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몸과 말과 마음을 정화하고, 정화되어 강해진 마음의 힘으로 어리석음의 장막을 걷어내고 낱낱이 꿰뚫어 보기 위해 훈련하는 것이 초기불교의 명상 수행이다.
우리는 빠라맛타 단위의 사실 그대로를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뭉뚱그려 보고, 그래서 어리석음(moha)에 휩싸이고,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전도된(vipallāsa) 견해를 가진다.
우리가 진실, 진리라고 말하는 sacca 역시 마찬가지다.
√as(있다) → sat(있는 그대로의, 참된) → sat + 접미사 -ya → satya → sacca의 형태로 정착된 것이 sacca의 유래다.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허위가 아니고, 참된 것이다.
따라서 진실(거짓이 아님)이며, 사실 그대로의 진실(형성된 것들의 실제 모습, 있는 그대로의 이치)을 뜻하는 sacca라는 단어는 맥락에 따라 '진리'(궁극적인 진리 - 고성제)라는 의미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상카라들을 꿰뚫어 보시면서 이 모든 것들이 괴로운 성질을 가진 것들임을 아시며 네 가지 진리를 깨달으셨다.
궁극적 빠라맛타의 단위에서도 육체적 즐거움인 sukha, 정신적 즐거움인 somanassa와 같은 '즐거운 것'이 있다.
이것은 사바와 삿짜, 본성적 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똑같은 sacca라도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렇게 즐거운 것 역시 결국엔 변하게 되며, 모든 형성된 것들은 본질적으로 생멸의 현상에 지배받을 뿐이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모든 것은 괴로움의 무더기일 뿐이다"라는 성스러운 진실이자 진리를 깨닫는 것이므로 비로소 진실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성제ariya-sacca라고 불린다.
즉, sant의 어원을 통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실재, reality)'이 ① 추구해야 할 바른 법이자, 더 나아가 ② 깨달아야 하는 진리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삿따삿담마는 다음의 7가지이다.
- 지식suta: suṇāti(듣다)의 과거분사 형태 → '들은 것'
- 수따는 들어서 아는 '지식'이나 '정보'를 의미한다.
- 지식을 모으며 사견을 버리고 올바른 견해를 가지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수따(지식, 배움)이다.
- 이 때 모으는 지식은 이번 생에서도 이익이 되고 다음 생에서도 이익이 되는 것, 선하고 유익한 것이어야 한다.
- 지혜paññā: pra-(앞으로) + jñā (알다) → 꿰뚫어 안다 → '통찰지'
- 지식suta을 통해 지혜paññā가 생긴다. 정보를 얻고 체험을 하다보면 무언가를 확실하게 알게 된다.
- 문혜sutamayapaññā: suta들어서 + maya이루어진 + paññā지혜 → 듣고 배워서 아는 지혜, 지식으로 되는 지혜
- 사혜cintamayapaññā: cintā생각 + maya이루어진 + paññā지혜 →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추론해서 아는 지혜
- 수혜bhāvanāmayapaññā: bhāvanā수행 + maya이루어진 + paññā지혜 → 실천하여 직접 체득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지혜
- 지식으로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두 번째 단계(찐따마야빤냐)까지만 갈 수 있고 깨달음의 지혜까지는 가지 못한다.
-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진리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한다 → 첫 번째 단계 '수따마야빤냐'
- 그 진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숙고해본다 → 두 번째 단계 '찐따마야빤냐'
- 진리를 아는 만큼 믿고 따라 실천해 보니 자신의 체험이 진리와 똑같다 → 세 번째 단계인 '바와나마야빤냐'
- 지혜는 ① 옳고 틀린 것을 100%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 ② 깨어있는 동안 짓는 나의 말·행동·생각들의 선과 악을 아는 것, ③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을 구별해서 아는 것, ④ 원인에 따른 결과를 알거나 결과에 따른 원인을 찾아낼 줄 아는 것이다.
- 빤냐의 다른 용어는 삼마딧티, 정견이다. 바른 견해가 있으면 바르게 생각하고 → 바르게 말하고 → 바른 행동을 하고 → 바른 생계로 살아간다. 이렇듯 견해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 우리 모두는 행복을 원하지만, 그 행복의 수준은 지혜의 수준과 같게 된다. 따라서 지혜는 우리의 수준이고 재산과도 같다. 우리는 지혜로운 만큼 행복하고, 어리석은 만큼 괴롭다. 우리는 지혜로운 만큼 실수가 없고, 실수가 없는 만큼 삶은 편안해진다.
- 부처님의 가르침은 업과 과보를 아는 지혜로 시작해서 최상의 지혜인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로 끝난다. 최상의 지혜로 얻게 되는 것은 닙바나, 열반이다.
- 지식suta을 통해 지혜paññā가 생긴다. 정보를 얻고 체험을 하다보면 무언가를 확실하게 알게 된다.
- 확신saddha: śrad(믿음, 신뢰, 진심) + dhā(두다, 놓다, to put, to place) → '믿음, 신뢰, 확신'
- Saddha는 '맹목적 믿음'이 아니다.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 결과를 체험함으로써 생기는 경험 기반의 '신뢰'나 '확신'에 가깝다. 즉, 실제 체험을 통해 자라나는 '확신에 찬 믿음'을 의미한다.
- 영어로는 blind faith(맹목적 믿음)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faith(믿음)가 아니라, 내가 알고 믿기 때문에 자신감에 찬 confidence(확신)에 가깝다.
- 내가 해봤던 것이기 때문에 자신감으로 자기를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확실한 정보와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냥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고, 나의 지식과 지혜를 통한 앎을 바탕으로 하는 믿음이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사실에 대한 확실한 앎이 있어야 생긴다.
- 따라서 지혜가 생겨야 saddha가 생긴다. 아는 것을 믿는 것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의심하게 된다. 지혜로운 불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기의 앎에 자신감이 생기게 된다. 아는 만큼 믿는 것이다. 의심은 모를 때 생기는 것이다. 알면 의심이 사라진다.
- 그래서 알기 위해서 우리는 지식도 찾아야 되고, 지식에서 지혜를 만들어 내야 한다. 지혜로 알면 의심이 사라지고 믿음이 생긴다. 이것이 믿음의 의미다. 믿음은 지혜의 단계에 따라 점점 커진다. '수따마야빤냐'로 누구의 말만 듣고 생긴 믿음은 매우 약하다. '찐따마야빤냐'에서 생긴 믿음은 조금 약하다. 그러나 '바와나마야빤냐'로 수행해서 얻은 믿음은 아주 강력하다.
- 이렇게 듣고, 공부하고, 수행해서 수다원이 되면 의심이 사라진다. 수다원의 도 지혜가 생기면 의심이라는 번뇌가 싹 사라지며 불 · 법 · 승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생긴다. 이때는 부처님이 말씀해서가 아니라, 또 내가 숙고해서 추론해서가 아니라, 내가 직접 수행해서 수다원 도를 체득하니 부처님 말씀이 그대로 다 맞더라는 것을 스스로 확실하게 알게 된다.
- 이런 원리로 지혜가 번뇌를 죽인다고 말한다. 아는 만큼 믿고 알지 못하는 것은 믿지 못한다.
- 따라서 우리는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수행은 알려고 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게되면 잘못 알고 믿던 사견들이 사라지게 되어 있다.
- 부처님께서는 잘 따져보고, 잘 살펴보고, 체험해 보고, 그래서 본인이 진짜 알게 될 때 그때 믿고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제대로 믿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부하고, 생각해 보고, 직접 체험해 보고, 그래서 진짜 내 지혜로 이해하고 알게 되면 그제야 제대로 믿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때는 믿고 싶지 않아도 믿게 된다.
- 노력vīriya: 산스크리트 vīra(영웅, 용맹한 사람) → 산스크리트 vīrya(영웅적 힘, 용맹, 기개, 활력) → 정진, 노력, 분발
- 지식이 있어야 지혜가 생긴다 → 지혜로 아는 만큼 확신이 생긴다 → 믿음이 있는 만큼 노력vīriya 한다.
- 수행하지 않으면 노력이 없는 사람이다. 왜 수행하지 않을까? 수행법을 모르고, 모르니까 믿음이 없고, 믿지 않으니까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 "내가 1초라도 수행하면 그 1초의 수행 공덕이 엄청나게 크다. 루비보다 비싸고 다이아몬드보다 비싼 것이 수행하는 것이다. 수행하는 것은 돈이 몇 억 있는 것보다 더 가치가 많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1초라도 수행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믿는 만큼 노력하는 것이다.
- 노력은 자신의 지혜로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다. 지혜로 선과 악을 알고, 악을 피하면서 하지 않으려고 하고, 선을 찾아서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만약에 지혜가 없으면 내가 하는 일이 옳은지 틀린지, 좋은지 나쁜지를 모른다. 원인과 결과도 모른다.
- 나쁜 행위를 하지 않고 좋은 행위를 하는 것이 진짜 바른 노력이다.
- 마음챙김sati: 산스크리트 √smṛ(기억하다, to remember) → smṛti(기억, 회상) → sati → 지금의 대상(몸·마음·현상)을 잊지 않고 놓치지 않는 것,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주의, 지금 여기에 깨어있음, 현재를 기억하고 놓치지 않는 정신적 기능, 계속해서 놓치지 않고 주의 깊이 알아차리는 힘
- 사띠는 '지금, 여기'를 놓치지 않고 분명하게 인식하는 상태를 말한다. 사념처 수행에서는 몸·느낌·마음·현상에 대한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주의 집중(마음챙김)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 지금 경험하는 대상을 잊지 않고, 딴생각에 휩쓸리지 않으며,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힘을 말한다. 지속적인 주의력이다.
- 지식과 지혜가 좋아지면 사띠도 좋아진다. 즉,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잊지 않는 것이 사띠다. 내가 지혜를 가지고 스스로 노력하여 사띠를 예리하게 가질 때, 문제가 생기면 그 순간 바로바로 해결할 수 있다.
- 사띠로 잊지 않으면서 지혜로 이것이 옳은지 틀린지, 나쁜지 좋은지, 원인과 결과가 무엇인지를 안다. 매 순간 깨어 있으면서 잊지 않고 알게 된다. 쉽게 말하면 선업을 잊지 않는 것이 사띠다.
- 노력하는 자는 사띠가 좋아지고, 사띠가 좋아지면 불선업을 피하고 선업을 하려고 한다. 사띠는 선업을 잊지 않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선업을 잊고 있으면 오욕락에 빠져 불선업을 지으며 놀고 있게 된다. 먹고 자고 놀고 술 마시고, 남녀가 만나 즐기며, 이런 것에 빠져 산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사띠 없이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 사념처 수행을 할 때 사띠는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이라는 대상을 잊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이지만, 일상생활에서 사띠는 선업을 잊지 않는 것이다. 사띠는 선한 마음에서만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나쁜 일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 사띠가 아니고, 선업을 잊지 않고 하는 것이 사띠라고 알아야 한다.
- 부끄러움hirī: 산스크리트 hrī → '부끄러움, 도덕적 수치심'
- 두려움ottappa: apa-(떨어져서, 멀리, away) + trap(부끄러운 일) → '악행에 대한 두려움', '도덕적 공포(moral dread)'
- 히리와 옷땁빠는 주로 두 가지가 같이 묶여서 언급된다. 이 두 가지는 중생으로 하여금 악행을 피하게 함으로써 '세계를 지키는 것loka-pāla'이라고도 불린다.
- 히리는 악행을 했을 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부끄러움, 수치심이다. 옷땁빠는 악행을 했을 때 남들에게 비난받거나 나쁜 과보가 따를 것이라는 두려움에 가깝다.
- 이런 이유로 이 두 가지가 함께 갖추어질 때 사람은 스스로 악행을 멈추고 선을 실천하기 쉽다.
- 이것이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 하고 있으면 그때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생겨서 그 일을 피하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차차 좋은 사람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더 옳은 것만 하게 되고 나쁜 짓을 하지 않게 된다. 원인과 결과를 잘 알면서 하게 되니 좋은 것만 하려고 한다.
- 삿따삿담마는 서로서로 관계가 있다.
- 내가 지식을 쌓은 만큼 지혜가 올라간다.
- 지혜가 올라간 만큼 믿음이 올라간다.
- 믿음이 올라간 만큼 노력이 올라간다.
- 노력이 올라간 만큼 사띠가 좋아진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좋아진다.
- 그러면 그 다음에 또 한 단계 높은 지식이 쌓이게 된다. 지혜가 앞으로 가면 지식도 앞으로 가게 되어 있다.
- 책을 읽을 때 수행하기 전에는 1% 지혜로 읽어 1%만 알았는데, 다음에 수행하여 지혜가 성장한 후 다시 그 책을 보면 똑같은 책인데도 알게되는 것이 더 깊고 많아짐을 느낄 수 있다.
- 그렇게 올라 가다가 맨 꼭대기에 서면 그것은 최고의 지혜인 도와 과의 깨달음의 지혜가 된다.
짜라나의 세 번째 묶음에는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삿따삿담마(sattasaddhammā좋은 사람의 일곱 가지 법)라고 합니다. 삿따(일곱 가지), 삿담마=사+담마, 사가 무슨 뜻입니까? 산또입니다. 산따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평화롭고 고요하고 고귀하기 때문에 산따라고 합니다. 열반의 맛을 산띠수카라고 하지요? 산따의 법을 삿담마라고 합니다. 산또담모에서 삿담모가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번뇌가 꺼져 버렸기 때문에 속이 시원하고 번뇌의 열이 하나도 없는 분, 산따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이 최고로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 좋은 사람의 법이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지식(수따), 지혜(빤냐), 믿음(삿다), 수치심(옷땁빠), 양심(히리), 노력(위리야), 그리고 잊지 않음 혹은 알아차림 혹은 기억하고 있음(사띠)입니다.
이 일곱 가지가 좋은 사람의 법인데 여러분들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이 일곱 가지를 키우십시오...
⑨ 수따(지식)
수따(suta)는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인데 지식이나 정보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에는 책이나 컴퓨터, 녹음기가 없었기 때문에 공부하려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잘 기억하여 배우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종이 같은 것을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시대임을 생각해 보면,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이 수따 하나뿐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을 모으며 사견을 버리고 올바른 견해를 가지려고 항상 애쓰고 있는 것이 수따(지식, 배움)입니다.
...지식은 아주 유익하고 올바른 것이라야 합니다. 세상이 긍정적으로 동의하는 것, 돈이 생길 수 있는 것, 건강에 좋은 것, 모두가 행복해지는 이런 정보들을 내가 모아야 합니다. 이번 생에도 쓸 만하고 다음 생에서도 이익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올바른 정보와 지식을 모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많습니다. 지식이 기본입니다.
...종교를 살펴보면 설립자의 수준에 따라서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설립자의 지식이 약하면 그 종단의 가르침도 조금 낮은 법이 될 수 있고 설립자가 아주 우수하면 그 종단의 가르침이 아주 훌륭한 가르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법을 배우고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⑩ 빤냐(지혜)
지식을 통해서 빤냐(paññā지혜)가 생깁니다. 우리가 정보를 얻으면 마음속에 확실해지는 뭔가가 있는데 그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담마야나 선원에 와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정보를 찾습니다. 정보에 따라 길을 알고 한 번 찾아옵니다. 그 다음부터는 길을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쉽게 찾아옵니다. 그렇게 확실하게 아는 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지식에서 생깁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보고 들었던 정보나 체험들이 다 지식이 됩니다... 누적되면서 거기서 얻어낸 지혜들이 항상 삶에서 나를 조절하고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배웠던 많은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통해서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란 무엇을 아는 것인가요? 지혜의 정의는 첫째, 옳고 틀린 것을 아는 것입니다. 정치도, 사회도, 개인사, 모든 일에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렸다, 이렇게 하면 맞고 저렇게 하면 틀린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틀리게 판단하고도 모릅니다. 그냥 무심코 해버리지요. 제대로 확실하게 "이것이 맞다."라고 100% 알고 하지는 않습니다. 확실하게 알고 판단하는 것이 지혜의 힘입니다. 내가 확실하게 알고 뭔가를 했다면 거기에 나의 지혜가 있습니다... 지혜는 바르고 틀린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선과 악을 아는 지혜입니다. 깨어있는 동안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은 항상 선이 되거나 악이 됩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때는 푹 자고 있을 때입니다. 선악을 모르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세 번째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서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일이고 저렇게 하면 나쁜 일이라고 할 때 그것을 아는 것도 지혜입니다.
네 번째,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떤 원인을 하게 되면 그 결과를 알아야 하고, 어떤 결과를 보게 되면 그 원인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옳고 틀린 것을 아는 지혜, 선과 악을 아는 지혜, 좋고 나쁜 것을 아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라고 정의를 내리면 모든 진실은 그 네 가지 속에 다 들어갑니다. 네 가지 지혜의 정의를 잘 알고 난 다음 어떻게 살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원하는데, 그 행복의 수준이 지혜의 수준과 같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수준이고 재산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만큼 행복하고 어리석은 만큼 괴롭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만큼 실수가 없고 실수가 없으면 그만큼 삶이 편안해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업과 과보를 아는 지혜로 시작해서 끝으로는 최상의 지혜인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입니다. 최상의 지혜로 얻게 되는 것이 닙바나(열반)입니다.
빤냐를 다른 용어로 삼마딧티(정견)라고 합니다... 바른 견해가 있으면 바르게 생각할 줄 압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알면 바른 말을 하게 되고 바른 행동을 하게 되고 바른 생계로 살아갑니다. 견해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지혜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수따마야빤냐(sutamayapaññā문혜, 듣고 배워서 아는 지혜)입니다. 수따(들음), 마야(됨). 지식으로 되는 지혜가 '수따마야'입니다. 이것은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음으로 알게되는 지혜인데 아주 낮은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찐따마야빤냐(cintamayapaññā사혜), 마음으로 생각하고 추론해서 아는 지혜입니다. 생각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바르고 그른 것, 선과 악을 생각하면 바로 알게 되는 것을 찐따마야라고 합니다. 수따마야 보다 찐따마야가 수준이 높습니다. 찐따마야에는 누가 가르쳐 준 것을 내가 계발해서 아는 것도 있지만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생각해서 아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찐따마야도 수따마야의 바탕이 없다면 될 수 없습니다. 찐따마야빤냐는 지식(knowledge)과 체험(experience)에서 나옵니다.
세 번째는 바와나마야빤냐(bhāvanāmayapaññā수혜), 수행으로 직접 체득하여 깨달음으로 얻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제일 높은 단계의 지혜입니다.
여기서 지식에서 가는 지혜는 두 번째 단계까지만 갈 수 있고 깨달음의 지혜까지는 가지 못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진리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 단계 '수따마야빤냐' 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숙고해 봅니다. 그것이 두 번째 단계 '찐따마야빤냐' 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아는 만큼 믿고 따라 실천해 보니 자신의 체험이 진리와 똑같습니다. 그것이 세 번째 단계인 '바와나마야빤냐' 입니다.
이와 같이 아주 기본적인 빤냐(지혜)는 수따(들음, 지식)에서 나옵니다... 문혜만 엄청나게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혜와 수혜로 많이 가야 우리가 높은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교육 체계에 대해서 생각해야 될 문제점들이 그런 것입니다.
⑪ 삿다(믿음)
지혜가 생겨야 삿다(saddha믿음)가 생깁니다. 아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의심하게 됩니다... 믿음을 영어로 faith(믿음) 또는 confidence(확신)라고 하는데 후자가 더 맞는 표현입니다. Faith(믿음)에는 무조건 믿는 blind faith(맹목적 믿음)도 있는데 confidence(확신)라고 할 때는 자신감도 들어 있습니다. 자신감이란 내가 알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해봤던 것이기 때문에 자신감으로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확실한 정보와 체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냥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고, 나의 지식과 지혜를 통한 앎을 바탕으로 하는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사실에 대한 확실한 앎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상대방이 믿거나 말거나 그것은 본인의 선택으로 두고,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항상 원인을 설명하십니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각자의 몫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잘 따져보고 잘 살펴보고 또 체험해 보고, 그래서 본인이 진짜 알게 될 때, 그때 믿고 따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불교는 진짜 열린 마음(open mind)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것과 공부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공부하며 생각해 보고, 직접 체험해 보고, 그래서 진짜 내 지혜로 이해하고 알게 되면, 믿고 싶지 않아도 믿게 됩니다.
지혜로운 불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기의 앎에 자신감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아는 만큼 믿는 것입니다... 의심이라는 것은 모를 때 생기는 것입니다. 알면 의심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알기 위해서 우리는 지식도 찾아야 되고, 지식에서 지혜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지혜가 아는 것입니다. 알면 의심이 사라지고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믿음의 의미입니다. 믿음은 지혜의 단계에 따라 점점 약해집니다. '바와나마야빤냐'로 수행해서 얻은 믿음이 제일 강력합니다. 그러나 '찐따마야빤냐'에서 생긴 믿음은 조금 약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수따마야빤냐'로 누구의 말만 듣고 생긴 믿음은 매우 약합니다. 이와 같이 지혜의 정도에 따라서 믿음의 크기가 다릅니다.
...수다원이 되면 의심이 사라집니다... 수다원의 도 지혜가 생기면 의심이라는 번뇌가 싹 사라지는데 그 이유가 불 · 법 · 승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부처님이 말씀해서가 아니라, 또 내가 숙고해서 추론하는 것도 아니라, 내가 직접 수행해서 수다원 도를 체득하니 부처님 말씀이 그대로 다 맞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라고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지혜가 번뇌를 어떻게 죽이느냐를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확실하게 알았으면 의심이 싹 사라집니다. 의심은 믿지 못하는 번뇌입니다. 그 의심을 수다원 도 지혜가 잘라버렸습니다.
또 수다원은 지혜가 확실해지니까 사견이 사라집니다. 지혜가 없어서 가지게 되는 잘못된 견해들을 사견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지혜가 확실하니까 잘못된 것들이 살 수가 없습니다. 해가 떴습니다. 어둠이 있을 수 있을까요?... 지혜가 있으면 어리석음이 남김없이 사라집니다... 아는 만큼 믿고 알지 못하는 것은 믿지 못 합니다. 우리는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수행은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모시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보면서 있는 사실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게되면 잘못 알고 믿던 사견들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⑫ 히리(부끄러움)
⑬ 옷땁빠(두려움)
히리(hirī부끄러움), 옷땁빠(ottappa두려움). 부끄러움은 나쁜 짓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좋은 일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두려움은 나쁜 일 하는 것을 무서워하고, 좋은 일 못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겁니다... 이렇게 나쁜 짓을 했다면 부끄러워하고 무서워해야 되고, 좋은 일을 못 하면 그것도 부끄러워하고 무서워해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사람의 법입니다.
...내가 아는 것에서 벗어나면 양심이 알고 지혜가 압니다. '이것은 틀렸다, 저것은 맞다.'라고 알면서 내가 틀린 것을 하고 있으면 양심이 찔리고 부끄럽게 됩니다. 이것이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 하고 있으면 그때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생겨서 그 일을 피하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차차 좋은 사람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더 옳은 것만 하게 되고 나쁜 짓을 하지 않게 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잘 알면서 하게 되니 좋은 것만 하려고 합니다...
⑭ 위리야(노력, 정진)
지식이 있어야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아는 만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는 만큼 노력(vīriya정진)합니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노력이 없는 사람이지요? 왜 수행하지 않을까요? 수행법을 제대로 모르고, 모르니까 믿음이 없고, 믿지 않으니까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1초라도 수행하면 그 1초의 수행 공덕이 엄청나게 크다. 루비보다 비싸고 다이아몬드보다 비싼 것이 수행하는 것이다. 수행하는 것은 돈이 몇 억 있는 것보다 더 가치가 많다.' 그런 믿음이 있으면 노력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1초라도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만큼 노력이 있는 것입니다.
노력이 좋아야 합니다. 노력은 자신의 지혜로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 선과 악을 알고, 악을 피하면서 하지 않으려고 하고 선을 찾아서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만약에 지혜가 없으면 내가 하는 일이 옳은지 틀린지, 좋은지 나쁜지를 모릅니다. 원인과 결과도 모릅니다... 나쁜 행위를 하지 않고 좋은 행위를 하는 것이 진짜 바른 노력입니다.
⑮ 사띠(잊지 않음, 알아차림, 기억하고 있음)
노력이 좋은 만큼 사띠(sati)가 좋아집니다. 사띠가 잊지 않음이라고 할 때 무엇을 잊지 않음인가요?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좋아지면 사띠도 좋아집니다... 지혜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갖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혜를 가지고 스스로 노력하여 사띠를 예리하게 가져야 문제가 생길 때 그 순간 바로바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아는 것입니다.
사띠는 '잊지 않음' 입니다. 사띠로 잊지 않으면서 지혜로 이것이 옳은지 틀린지, 나쁜지 좋은지, 원인과 결과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말하고 행동할 때, 이 원인을 하면 이런 결과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이런 결과가 나타나면 이런 원인이 있었다고 매 순간 깨어 있으면서 잊지 않고 알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선업을 잊지 않는 것이 사띠입니다.
노력이 좋은 사람이 사띠가 좋은 사람입니다. 노력하는 자는 사띠가 좋아지고, 사띠가 좋아지면 불선업을 피하고 선업을 하려고 합니다... 사띠는 선업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선업을 잊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욕락에 빠져 불선업을 지으며 놀고 있겠지요? 먹고 자고 놀고 술 마시고, 남녀가 만나 즐기며, 이런 것에 빠져 살고 있겠지요? 그렇게 사는 것이 사띠 없이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사념처 수행을 할 때 사띠는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이라는 대상을 잊지 않음이지만, 일상생활에서 사띠는 선업을 잊지 않음입니다... 사띠는 선한 마음에서만 생깁니다... 그래서 나쁜 일을 기억하고 잊지 않음이 사띠가 아니고, 선업을 잊지 않고 하는 것이 사띠라고 알아야 합니다.
...좋은 사람의 법 일곱 가지는 서로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나선형처럼 차차 돌고 돌아 올라갑니다. 시작부터 목적지를 욕심내면 안됩니다. 시작부터 조금씩, 조금씩 내가 지식을 쌓은 만큼 지혜가 올라갑니다. 지혜가 올라간 만큼 믿음이 올라가고, 믿음이 올라간 만큼 노력이 올라가고, 노력이 올라간 만큼 사띠도 좋아지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좋아지고, 그러면 그 다음에 또 한 단계 높은 지식이 쌓이게 됩니다. 지혜가 앞으로 가면 지식도 앞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 수행하기 전에는 1% 지혜로 읽어 1%만 알았는데, 다음에 수행하여 지혜가 성장한 후 다시 그 책을 보면 똑같은 책인데도 알게되는 것이 더 깊고 많아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올라 가다가 맨 꼭대기에 서면 그것은 최고의 지혜인 깨달음의 지혜가 됩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383~411, (사)법승 담마야나(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