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아비담마

봉축 법문에서의 의문 - '질투의 반대는 연민이 맞는가?'

Rihan 2024. 6. 1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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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부처님 오신 날 향천선원의 봉축 법문은 아신 빠라구 스님이 해주셨다.

부처님 오신날에 맞춰 여법한 법문을 설해 주시는 스님 덕분에 필자 역시 법문을 들으며 기쁘고 고무되는 자리였다.

 

 

 

 

다만 법문을 들으며 한 대목에서 필자에게 의문이 떠올랐는데, 스님이 "연민을 통해 질투가 사라진다"라고 말씀하신 대목이다.

필자는 질투의 반대를 연민(karuṇā)이 아니라 함께 기뻐함(mudit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선원장님을 통해 스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드렸다.

"봉축법회에서 스님이 연민(karuṇā)에 대해 말씀하실 때 남의 성공에 대해 질투(issā)하는 것을 사라지게 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 역할은 연민이 아니라 함께 기뻐함(muditā)의 역할이 아닌지요?

연민이 주로 불행한 중생의 고통을 가까운 원인으로 하여 그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고, 함께 기뻐함이 주로 다른 중생의 성공을 가까운 원인으로 하며 그 성공을 질투하지 않고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여쭤봅니다."

 

 

그리고 선원장님을 통해 다음과 같이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질투와 인색한 마음은 성냄(도사)의 뿌리입니다. 대상이 잘 되고 있을때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없거나 약한 것을 인색함이라 예를 들 수가 있어요.

예를 들면 내가 질투하던 대상이 반대로 불쌍하거나 안타까운 대상이 되면 질투했던 마음이 사라지면서 도와주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므로 연민은 질투하는 것을 사라지게 합니다.

라고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해되시겠는지요?

 

 

해당 답변에 대해서 여전히 필자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네 스님이 설명해 주시는 취지는 이해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명확한 설명이라고 느껴지진 않습니다.

예를 들어 4가지 보호명상에서 붓다눗사띠 명상은 신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부처님을 생각함으로써 자애 명상처럼 자애심을 고취시키는 것도 동시에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눗사띠 명상은 여전히 신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주된 역할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일반적으로 타인의 성공을 대상으로 하고 질투의 직접적인 반대 심소법은 무딧따라고 설해집니다. 스님이 말씀하시는 연민으로 질투를 가라앉히는 것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더라도) 연민심이 고취되었을 때 발생하는 간접적인 효과와 설명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정도론이나 아비담마를 설명하는 제가 본 모든 책들에서는 질투의 반대말은 무딧따라고 설명합니다. 스님의 설명은 다소 간접적이라고 느껴지는데, 청정도론의 설명처럼 타인의 성공과 질투, 무딧따의 관계를 이해하면 타인의 성공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상이 불쌍해지는 것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곧장 그 자리에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선업을 기뻐하는 것으로 마음을 낼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 제가 선원에서 들었던 법문들과 인터뷰 때 들었던 답변들을 되짚어보면, 우 실라 사야도께서도 역시 질투의 반대는 무딧따라고 설해주십니다. 이번 봉축법회 이후 이 부분에 대해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나 싶어 개인 인터뷰 때 사야도께 여쭤보니 아신 빠라구 스님이 어떤 의도로 설명하신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원래는 질투의 반대는 연민이 아니라 무딧따라고 설명해 주시더라구요.

이 부분은 사실 제가 궁금했다기 보다는 선원 법우님들의 아비담마 공부에 장애가 될까 싶어 제가 이해한 바를 법문을 설해주신 아신 빠라구 스님께 검증받고, 검증이 된다면 법우님들에게도 알려주려 했던 것이 제 의도였는데요. 불필요한 말이 너무 길어지는 것이거나, 제가 승가에 불선업을 짓는 것이라면 여기서 더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갈까요?

 

 

이 답변에 대한 회신으로 선원장님이 카페에 올리는 것은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이렇게 글로써 필자의 견해를 남긴다.

 

아래 서술한 견해는 필자가 아신 빠라구 스님의 법문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단편적인 부분을 확대 해석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셔서 해당 견해가 적절한지 여부를 받아들이시길 바란다.

 

 

1.

마음과 마음부수를 이해하는 데 핵심은 그것의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무량심의 대상은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중생들이다.

 

연민과 함께 기뻐함은 무량한 중생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같지만, 그 대상이 '어떤' 중생들이냐는 것에서는 다르다.

²⁸³⁾ 함께 기뻐함(muditā)을 뜻한다. 연민하는 대상과 기뻐하는 대상은 다르기 때문에 연민(비)과 함께 기뻐함(희)은 함께 일어날 수 없다.

...(2) 질투와 인색과 후회는 따로따로 가끔 일어난다.
...(5) 연민과 함께 기뻐함은 따로따로 가끔 일어난다.

[청정도론 XIV]: "133. ...연민, 함께 기뻐함,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의 절제(virati), 말로 짓는 나쁜 행위의 절제, 그릇된 생계의 절제 - 이 5가지는 고정되지 않은 것(aniyata)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끔 일어나고, 또 일어나더라도 이들은 서로 같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즉 3가지 절제와 2가지 무량의 5가지는 함께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3. '연민'과 '함께 기뻐함'은 개별적으로 적용이 되어야 한다: 즉 연민은 고통받는 중생을 대상으로 하고, 함께 기뻐함은 행복한 중생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연민은 동정심의 형태로 나타나고, 함께 기뻐함은 기쁨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둘은 한 찰나의 마음에서는 같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제5선을 제외한 색계의 마음에서는 따로 일어나고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

...2. 적의와 함께한 마음: ...이 중에서 마지막의 세 가지인 질투, 인색, 후회는 한 심찰나에 함께 존재할 수 없으며 이 셋이 다 존재하지 않고 단지 성냄만 있는 경우도 있다.

-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p.292~305, 초기불전연구원(2017)

 

연민의 대상은 무량한 중생들 중에서도 불행한 중생들, 고통받는 중생들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연민의 대상은 타인의 고통이다. 따라서 연민은 동정심의 형태로 나타난다.

 

함께 기뻐함의 대상은 무량한 중생들 중에서도 행복한 중생들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함께 기뻐함의 대상은 타인의 성공이다. 따라서 함께 기뻐함은 기뻐함의 형태로 나타난다.

 

마음부수 중에서도 한 심찰나에 같이 일어날 수 있는 심소법이 있고, 아닌 심소법이 있다.

 

한 심찰나에 같이 일어날 수 없는 심소법은 무엇인가? '대상'이 다른 심소법이다.

마음부수의 정의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며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 동일한 토대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대상이 다른 마음부수가 한 심찰나에 서로 함께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연민과 함께 기뻐함은 그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한 심찰나에서 반드시 따로 일어나고,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은 질투와 인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질투의 대상은 타인의 성공이다. 이것을 시기하고 혐오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인색의 대상은 자기의 성공이다. 이것을 숨기려고 들기 때문에 움츠리고 속이 쓰린 형태로 나타난다.

 

연민과 함께 기뻐함처럼, 질투와 인색 역시 그 대상이 다르다.

따라서 질투와 인색 역시 한 심찰나에 함께 일어날 수 없다. 반드시 따로 일어난다.

 

 

2.

그렇다면 '대상'의 측면에서 스님의 말씀을 다시 살펴보자.

 

스님은 "대상이 잘 되고 있을 때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질투의 대상이 '타인의 성공'임을 상기한다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9) 질투(issā): 

'질투'로 옮긴 issā는 √īrṣ(to be jealous)의 여성명사이다. 초기경에서는 대부분 다음의 macchariya(인색)와 함께 나타난다. Issā는 남의 잘된 것을 시샘하는 것이고 macchariya는 나의 잘된 것을 나누어가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청정도론 XIV]: "172. 질투함이 질투(issā)이다. 이것은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는 특징을 가진다. 좋아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혐오함으로 나타난다. 타인의 성공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족쇄(saṁyojana)로 보아야 한다."

-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p.249~250, 초기불전연구원(2017)

 

질투의 대상은 '타인의 성공'이다.

이것을 시기하고 혐오하며 해로운 업을 짓는다.

 

우리가 초기불교에서 배우는 수행의 기법은 해로운 법에 대해서 반대되는 법을 닦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적의에 대해서 자애를 닦고, 게으름에 대해서 죽음을 거듭 생각하며, 애욕에 대해서 부정관을 닦는다.

 

타인의 성공에 대해서 우리는 질투함으로써 해로운 업을 짓는다.

그 과보는 삶의 과정에서 괴로움을 겪거나 파멸처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우리는 '타인의 성공'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하여 유익한 업을 지을 수 있는가?

95. 함께 기뻐함의 특징은 [다른 이의 성공을] 기뻐함이다. 질투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따분함(arati)을 제거함으로 나타난다. 중생들의 성공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따분함을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세속적인 희열로] 왁자지껄한 웃음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 대림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2권 p.178, 초기불전연구원(2004)

 

'함께 기뻐함(muditā)'으로써 질투를 피하고 유익한 업을 지을 수 있다.

 

'타인의 성공'이라는 똑같은 대상에 대해 질투와 함께 기뻐함은 완전히 대척점에 선다.

반대되는 법으로써 기능하는 것이다.

 

이는 청정도론의 4가지 정의를 하나씩 직접적으로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Muditā Issā
특징 타인의 성공을 기뻐함 타인의 성공을 시기함
역할 질투하지 않음 좋아하지 않음
나타남 따분함을 제거함
(= 혐오를 제거함 - 필자 주)
혐오함
가까운 원인 중생들의 성공
(= 타인의 성공 - 필자 주)
타인의 성공

 

함께 기뻐함과 질투는 똑같이 '타인의 성공'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그 똑같은 대상에 대해 Muditā는 기뻐하고, Issā는 혐오한다.

 

여기서 '따분함(arati = a+rati)'을 필자는 '싫어함, 불만족, 혐오'로 번역한다.  여기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룬 바 있다.

Rati는 '좋아함, 애착', a는 부정의 뜻을 가진 접두어이기 때문에 Arati를 따분함이 아니라 '혐오, 싫어함'으로 번역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즉, 따분함을 제거한다는 것은 혐오를 제거한다는 것이므로 함께 기뻐함의 '나타남'에 대한 설명 역시 질투의 완전한 대척점에 있다.

청정도론은 '타인의 성공에 대한 혐오를 가라앉힐 때' muditā를 성취한다고 부연한다.

 

정명스님 역시 필자와 비슷하게 arati를 '싫어함'으로 번역하고 있다.

함께 기뻐함(muditā)

함께 기뻐함을 의미하는 무디따(muditā)는 다른 이의 행운에 대하여 감사해하는 것입니다... 성품을 이해하려면 무디따(muditā따에 대한 청정도론(IX, 95)의 설명을 참고하는 것이 좋은데 여기서는 '기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더불어 기뻐함(gladness)의 특징은 (다른 이의 성공에 대하여) 기뻐함이다. 타인에 대하여(타인의 부귀영화를 - 역자) 시기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타인의 번성을 - 역자) '싫어함(arati)을 제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까운 원인은 타인의 성공을 보는 것이다. 따분함(혹은 싫어함)을 가라앉히면 성공하고 [세속적인 희열로써] 왁자한 웃음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앗타살리니의 정의도 이와 비슷합니다. 함께 기뻐함의 역할 혹은 작용은 질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질투와 함께 기뻐함의 가까운 원인은 두 가지 모두 타인의 성공입니다. 질투는 성냄에 뿌리를 둔 해로운 마음(dosa-mūla-citta)과 함께 일어납니다. 청정도론(IX, 100)에 함께 기뻐함의 먼 적은 성냄이나 따분함이라 하였습니다. 만약 현명한 주의가 있다면 질투 대신에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함께 기뻐함의 가까운 적은 '세속적 삶에 기초한 기쁨'입니다. 이것은 세속적 삶과 관련된 기쁨인데 감각적으로 즐거운 대상에 대하여 취착할 때 일어나는 기쁨이지요. 청정도론에 '왁자한 웃음이 일어나면 함께 기뻐함은 실패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탐욕과 관련된 행복이기에 그렇습니다... '당신의 정원은 참으로 아름답군요.'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의 번영을 진정으로 인정할 때에는 말이지요. 하지만 즐거운 대상에 대한 탐욕의 마음이 함께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뻐함의 순간에는 유익한 마음과 함께하는 고요함도 함께합니다. 명상주제로써 함께 기뻐함을 이용하여 선정에 들 수 있습니다...

이 수행은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함입니다. 이 함께 기뻐함의 대상은 제한이 없는 무제한의 중생들입니다. 장부에 성스러운 네 가지 머묾(사범주)을 닦는 법이 나옵니다.

네 가지 '무량(appamaññā)'이란, - 여기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세상의 사분의 일을 자애... 연민... 함께 기뻐함... 평온으로 충만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분의 이를, 그리고 사분의 삼을, 그렇게 사분의 사를 충만하게 한다. 그리하여 온 세계를, 위, 아래, 주위 그리고 모든 곳에(있는 중생들을 대상으로 - 역자) 계속해서 마음으로부터 충만하게... 멀리 있는 곳... 아주 크게 증장시켜서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곳까지 채워나간다. 성냄과 악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함께 기뻐함은 일상에서 닦아 나갈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성공을 보게 되면 이때가 함께 기뻐함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만약 질투하는 마음의 불이익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누군가의 건강함을 혹은 누군가의 성공 그리고 누군가 칭찬이나 명예를 받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들의 성공을 진정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장부에서 붓다는 시갈라(필자 주 - 「교계 싱갈라 경」의 '싱갈라'를 의미한다.)에게 일상에서 도움이 되는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의 특징들에 관해 조언합니다.

당신의 불행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는다. 당신의 번영에 대하여 함께 기뻐한다. 누군가 당신에 대하여 나쁘게 말한다면 그 자를 멀리한다. 당신을 칭찬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한다.

좋은 친구는 질투하지 않고 성공을 함께 기뻐합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좋은 친구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질투한다면 그것은 참된 우정이 아닙니다. 한편 질투심이 강하면 함께 기뻐함을 증장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습관적으로 질투를 해 왔기 때문에 누군가 칭찬을 받거나 혹은 다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보게 되면 자동으로 질투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질투의 마음이 거칠지 않고 미세하더라도 그러한 마음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은 유익합니다.

만약 바른 지혜가 있다면 누군가의 성공은 '그 사람'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고 단지 그 사람이 지은 '업'에 의하여 조건 지워진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질투는 쓸모가 없습니다. 바른 지혜가 무르익어 존재하는 사람도 없고, 사물도 없고, 다만 일어나서는 사라지는 나마(nāma)와 루빠(rūpa)만이 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점차적으로 질투하는 마음을 덜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질투는 '질 낮은 족쇄(saṁyojana)' 가운데 하나로 수다원이 되면 제거가 됩니다. 마음속에서 더 이상 질투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함께 기뻐함의 조건들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하나의 성품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수다원은 마음이 통하는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뻐함은 즐거운 느낌과는 다릅니다. 무디따(muditā)를 함께 기뻐함 혹은 기쁨으로 번역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덤한 마음으로 다른 이의 성공에 감사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정명스님 옮김, 『쩨따시까』 pp.501~505,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함께 기뻐함(muditā)의 '기뻐함'이 즐거운 느낌과는 다르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① 개념적으로는 '기뻐함'이라기보다 '감사함'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타인의 성공이나 행운에 대하여 감사해하는 것이 muditā이다.

② 아비담마적으로는 말 그대로 기쁨이 함께하지 않은 평온 느낌의 마음에서도 함께 기뻐함은 일어난다고 곧이곧대로 이해할 수도 있다.

③ 더 나아가 다른 법과 비교해보자면, muditā의 기뻐함은 대상을 탐착하여 기뻐하는 세속적인 욕심과 다르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100. 재가에 의지한 기쁨이 더불어 기뻐함의 거룩한 마음가짐의 가까운 적이다. 성공을 보는 것이 [더불어 기뻐함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재가에 의지한 기쁨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전승되어 온다. "눈으로 인지하는 형상들이 있으니, 원하고, 좋아하고, 매력 있고, 마음을 끌며 세속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것들을 획득한 것을 획득한 것이라고 여기거나, 이미 지나갔고 소멸되었고 변해버린 이전에 획득한 것을 기억하면서 기뻐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러한 기쁨을 재가에 의지한 기쁨이라 부른다.(M.iii.217)"

- 대림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2권 p.180, 초기불전연구원(2004)

 

우 실라 사야도께서는 세속적인 욕심과 muditā는 가깝게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청정도론에서는 세속적인 욕심은 muditā의 가까운 적이라고 설한다.

 

청정도론에서는 muditā에 대해 "[세속적인 희열로] 왁자지껄한 웃음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고 한다.

 

세속적인 희열, 재가에 의지한 기쁨은 이 성공이라는 대상에 대해 원하고, 애착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 성공에 대해서 원하고 좋아하여 애착을 일으킨다면 욕심의 마음이 된다.

함께 기뻐함의 '기뻐함'은 여기에 현혹되지 않는 무량한 마음이다.

성공의 인과관계를 이해하기에 기뻐한다. 동시에 그것 역시 생멸하는 정신과 물질일 뿐이라는 한계도 이해한다.

  • 누군가의 성공은 '그 사람'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지은 선업이라는 씨앗이 이제야 수확되는 것이다. 선업을 짓고 그것의 과보를 받는 것은 찬탄할 만한 일이다.
  • 그러나 이 성공 역시 다만 일어나서는 사라지는 나마(nāma)와 루빠(rūpa)일 뿐이다. 즉, 이 성공은 조건지워진 것으로 영원히 머물 수 없으며, 이것을 경험하는 사람도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항상하는 실체나 자아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즐거운 대상을 경험하는 자아나 즐거운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과 같은 실재는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설명을 참고할 수 있다.

10. Muditā 더불어 기뻐함
Sympathetic joy

남의 성공, 행복, 번영을 함께 기뻐해주는 감정을 무디따muditā라고 한다. 사악한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인기를 누리고 승진을 하고 재산, 교육, 지위 등을 얻으면 시기, 질투, 탐욕 등이 생겨난다. 하지만 고귀한 마음의 소유자는 그러한 사건을 보거나 들으면 기뻐하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들은 삶을 이렇게 숙고한다. '아! 그들은 과거에 선업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지금 재산, 권력, 성공, 인기를 얻는구나. 이제야 자신들의 정당한 수확을 하고 있구나!' 이것이 진정한 더불어 기뻐함이다.

거짓된 더불어 기뻐함
거짓된 더불어 기뻐함muditā이란 자신의 친척과 친구의 행복을 극도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기쁨은 더불어 기뻐함과 닮았지만 사실은 거짓된 더불어 기뻐함이다. 눈물이 흐를 정도까지 이르는 그러한 극도의 기쁨은 갈애taṇhā와 탐욕lobha과 결부된 희열의 정신적 기쁨piti-somanassa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기쁨과 희열을 거짓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데, 그 가운데는 진정한 더불어 기뻐함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더불어 기뻐함muditā을 보내는 방법
무디따muditā는 남들의 성공, 번영, 성취를 함께 기뻐해주는 것으로 이타적인 기쁨이다. 이는 남들이 자신들의 재산, 지위, 진보, 행복, 명성 등을 계속해서 누렸으면 하는 진실한 바람이다. 더불어 기뻐함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이미 성취한 성공과 행복을 계속해서 누리기를'이란 의미의 빠알리어 게송 'yathāladdha sampattiyo mā vigacchantu'를 의식적으로 염송해야 한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행복을 접하면 더불어 기뻐함을 방사해야 한다. 빠알리어 게송을 그냥 염송만 해서는 진정한 더불어 기뻐함이 생기지 않는다.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p.113~117, 법보시자 위데히(2023)

 

 

타인의 성공에 대해 질투하는 것은 스스로를 파멸시킬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질투로 인해 파멸하겠지만, 내가 질투하는 대상은 내 질투에 대해 아무런 영향 없이 오히려 더 번영하고 성공할 것이다.

 

질투는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고 혐오한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혐오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은 오히려 그 질투(issā)라는 심소법 그 자체이다.

9. Issā 질투
Envy

...질투하고 중상모략을 함은 스스로를 망칠 뿐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질투하는 사람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 평가한다. 질투하는 사람은 윤회saṁsāra를 하면서 사악처에 떨어지겠지만 정작 질투를 받는 사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질투issā는 여러분 모두가 혐오하고 제거해야 하는 해로운akusala 마음부수이므로 그것을 혐오하고 제거해야 한다.

... 남을 중상하고 질투하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은 실제로는 정반대의 결과를 맞이한다. 즉 스스로 어려움만 당하고 정작 자신이 중상하고 질투하고 비아냥거렸던 사람은 더 잘 산다.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p.73~74, 법보시자 위데히(2023)

 

 

성내고 질투하는 것은 불쾌하고 더러운 느낌만을 스스로에게 남길뿐이다.

우리는 질투심의 불이익을 앎으로써 스스로 자연스럽게 질투를 자제하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질투의 반대인 함께 기뻐함(muditā)을 일상에서, 명상으로 닦아 점차적으로 이것을 우리의 습관과 성품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

물론, 질투의 완전한 제거는 위빳사나를 통해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여 오염원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질투(issā)

...우리는 습관처럼 성을 내왔기 때문에 성냄은 오문과 의문인식과정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성냄에 뿌리한 마음은 언제나 불쾌한 느낌을 동반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다른 이들이 즐거운 대상을 경험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일어납니다... 질투는 언제나 불쾌한 느낌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타난 대상을 좋아하지 않는 성냄에 뿌리한 마음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쾌한 느낌을 싫어하는 것만으로는 유익한 마음을 일으키는데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특징과 역할, 나타남과 가까운 원인에 대하여 공부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우리가 오염된 마음들의 추함과 위험을 알게 되면 오염을 제거하는 유일한 수단인 사념처를 닦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질투의 가까운 원인은 타인의 성공입니다. 질투심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함께 기뻐함'(mudit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좋은 보시를 받는 것을 보면, 혹은 누군가가 그의 지혜나 훌륭한 성품 때문에 명예가 높아지고 칭찬받는 것을 보게 되면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시기와 질투의 마음은 그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누리는 즐거움이나 선한 성품들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질투는 위험합니다. 강한 질투심은 해로운 업의 길입니다. 그래서 질투는 악처에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질투가 일어나는 순간에 그것이 비록 미세한 질투라도 마음을 챙기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내가 칭찬받기를 원하지 나 말고 다른 이들이 칭찬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자아도 없고 오로지 정신(nāma)과 물질(rūpa)만이 있습니다... 수다원은 실재들에 대한 바른 지혜 때문에 즐거운 대상을 경험하는 자아나 즐거운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과 같은 실재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모든 경험하는 것들은 단지 조건지워진 실재로써 머물지 않으며, 자아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수다원에게는 질투심이 없습니다. 이미 그것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지요.

질투심의 불이익을 보게 된다면 질투하는 마음은 점점 줄어듭니다. 이것은 질투를 자제하는 조건이 됩니다. 질투의 반대는 함께 기뻐함(muditā)입니다. 함께 기뻐함은 누군가의 성공과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실 수행의 초기에는 다른 이의 행복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함께 기뻐함의 유익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함께 기뻐함이 일어나는 조건이 됩니다. 다른 이의 성공을 함께 기뻐하는 것은 점차적으로 우리의 성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많은 순간 '함께 기뻐하는' 습관이 형성된다고 하여도 이것만으로는 질투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나마(nāma)와 루빠(rūpa)에 대한 바른 통찰지만이 질투를 제거합니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pp.276~279,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3.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신 빠라구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내가 질투하던 대상이 반대로 불쌍하거나 안타까운 대상이 되면 질투했던 마음이 사라지면서 도와주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므로 연민은 질투하는 것을 사라지게 합니다. 

 

 

필자는 이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법은 '지금 여기서 볼 수 있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 것이다.

68. ..."법은 세존에 의해서 ① 잘 설해졌고 ②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③ 시간이 걸리지 않고 ④ 와서 보라는 것이고 ⑤ 향상으로 인도하고 ⑥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A.iii.285)

- 대림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509, 초기불전연구원(2004)

 

 

타인의 성공은 그가 뿌린 선업의 씨앗이 조건을 만나 개화한 것이다.

현명한 자는 '타인의 성공'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질투(issā)는 버려야 할 법이고 함께 기뻐함(muditā)는 일으켜야 할 법이라는 것을 안다.

 

모든 중생은 각자 그 자신의 업의 주인(sabbe-satta-kamma-ssaka)임을 알아 그는 그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나는 나의 선업의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할 일을 다하였다.

 

따라서 스님의 말씀대로 질투하던 대상이(= 성공하던 대상이) 불쌍하거나 안타까운 대상이 될 때까지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① 즉각적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② 직접적으로 바로 그 대상에 대해 질투라는 해로운 법이 아닌 감사함이라는 유익한 법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왜 연민을 일으키기 위해 대상이 불행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연민의 대상은 '타인의 고통', '불행한 중생'이지 지금 이 시점에서 목도하고 있는 '타인의 성공'을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대상이 다른 마음이 일어나려면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그 마음에 맞는 대상의 성질로 변할 때까지 기다려야할 수밖에 없다.

 

꽤나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과정이다.

92.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할 때 선한 사람의 가슴이 동요하기 때문에 연민(karuṇā)이라 한다. 혹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제거하고, 죽이고, 부스러뜨리기 때문에 연민이다. 혹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 흩어져서 가득 채움으로써 확장되기 때문에 연민이다...

94. 연민은 중생에게 일어난 고통을 완화하려는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다른 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해코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고통에 압도된 자들에 대해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를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잔인함을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근심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 대림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2권 pp.177~178, 초기불전연구원(2004)

 

 

연민의 대상은 '타인의 고통'이며, 질투의 대상은 '타인의 성공'이다.

이 둘은 대상이 다르다. 

 

연민은 대상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성공하는 대상을 측은하게 여길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성공하는 대상에게 '고통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졌으면' 하는 연민의 마음을 방사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위의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같은 대상을 향해 연민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타인이 불행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것은 시기적으로도 실패하는 것이고, 인과적으로도 실패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9. Karuṇā 연민
Pitta, compassion

연민karuṇā은 불행한 중생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다. 연민은 불행한 중생을 구하려는 마음과 남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을 생기게 한다. 불행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애를 쓰며 속을 태울 것이다. 이는 진정한 연민이 아니고 선량한 사람의 마음에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측은한 마음에 기반을 둔 정신적 고통domanassa일 뿐이다. 이것이 비록 해로운 법akusala인 정신적 고통일지라도 큰 악은 아니다. 사실 유익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이러한 마음을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연민
때로 여러분은 곤경에 처한 친척이나 친구를 측은히 여긴다. 사실 이 마음부수는 근심soka으로 진정한 연민이 아니다. 진실한 연민은 자비심을 일으키는 반면 진실하지 않은 연민은 근심과 걱정을 일으킨다. 

선한 사람의 마음
선한 사람은 불행한 중생을 직접 목도할 때 연민karuṇā을 느끼지만 자신의 친구, 친척, 가족에게만 자애mettā를 보낸다. 하지만 십바라밀을 닦고 있는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나 이미 십바라밀⁷⁰⁾을 완성한 성자, 특히 보살은 마치 불쌍하고 고통받는 친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부모처럼 모든 중생들이 사악처apāya에 떨어질 위험과 해로운 행위로 인해 받는 불선업의 과보에 대해 매우 염려하는 큰 자비심을 지녔다. 그들은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중생에게 자애를 확산할 수 있다. 그들은 못된 아이까지도 평등하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에 비유될 수 있다. 

⁷⁰⁾ 바라밀의 원어인 빠라미pāramī, 또는 빠라미따pāramitā로 중국에서 바라밀로 음역되었고 영어로는 perfection이라 한다. 성불의 수기를 받은 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윤회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닦아야 하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덕성을 말한다. 보시, 지계, 출리, 지혜, 정진, 인욕, 진실, 결의, 자애, 평온

자애mettā와 연민karuṇā은 바라밀pāramī을 완수하는 동안 윤회 속의 보살의 정신과 물질의 연속체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으며 정등각의 순간에 완전히 성숙한다...

오늘날 유익하고 고귀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보살의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유익할 때에만 선할 것이다. 나는 오직 선한 사람에게만 유익함으로 보답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 대신 '비록 그들은 해롭지만 나는 오직 유익함으로 그들을 대할 것이다. 그들이 유익하든 유익하지 않던 나는 그들에게 유익하게 굴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이에게 진정한 자애와 연민을 보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

연민karuṇā을 방사하는 방법
연민karuṇā의 마음부수cetasika는 불행을 당해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을 측은하게 여기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중생들을 지금 처해있는 불행으로부터 구해주고자 하는 진정한 바람이 그 핵심이다. 그러므로 연민을 방사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란 의미의 빠알리어 게송 'dukkhā muccantu'를 염송한다. 진정한 연민은 남들이 고통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졌으면 하는 심려 깊은 바람이다. 그의 고통이 빨리 끝나라고 'OO가 빨리 죽기를'이라고 바라는 것은 진정한 연민이 아니고 사실은 악의라는 해로운 행byāpāda-ducarita이다.(악의는 생각으로 하는 해로운 행이다)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p.111~117, 법보시자 위데히(2023)

 

 

연민은 타인의 실패에 대해 감정적으로 동요하지는 않지만(= 근심하지 않지만), 그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다.

중생들에 대한 잔인함을 쉬게 하는 결과도 가져온다.

연민(karuṇā)

...앗타살리니의 정의도 이와 비슷합니다.

연민(karuṇā)의 가까운 적은 '일상사에 바탕을 둔 큰 슬픔'이다. 이것은 사람이나 어떤 즐거움 같은 '세속적인 삶'에 대한 탐욕으로 조건지워진 성냄이다. 연민(karuṇā)의 멀리 있는 적은 잔인함이다.(Vis. IX. 99) 잔인함이 있으면 연민(karuṇā)의 마음은 일어날 수 없다.

연민(karuṇā)의 가까운 적이라고 하는 슬픔이나 성냄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실재로는 화(dosa)를 내고 있으면서 이것을 연민(karuṇā)이라고 착각합니다. 누군가 비참한 상황에 빠진 것을 보면 연민이 아닌 다른 마음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즉 연민(karuṇā)이라는 유익한 마음뿐만이 아니라 해로운 마음도 일어나기 쉽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의 괴로움을 완화시켜 주기 위하여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연민(karuṇā)입니다. 하지만 그가 겪고 있는 괴로움을 보고는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민(karuṇā)과 성냄(dosa)은 다른 마음부수입니다. 이것들은 연이어 일어나기 쉽습니다... 바른 지혜가 있다면 그것들의 다름을 압니다.

연민(karuṇā)은 자애(mettā)와도 같지 않습니다. 자애(mettā)는 성냄없음(adosa)이라는 마음부수로 모든 아름다운 마음들과 함께합니다... 이것은 중생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며 다른 이들을 친구로 대합니다. 반면에 연민(karuṇā)은 중생들의 괴로움을 완화시켜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애와 연민(karuṇā)의 대상은 다릅니다.

...연민(karuṇā)의 대상은 괴로워하는 중생들이므로 정신적 기쁨(소마낫사)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신적 기쁨이나 무덤덤한 느낌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괴로움을 즐거운 마음으로 완화시켜 주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민(karuṇā)으로 명상을 하는 것은 잔인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함입니다. 선정에 들기 위하여 연민(karuṇā)을 닦을 때에는 연민(karuṇā)의 대상은 모든 중생들입니다. 이렇게 대상에 대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무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연민(karuṇā)을 증장시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롭게 하면 안 됩니다. 연민(karuṇā)의 마음을 가지고 잘못된 말과 잘못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붓다께서 사왓띠에 계실 때 아라한이 되기 위하여 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승들에게 해로운 업을 짓지 말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연민(karuṇā)의 이익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민(karuṇā)의 마음을 생기게 하는 조건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때로는 다른 이들의 육체적인 고통을 줄여주는 기회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기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당한 말을 듣거나 혹은 행동을 보게 되면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지은 행위의 과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그런 행위의 과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화를 내는 대신에 그에 대한 연민(karuṇā)의 마음이 생기겠지요. 그래서 업과 과보에 대한 지혜는 연민(karuṇā)의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입니다.

붓다께서 법을 설하신 것은 참으로 위대한 연민(karuṇā)의 마음입니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중생들이 괴로움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연민(karuṇā)의 마음을 가진 붓다 때문에 우리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pp.494~500,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따라서 우리는 범천의 마음이라고 말하는 4가지 마음의 대상과 그 역할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자애는 모든 중생에 대한 사랑을 방사한다.
  2. 연민은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측은지심을 방사한다.
  3. 함께 기뻐함은 성공한 중생에 대한 기뻐함, 감사함을 방사한다.
  4. 이 모든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적의와 찬사를 가라앉힌 중립적인 마음으로 모든 중생은 그 자신의 업의 주인임을 알고 평온을 방사한다.
이러한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brahmavihāra은 각기 다른 방사력을 지니고 있다. 자애mettā는 모든 중생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방사한다. 연민karuṇā은 불행으로 괴로워하는 중생에 대한 측은지심과 동정심을 방사한다. 더불어 기뻐함muditā은 성공으로 기뻐하는 중생을 그 대상으로 하여 함께 기뻐해주는 마음을 방사한다. 평온upekkhā은 모든 중생은 다 업의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고 보며 그들에게 평온을 방사한다.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118, 법보시자 위데히(2023)

 

 

4. 

아신 빠라구 스님이 인색에 대해서도 언급했으니, 이 기회를 삼아 인색에 대해서 공부해 보는 것도 좋겠다.

인색의 대상은 '자기의 성공'이다.

(10) 인색(macchariya): 

'인색'으로 옮긴 macchariya는 특별히 알려진 어근이 없다... 『위방가 주석서』 에서는 인색(macchariya)을 경이로움을 뜻하는 acchariya에 견주어서 '이런 경이로움이 내게만 있고 남에게는 없기를(mā)'이라고 한다고 해서 mā+acchariya로 재미있게 풀이하고 있다. 초기불전에는 앞의 질투(issā)와 같이 많이 쓰인다.

[청정도론 XIV]: "173. 인색한 상태가 인색(macchariya)이다. 그것은 이미 얻었거나 얻게 될 자기의 성공을 숨기는 특징을 가진다. 다른 사람과 그것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움츠림으로 나타난다. 혹은 쓰디쓴 상태²⁴⁶⁾로 나타난다. 자기의 성공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정신적인 추한 모습으로 보야아한다."

²⁴⁶⁾ ...여기서는 너무 인색하면 자기 재산 등이 줄어들 때 속이 쓰림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고 인색하면 항상 긴장해서 애간장을 태우는 것을 뜻한다고 여겨도 되곘다. 그래서 PED에는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the shrinking up of the heart)'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250, 초기불전연구원(2017)

 

 

그러나 아신 자나까 비왐사가 말씀하시는 인색에 대한 설명은 범위를 달리한다.

Macchariya에 대해 '자기의 성공' 뿐만 아니라 남들에 대한 인색함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즉, macchariya는 자기의 성공을 나누어가지지 않고 숨기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무언가를 얻지 못하도록 하는 관대하지 못한 이기적인 생각까지 포괄한다는 것이다.

10. Macchariya 인색
Jealousy, selfishness

해로운 마음부수인 인색을 맛차리야macchariya라고 한다. 요즈음에 일부 사람들은 남에게 뭘 주거나 보시하기를 꺼려한다. 이러한 것이 인색이라고 오해하는데 사실 인색은 남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길 바라는 것을 뜻한다. 인색한 사람은 남을 질투하고 남이 재산을 얻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인색은 남이 승진, 돈, 명예, 미모 등을 얻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질시를 뜻한다. 삼장에는 다음 다섯 가지 인색macchariya을 설명한다.

1. 거처의 인색avāsā-macchariya: 집, 거처, 사원, 학교, 침대 등과 관련된 인색이다. 일부 비구는 자신이 소유하게 된 사원에 다른 비구가 와서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불선한 비구가 자신이 머무는 곳에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인색이 아니다. 남이 무언가를 얻지 못하게 하는 이기적인 행동이 바로 인색이다. 거처에 대한 인색을 가진 비구는 죽어서 자신의 거처에 아귀peta로 태어나거나 지옥niraya에 떨어진다.

2. 가족의 인색kula-macchariya: 신도와 친척 등에 대한 인색이다. 어떤 비구는 자신을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신도가 자기 외에 다른 비구를 후원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불선한 비구가 자신의 친구와 친척과 사귀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인색이라 하지 않는데 불선한 비구는 그들의 믿음과 도덕을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인색은 자신의 친척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을 볼 때 속이 뒤집히고 내장의 출혈과 설사를 일으킨다. 그러한 사람은 내생에 무일푼의 상황에 처할 것이다.

3. 탐욕의 인색labha-macchariya: 물질적 이익에 원인을 둔 인색이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을 못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악의가 바로 탐욕의 인색이다. 하지만 불선한 비구가 적당하지 않은 곳에 사용할 필수품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과 선한 비구가 필수품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탐욕의 인색이 아니다. 탐욕의 인색을 지닌 사람은 오물 지옥gūtha-niraya에 떨어져 똥을 먹어야만 할 것이다.

4. 계급의 인색vaṇṇa-macchariya: 미모와 명성에 원인을 둔 인색이다. 이러한 인색을 가진 사람은 남들이 자신보다 더 아름다워지거나 더 유명해지는 것을 못 본다. 그러한 사람은 윤회를 하면서 내생에 추하게 생긴 사람으로 태어나고 명예도 얻지 못할 것이다.

5. 법의 인색dhamma-macchariya: 배움, 학문, 교육, 지식에 원인을 둔 인색이다. 남과 지식이나 정보를 나누지 않는 사람은 법의 인색의 죄를 짓는 것이다. 법의 인색을 지닌 사람은 학문에서 남이 자신을 능가할까봐 두려워하고 질문에 답변해 주고자 하지 않으며 기꺼이 남을 가르치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식을 잘못 이용할 해로운 사람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것은 법의 인색에 해당되지 않는데, 이는 그러한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할 것이기 때문이다. 법의 인색을 지닌 사람은 멍청이나 머저리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뜨거운 재로 된 지옥kukkula-niraya에 떨어져 고통을 받을 것이다.

고려해야 할 문제
다섯 가지 인색macchariya과 관련하여 누가 이러한 해로운 마음에 가장 많이 노출될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십중팔구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보시에 의존하는 비구와 비구니가 이러한 해로운 성향을 답습하기 쉽다. 재가자의 경우에도 남이 자신보다 더 좋은 집이나 땅을 가진 것을 배 아파할 때 자신이 더욱 부유해지고 아름다워지고자 권력, 지위, 지식, 지혜 등에서 남을 능가하고자 할 때 인색이 생긴다. 그러한 인색을 맛차리야macchariya라고 한다. 하지만 인색과 관련하여 고통을 받는 사람은 인색한 마음을 내는 자신이지 그 상대방이 아니다. 인색한 사람은 추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죽어서 아귀peta로 재생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색을 철두철미하게 단속해서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아신 자나까 비왐사 지음, 『일상생활에서의 아비담마』 pp.76~78, 법보시자 위데히(2023)

 

 

인색한 마음은 이기적인 마음이기 때문에 속이 좁고, 오그라드는 것이고, 쩨쩨한 것이다.

마음이 오그라들면 몸도 오그라들고, 움츠려 들어 펴지지 않는다.

 

인색의 반대는 무엇일까?

 

① 성품으로 보자면 '관대함'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② 마음부수로는 탐욕 없음(alobha)로 말할 수 있겠다. Alobha는 관대함, 보시와 동의어이다.

③ 행위의 측면에서 우리는 보시와 봉사를 통해 관대함을 증장시킬 수 있다.

인색(macchariya)

...인색함이 일어나면 그 대상에 대한 성냄도 함께하므로 불쾌한 느낌입니다.

앗타살리니에 인색(macchariya)이란

이미 획득한 자신의 성공이나 획득하게 될 자신의 성공을 숨기는 것이 특징이다. 자신의 성공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나눔으로부터 움츠려듬 혹은 쩨쩨함이나 속이 쓰림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성공이 가까운 원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적인 추함으로 여겨야 한다.

청정도론(XIV, 173)의 정의도 이와 비슷합니다.

인색함은 속이 좁은 마음의 상태이다. 남에게 선물을 하기 위한 손을 뻗지 못한다. 인색함의 가까운 원인은 자신의 성공이다. 인색함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갖게 될 것)을 남과 공유할 수 없다.

인색함의 대상은 다섯 가지입니다. 담마상가니(1122)에 인색이라는 족쇄의 정의가 나옵니다.

다섯 가지는 주거, 가족, 보시(선물), 명성, 담마에 대한 인색함이다. 이런 모든 종류의 마음들은 오그라드는 것이다. 싫어한다, 비열한 마음이다, 인색하고 수치스럽다, 쩨쩨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의 관대함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인색이라는 족쇄이다.

...이러한 인색은 오그라드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오그라들면 몸도 오그라들고, 움츠려 들어 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쩨쩨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관대함이 부족'하다는 것은 마음을 닫아걸고 움켜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보시(선물) 등을 한다거나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서비스)하기 위하여 손을 내밀지 않는 것입니다.

...인색의 대상으로 다섯 가지에 대한 설명이 앗타살리니에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주었을 때 잘못 사용하게 될 사람에게 그것을 나눠주지 않는다 하여도 인색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승가에 치명적인 불명예를 가져올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하여도 이것은 인색함이 아니라 합니다.

'주거에 대한 인색'은... 마음에 드는 방이나 혹은 앉을자리 같은 곳(명상하기 좋은 곳)에 우리는 인색할 수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인색'은 수도원에서 일하는 재가 도우미의 가족이나 그 사람들의 친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색한 비구는 다른 비구가 그 도우미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받는 공양물을 다른 이들과 나눔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재물뿐만 아니라 칭찬에도 인색합니다... 다른 이의 덕행을 칭찬하는 것은 보시에 해당합니다. 만약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칭찬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칭찬하는 순간에는 마음에 인색함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담마에 대하여 인색합니다... 수다원은 성스러운 네 가지 진리를 깨쳤고, 모든 형태의 인색함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담마를 모든 이들이 알고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범부들은 담마에 대하여 인색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담마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담마를 욕보이기 쉬운 사람, 담마를 잘못 해석하는 사람 혹은 자기의 지식 때문에 자기가 아라한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담마를 가르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담마를 가르치지 않는 것을 인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담마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 관점에서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물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나마(nāma)와 루빠(rūpa)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일어나서는 사라지는 실재들이 나에게 속해 있고, 그것들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속해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인색하여야 합니까?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짧은데 인색함 때문에 유익한 행위를 행할 기회를 많이 놓칩니다.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아도 없고 어떤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실체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은 일어나서는 사라지는 나마(nāma)와 루빠(rūp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생은 사실 나타나는 대상을 경험하는 하나의 마음순간일 뿐입니다. 이 순간이 사라지고 난 직후에 다른 마음 순간들이 일어나서는 이어집니다. 형상이라고 하는 대상 혹은 딱딱함과 같은 대상은 우리들이 결코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단지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에게 귀속되어 있지 않은 물질(rūpa)들입니다. 통찰지가 개발되면 인색함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수다원은 나마(nāma)와 루빠(rūpa)를 있는 그대로 봅니다. 자아가 아닌 무상한 것으로 말이지요. 그래서 그에게는 인색한 마음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색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소유물들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보시를 안 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감각기관을 통해 나타나는 것들은 우리가 행한 업의 과보입니다...

구두쇠는 걱정을 한다. 그래서 보시를 않네.
주지 않음이 위험인 것을.
배고픔과 목마름 이것 때문에 그는 두려워하네.

바로 이렇게 마음을 쓰는 어리석은 이는
이곳 혹은 다른 세계로 떨어지네.

그러니 인색함을 가라앉히고
자선하는 마음으로 오염을 극복하는 보시를 하라.

틀림없이 미래에는 어떤 선처에
이 선행의 보상으로 좋은 몸 받아 태어나리.

다섯 종류의 인색함은 악처에 태어나게 하거나 혹은 바로 그 생에서 과보를 받게 만드는 해로운 업을 짓도록 합니다. 그래서 고난과 빈곤 그리고 질병과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이 모든 인색함들은 습관 때문에 형성된 것이지만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른 통찰지를 닦아 나가면 점차 관대해집니다... 인색한 마음은 언제나 불쾌하고 어떠한 행복도 느낄 수 없습니다... 인색함은 이렇게 자신의 성공을 숨기는 것이 특징입니다. 나눔을 원치 않기에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자신의 소유물에 대하여 취착하고, 인색하면 자아로부터 벗어나기가 더욱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관대한 마음으로 쓸모가 있는 것들은 보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보시행을 하는 사람들을 칭찬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익한 모든 행위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유익한 마음에 인색함은 없습니다. 인색함은 나타나는 실재들이 어떠한 것이든 바른 통찰지를 개발하게 되면 제거할 수 있습니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pp.280~290,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5.

사무량심의 이익은 너무나도 크고 광대하다.

우리는 그 과보로 편안하고, 사랑받고, 보호받고, 고요하며, 내생에 태어날 곳의 성공을 성취할 수 있다.

중지부에 사무량심인 자애를 닦은 결과가 나옵니다. 사실 다른 사무량심인 연민, 함께 기뻐함, 그리고 평온도 이것의 이익과 같습니다. 사무량심의 이익은

① 잠을 편안하게 자고
② 편안하게 깨어나고
③ 악몽을 꾸지 않고
④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⑤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서도 사랑받고
⑥ 천신들이 보호한다.
⑦ 불, 독 혹은 무기로 해침을 받지 않고
⑧ 마음이 쉽게 집중이 되고
⑨ 얼굴빛이 밝고 (그의 몸은 고요하다)
⑩ 혼란 없이 죽고
⑪ 출세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범천에 태어난다.

청정도론(IX 97)에 사무량심 가운데 자애(mettā)는 악의를, 연민(karuṇā)은 잔인함을, 함께 기뻐함(muditā)은 성냄을 그리고 평온(upekkhā)은 탐욕이나 적의를 잠재우기 위하여 닦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오염들은 실재들의 진정한 성품을 깨닫지 못하면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조건지워진 실재들은 심지어 가장 훌륭한 성품들도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입니다. 중지부에 한 수행승이 사무량심을 개발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 가슴에서 나오는 자애와 연민, 함께 기뻐함과 평온은 수승하다. 이것은 수승한 생각이다. 그때에 그는 알게 된다. 비록 이것이 지금은 수승한 것, 수승한 생각이라 하여도 이것은 종말이라는 본성을 가진 무상한 것이다. 이런 생각에 확고한 그는 오염을 파괴하고 승리한다. 그 상태는 완전하게 사라져 버리고 그 세계로부터 결코 (여기로) 돌아오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고, 아직 법(현상 - 역자)들에 대한 욕망이 있고, 법(현상 - 역자)들을 기뻐하고, 완전하게 그리고 이 세계에 속한 다섯 가지 족쇄들을 완전히 끝내지 아니하였다면, 그는 계속해서 다시 태어난다.

- 니나 판 고르콤 지음, 『쩨따시까』 pp.506~507, 도서출판 푸른향기(2014)

 

 

사랑을 주면 사랑을 받고, 이익을 주면 이익을 받는다.

 

사부대중이 사무량심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이익을 향유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사무량심을 닦아 일상의 행복과 내생의 성공, 고요함의 이익을 얻기를!

모든 중생들이 이 수승함을 기반으로 삼아 법을 조사하고 완전하게 파악하여 오염을 제거하고 열반을 실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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