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아비담마

공덕을 지은 후 왜 회향하는 걸까? 회향은 무엇을 알고 어떻게 해야 할까?

Rihan 2023. 9. 2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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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은 선업 공덕을 쌓은 후 회향을 한다.

필자는 회향을 왜 하는 것인지, 어떤 원리로 회향의 이익이 생기는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였고 이와 관련해서 우 실라 사야도께 질문을 드렸다.

 

아래 내용은 사야도의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필자의 부족함으로 답변의 내용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1.

인간들에게는 선업 공덕이 쉽게 생길 수 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자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를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고, 그들에게 보시와 봉사로 선업 공덕을 쌓을 수 있다.

 

하지만 천상에 사는 존재들의 경우 선업 공덕을 쌓기가 쉽지 않다.

천상 세계에서 천신들은 부족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서로 도울 수 없으므로 보시의 공덕 등이 생기기 어렵다.

우리가 선업을 지은 후 공덕을 회향하는 것은 이렇게 선업을 짓기 어려운 천신과 같은 존재들에게 '함께 기뻐함'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내가 지은 선업 공덕을 다른 존재들에게 notice, 알려준다. 

선업을 짓기 어려운 천신과 같은 존재들은 우리들이 알려주는 그 선업 공덕을 알고 '함께 기뻐함(희, muditā)' 심소법을 일으킨다.

 

'함께 기뻐함'을 일으키는 존재에게 그 선업 공덕이 똑같이 생긴다.

다른 이의 보시 공덕을 함께 기뻐하기만 해도 그 선업 공덕이 본인에게 동일하게 생기는 것이다.

 

공덕을 짓는 우리는 지은 공덕을 생각하며 유익한 과보를 얻고, 공덕을 회향하며 다른 존재를 돕고, 다른 존재가 함께 기뻐함을 통해 공덕을 함께 가지는 것을 알고 또다시 기쁘고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회향해주는 존재를 통해 우리는 함께 기뻐함으로 그 공덕을 함께 누리고, 공덕을 회향해 주는 도반에게 고마운 마음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법이 작동하는 법칙(niyama)을 알게 된다면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해할 수 있다.

견해의 위빨라사(전도)가 바로잡혔다면, 이제 습관적으로 함께 기뻐함을 닦아 왜곡된 인식(산냐 위빨라사)과 사고방식(찟따 위빨라사)을 고쳐나가는 수행을 하면 될 것이다.

 

'질투(issā)'는 '해로운 때때로들'에 속하는 마음부수이며,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이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날 수 있는 마음부수다.

탐욕이 '거머쥐는' 특성이 있다면, 성냄과 관련된 마음부수들은 '밀쳐내는' 특성이 있다.

 

'함께 기뻐함(muditā)'는 '아름다운 때때로들' 6가지 중 '무량함' 2가지에 속하는 마음부수이다.

우리가 말하는 자비희사의 사무량심 중 '희'에 해당하는 마음부수이다.

 

<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249-250 >

(9) 질투(issā): 

'질투'로 옮긴 issā는 √īrṣ(to be jealous)의 여성명사이다. 초기경에서는 대부분 다음의 macchariya(인색)와 함께 나타난다. Issā는 남의 잘된 것을 시샘하는 것이고 macchariya는 나의 잘된 것을 나누어가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청정도론 XIV]: "172. 질투함이 질투(issā)이다. 이것은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는 특징을 가진다. 좋아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혐오함으로 나타난다. 타인의 성공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족쇄로 보아야 한다."

(10) 인색(macchariya): 

...『위방가 주석서』에서는 인색(macchariya)을 경이로움을 뜻하는 acchariya에 견주어서 '이런 경이로움이 내게만 있고 남에게는 없기를(mā)'이라고 한다고 해서 mā+acchariya로 재미있게 풀이하고 있다. 초기불전에서는 앞의 질투(issā)와 같이 많이 쓰인다.

[청정도론 XIV]: "173. 인색한 상태가 인색(macchariya)이다. 그것은 이미 얻었거나 얻게 될 자기의 성공을 숨기는 특징을 가진다. 다른 사람과 그것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움츠림으로 나타난다. 혹은 쓰디쓴 상태²⁴⁶⁾로 나타난다. 자기의 성공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정신적인 추한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²⁴⁶⁾ ...너무 인색하면 자기 재산 등이 줄어들 때 속이 쓰림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고 인색하면 항상 긴장해서 애간장을 태우는 것을 뜻한다고 여겨도 되겠다. 그래서 PED에는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the shrinking up of the heart)'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272-274 >

(2) 함께 기뻐함(muditā): 

... 이것을 가진 자는 이것 때문에 기뻐한다, 혹은 이것은 그 스스로 기뻐한다, 혹은 단지 기뻐하기 때문에 함께 기뻐함(muditā)이다.

..."95. 함께 기뻐함의 특징은 [다른 이의 성공을] 기뻐함이다. 질투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 따분함(arati)을 제거함으로 나타난다. 중생들의 성공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따분함을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세속적인 희열로] 왁자지껄한 웃음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부처님이 알려주신 법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이 법은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고, 2배, 3배, 4배로 증장된다.

공덕을 짓고, 공덕을 나누고, 공덕을 함께 기뻐하고, 함께 공덕을 짓는 선우를 가까이 함으로써 선업 공덕을 복리처럼 늘려나갈 수 있다.

 

'내 것, 나, 나의 자아'에 함몰된다면 반대 방향의 수레바퀴가 돈다.

이 법을 알지 못하니 떳떳해 보이는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가진 자를 질투하고 시기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질투하는 자에게 질투의 과보가 그대로 돌아온다.

중생이 의지할 데는 자신의 업밖에 없으니,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자라면 스스로의 업을 아름답게 가꿔나가야 한다.

 

세간 마음은 쥐고 놓지 않아서 한정된 결과를 얻는다.

출세간 마음은 형성된 것이 쥐고 가질만한 것이 아님을 알기에 놓아버리려고 한다.

 

 

2.

선업 공덕의 회향은 선업을 짓기 어려운 존재들에게 함께 기뻐함의 기회를 주고, 선업을 보시하는 것이다.

다만 내가 지은 선업 공덕을 회향할 때, 자만심을 바탕으로 회향하는 경우 그 효과를 얻기 어렵다고 한다.

 

선업을 보시하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으로 기뻐하며, 고마워서 나누는 것이다.

'내 것, 나, 나의 자아'라는 허황된 생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만이나 인색의 때가 묻어 나오는 마음작용일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는 아비담마에서 수승한 유익한 업과 저열한 유익한 업에 대해서도 배운다.

<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519 >

... 수승한(ukkaṭṭha) 유익한 업은 번뇌를 잘 씻어내고, 업을 짓기 전과 후에 좋은 원인을 가진 마음으로 지은 업이다. 예를 들면 바르게 번 돈으로 준비한 음식을 덕이 높은 스님에게 공양 올리고, 공양 올리기 전이나 후에 환희심을 낸 경우를 들 수 있다.

저열한(omaka) 유익한 업은 유익한 업을 짓기 전후에 기고만장하다든지 남을 비방한다든지 즉시에 후회한다든지 하는 부정한 상태로 얼룩진 마음으로 지은 것을 뜻한다.

 

두 번째로, 보시의 공덕은 회향되지만 지계와 수행의 공덕은 회향할 수 없다.

지계와 수행은 직접 지어야 하는 것이다.

 

세간 선업은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돕는다.

출세간은 수행으로 가능한 것이다. 수행은 안정되고 편안하며 괴로움이 적은 상태에서 결과를 맺기 쉽다.

 

다사빠라미요(dasapāramiyo, 십바라밀)에서는 다나(dāna, 보시) 빠라미가 첫 번째로 나온다.

재물을 보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회향과 봉사도 보시에 속한다. 법회와 같은 법보시를 행하는 것도 보시에 속한다.

 

수행자는 자신이 지은 선업의 도움을 받아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출세간을 향한 수행을 할 수 있다.

좌선과 행선뿐 아니라 법문을 듣고, 성자들을 친견하고, 법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도 모두 수행이다.

 

이로써 목적을 성취하는 자는 도움을 주는 선업의 과보, 존재들, 세상에 고마워서 다시 빠라미를 행한다.

 

    
3.

회향은 천신과 같은 존재들에게만 가능한가?

물론 아귀, 아수라와 같은 존재들에게도 가능하다.

 

아수라에 대해서 아비담마 길라잡이 책에서는 자세하게 기술하지는 않는데,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수라는 아귀와 비슷한 존재들인데 아귀들보다 몸도 크고 괴로움도 크다고 한다.

 

아수라는 크게 2가지 분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인간과 함께 사는 아수라들인데, 필자는 아비담마 길라잡이에도 나오는 vinipātika-asura, '타락한 아수라들'로 이해하고 있다.

이들은 바다 쪽에서 지낸다고 한다. 참고로 아귀는 숲이나 산에서 지낸다.

    
두 번째는 삼십삼천의 신들과 싸운다는 천신에 속하는 아수라들이다.

흔히 '술 마시는 천신'으로 불린다고 한다. 참고로 사대왕천에는 야차들도 있다.

 

흔히 아귀나 아수라는 배고픈 존재들로 묘사되지만,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이 역시 자신의 업에 따라서 괴로움의 종류가 다른 것이라 한다.

 

필자는 절에서 먹는 것을 조금 떼어서 아귀 등에게 보시한다는 것을 듣고 재가자로서 이 존재들에게도 별도의 보시나 회향 등이 필요할지 사야도께 여쭈었는데,

선업 공덕이 생길 때마다 특별히 이 존재들만을 위해 선업을 보시하는 것이 아닌 모든 존재들에게 그 선업 공덕을 회향하면 족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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