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청정도론

부처님의 9가지 덕목 - ⑤ 세간해lokavidū이신 이유 4가지

Rihan 2025. 4. 2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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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섯 번째 덕목 - 세간해lokavidū

 

So bhagavā itipi lokavidū.
그 세존께서는 이런 이유로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시다.

 

Sabbathāpi viditalokattā pana lokavidū.

모든 세상을 꿰뚫어 아시기에 로까위두이시다.

 

  • Loka(세상, world) + √vid(알다, to know)라고 하여 로까위두를 '모든 세상을 꿰뚫어 아시는 분'이라고 한다.
  • Sabba(모든) + -thā(곳) + pi(또한) √vid(알다) + -ita(과거분사) + loka(세상, 세계) + -tta(~때문에) pana(또한) lokavidū
  • 한자어로도 世間解는 '세상 세, 공간 간, 이해할 해'로 세간을 모두 이해하신다는 뜻이다.
36.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아시기 때문에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고유성질에 따라, 일어남에 따라, 소멸에 따라, 소멸에 이르는 방법에 따라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아셨고, 경험하셨고, 통찰하셨기 때문이다.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492, 초기불전연구원(2021)
부처님께서는 보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온 세상을 다 알고 계십니다... 즉 온 세상을 다 꿰뚫어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로까위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전부를 다 아십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426, (사)법승 담마야나(2017)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세상'이란 무엇인가?

3가지의 세상을 다 아신다. 그리고는 세상의 끝을 설하신다.

  1. Satta-loka중생 세상: 여러 중생의 습성과 잠재성향을 자세하게 아신다.
  2. Okāsa-loka공간 세상: 여러 세상, 우주의 모습과 구조를 잘 아신다.
  3. Saṅkhāra-loka형성 세상: 물질과 정신의 고유성질, 무상 · 고 · 무아의 공통된 성질도 분명하게 아신다.
  4. lokassa anta세상의 끝: 괴로움의 끝인 열반을 상징한다. 팔정도를 닦아 여섯 감각장소로 인식되는 경험된 세상(고성제)의 끝에 도달하여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한다.
37. 세 가지 세상이 있다. ① 상카라들의 세상과 ② 중생의 세상과 ③ 공간의 세상이다... 세존께서는 그것을 모든 방면에서 아신다.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493, 초기불전연구원(2021)

 

 

① Satta-loka중생 세상: 여러 중생의 습성과 잠재성향을 자세하게 아신다.

  • √as(있다, 존재하다) + -tva(됨) → sattva → satta
  • Satta는 living being, 즉 '살아 있는 존재', '생명체'를 뜻한다.
  • '중생'은 '무리 중, 날 생'으로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뜻한다. 이들은 업과 번뇌에 묶여 윤회한다. '마음을 가진 존재', 유정(有情)과 동의어다.
  • 참고로 교학적인 관점에서 존재들은 보편개념(paññatti)일 뿐 실재(paramattha)가 아니다. 나를 비롯하여 존재들을 어떤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대상으로 실체화하여 볼 이유는 없다. 중생들의 습성 또한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축적된 행위들이 굳어진 결과일 뿐이다.
  • 로까위두께서는 이 모든 존재들의 습성, 잠재성향, 행위, 결심, 번뇌, 기능의 예리함, 행실, 학습 태도, 가능성을 모든 방면에서 다 아신다. 지옥생,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신, 범천 존재를 가리지 않고 모두 다 아신다.
39. 모든 중생들의 습성을 아시고, 잠재성향을 아시고, 행위를 아시고, 결심을 아시며, 눈에 때가 적은지 많은지, 기능이 예리한지 둔한지, 행실이 바른지 나쁜지, 가르치기 쉬운지 어려운지,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중생의 세상을 모든 방면에서 아신다.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494, 초기불전연구원(2021)
첫째, 삿따로까(중생계). 삿따(중생) 지옥생, 축생, 아수라, 아귀, 인간, 천신, 범천, 이 모든 중생들의 모음을 '삿따로까'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지옥 세상을, 동물 세상을, ... , 범천 세상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볼 수 있든 볼 수 없든,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429, (사)법승 담마야나(2017)

 

 

중생의 특징은 '어리석어 전도(vipallāsa)된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다른 말로 주관적 투사, 개념에 얽매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없는 그대로 본 후 사실과 '다툰다'.

스스로 착각하여 실체가 없는 대상, 허상과 싸우는 것이다.

  • 있는 그대로 볼 때, 형성된 것은 항상하지 않고, 괴로움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더러운 것이다.
  • 이것은 개별 법 그 자체의 성질, '고유성질에 따라(yathā-sabhāva, 자성에 따라)'말하는 것이다.
    • yathā: ~와 같이, 그대로
    • sabhāva: sa(자기) + √bhū → bhāva ‘존재·상태’ = 자성(自性)
    • 고유성질을 가진다고 해서 sabhāva를 어떤 ‘변하지 않는 본체’로 보면 안된다. 이것은 설명을 위해 분석적으로 쓰이는 용어에 불과하다. 고유성질을 가지는 것도 찰나마다 생멸하며 상속되는 것일 뿐, ‘고정적 실체’가 아니다.
    • yathā‑bhūta ñāṇa‑dassana: ‘있는 그대로 알고 봄’ → '이미 그러한 현실'(bhūta)을 알고 봄
    • 지혜는 각각의 본성 그대로 관통하여 아는 특성(yathā‑sabhāva‑paṭivedha‑lakkhaṇā)을 가진다. 이것은 vipassanā의 ‘관통적 특성’을 드러내는 말이며, 지혜의 기능을 설명하는 말이다.
    • 있는 그대로 관통하여 보는 지혜의 가까운 원인은 선정samādhi이다. 선정이 있는 자는 사물을 yathā‑bhūta로 안다. 즉, 선정은 yathā‑bhūta ñāṇa‑dassana의 가까운 원인이다. 
    • 선정 위에서 yathā‑bhūta ñāṇa‑dassana가 일어나면서 현상(法)의 '생겨남‑머묾‑소멸', 즉 생멸 그대로를 직시하게 되어 염오(nibbidā) → 무착(virāga) → 해탈(vimutti) → 해탈지견(vimutti‑ñāṇa‑dassana)으로 이어진다.
  • 그러나 어리석어 꿰뚫어 보지 못하여 전도된 견해를 가진 중생은 무상 · 고 · 무아 · 부정인 대상에 대하여 항상함 · 즐거움 · 실체있음 · 깨끗함으로 보게 된다.
  • 그래서 법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 그러나 중생 세상satta-loka은 그처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법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와 다투게 된다(vivadati).
  • 보이는 대로 견해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착각하여 보고, 그것에 취착하기 때문에 견해를 짓고, 그 견해에도 취착하여 고집하게 되며, 고집하기 때문에 다투는 것이다.
  • 이러한 이유로 아래 「꽃 경」에서 다툰다는 '세상'은 중생세상satta-loka를 지칭하는 용어다.
  • 그러나 그 아래 '세상의 법이 있다'라는 말에서의 '세상'은 형성세상saṅkhāra-loka을 말한다. 세상의 법(loka-dhamma)이 무엇이겠는가? 형성된 모든 것은 허물어지기 때문에 무상하고, 고통이고, 실체가 없고, 더러운 것이라는 법이다.
  • 이 모든 것을 알고 보는 로까위두께서는 세상을 완전하게 깨달아 관통한 뒤, 세상에 젖지 않고 머무신다. 머무시면서 중생들을 알게하고 가르치며, 법을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하신다.
꽃 경(S22:94)
Puppha-sutta

3.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³³⁵⁾ 세상³³⁶⁾이 나와 다툰다. 비구들이여, 법을 말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

³³⁵⁾ "'다툰다(vivadati)'는 것은 무상 · 고 · 무아 · 부정이라고 고유성질에 따라(yathā-sabhāva) 말하는 것에 대해서, 항상함 · 즐거움 · 자아 · 깨끗함(상 · 락 · 아 · 정)이라고 말하면서 다투는 것이다." (SA.ii.320)
...이렇게 여기는 것을 전도(vipallāsa)라 부르고 있다.

³³⁶⁾ "본경에는 세 가지 세상을 설하고 있다. 본 문단의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중생의 세상(satta-loka)이다. [§6의]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세상의 법이 있나니'라는 것은 유위의 세상(saṅkhāra-loka)이다. [§8의] '여래는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에서 자랐지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기세간, okāsa-loka]이다."(SA.ii.320)...

6.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세상의 법³³⁸⁾이 있나니 여래는 이것을 완전하게 깨달았고 관통하였다. 완전하게 깨닫고 관통한 뒤 알게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한다.

³³⁸⁾"'세상의 법(loka-dhamma)'이란 오온을 말한다. 이것은 허물어지는 고유성질을 가졌기(lujjana-sabhāvatta)때문에 세상의 법이라 부른다."(SA.ii.320)
본서 제4권 「세상 경」 (S35:82) §4에서도 loka(세상)은 lujjati(부서지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어원은 언어학적으로는 인정하기 어렵지만 교육적인 목적에는 도움이 된다. 어원상으로 loka는 √lok/loc(to see, to light)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세상에는 어떠한 세상의 법이 있어서 여래는 이것을 완전하게 깨달았고... 명확하게 하는가?"

7. "비구들이여, 물질은 세상에 있는 세상의 법이니 여래는 이것을 완전하게 깨달았고 관통하였다... 명확하게 한다. 여래가 이것을 알게 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하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은 범부이니 이렇게 어둠에 빠지고 눈이 멀어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느낌은... 인식은... 심리현상들은... 알음알이는 세상에 있는 세상의 법이니... 여래가 이것을 알게 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하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은 범부이니 이렇게 어둠에 빠지고 눈이 멀어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8.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 물에서 생겨서 물에서 자라지만 물을 벗어나서 물에 젖지 않고 피어 있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에서 자랐지만 세상을 지배한 뒤 세상에 젖지 않고 머문다."

- 각묵 스님 옮김, 『상윳따 니까야』 제3권 pp.382~385, 초기불전연구원(2022)

 

 

② Okāsa-loka공간 세상: 여러 세상, 우주의 모습과 구조를 잘 아신다.

  • Ava-(down, off) + √kāś(빛나다, 드러나다) → 산스크리트 avakāśa → 빠알리 okāsa
    • '빈 자리'라는 뜻에서 ‘공간, 여유, 기회’라는 뜻의 okāsa가 파생된다.
    • 이것이 승가에 발언·행위 등을 청할 때는 '기회, 허락, 여유'의 뜻으로 쓰이고, 우주적 장소를 뜻할 때는 중생들이 사는 물리적 터전을 가리킨다.
  • 모든 우주에서 중생들이 살고 있는 공간들은 31천이다. 31천을 부처님께서는 다 아신다.
    • Apāya(악처): apa-(away from, down) + aya(이익, 소득) → 이익이 없는 세상, 선업을 할 기회가 없어 손해보는 세상
    • Aya는 선업을 할 수 있는 기회다. 지옥생은 매순간 공격받고 고통받고 있어 잠깐이라도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없다.
    • 마찬가지로 동물, 아수라, 아귀도 삶 자체가 계율을 깨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서 보시 · 지계 · 수행할 틈이 없다.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들고,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해서 힘들다.
    • 동물은 깨닫지 못한다. 인간이 너무 동물 같아지면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진다. 인간이 동물을 닮는다는 것은 너무 식욕이 많고, 성욕이 많고, 잠자는 욕구가 많은 것을 말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오후불식을 하고, 수행처에서 금욕하고, 적당하게 자려고 한다.
    •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이 닿는 오욕락으로 사는 세상이 욕계다.
40. 중생의 세상처럼 공간의 세상도 모든 방면에서 아신다. 하나의 우주(cakkavāḷa)는 종횡으로 1천 2백만 3천 4백 5십 유순(yojana)이다. 그 주위는 일체의 주위는 3백 6십만이고 일만 3백 5십의 유순이다.

41. 이 가운데서 이십사만이 있으니 이 만큼의 두께를 가진 것을 땅이라고 말한다.
그 [땅을] 지지하는 [물은] 사십팔만이 있으니 이 만큼 두께의 물이 바람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그 [물을] 지지하는 바람이 허공을 상승하는 것은 구십육만이 있으니 이것이 세상의 전체 크기이다...

45. 이와 같이 그분은 공간의 세상을 모든 방면에서 아신다. 그러므로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아시기 때문에 세상을 아시는 분이다.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p.494~497, 초기불전연구원(2021)
둘째, 오까사로까(공간계). 중생들이 살고 있는 공간들을 부처님께서 다 아십니다. 그 공간이 31천입니다. 31천을 통틀어서 공간계라고 말합니다. 31천이라고 말하면 빠지는 공간이 없습니다. 만 개 우주이건, 몇 만 개 우주이건, 모든 우주를 찾아서 보면 그것밖에 없습니다. 31천을 부처님께서 오까사로까(공간계)로 말씀하시고,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31천은 무엇입니까? 크게 네 그룹으로 나누면 사악처, 인간, 천신, 범천이 있습니다.

① '아빠야(apāya악처, 지옥)', 아빠야는 '아빠+아야=아빠아야'로 단어 두 가지를 합친 말입니다. 아야(기회 - 필자 주: 소득, 이익), 아빠(제외된 - 필자 주: away from), 기회가 제외된 세상을 '아빠야'라고 합니다. 기회가 없어져서 손해를 봤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야'는 선업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선업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세상은 기회가 제외된 세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옥 생들에게는 지금 여러분들과 같이 수행할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지옥생들은 매 순간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매 순간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잠깐이라도 수행을 하고 싶다." 해도 그런 기회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다." 해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세상을 '아빠야'라고 합니다... 동물들도 선업을 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리고 아수라, 아귀 귀신들도 선업하기 힘듭니다. 보시하기 힘들고 계율 지키기가 힘들어요. 삶 자체가 계율을 깨야만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수행할 틈이 전혀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들고,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해서 힘듭니다. 그래서 지옥, 축생, 아수라, 아귀, 이 네 가지 세상을 '아빠야'라고 합니다.

아수라는 덩치가 크고 입은 바늘구멍 같고 몸은 이 법당보다 더 큰 이상한 괴물들입니다. 귀신은 보통 우리 사람들처럼 생겼는데, 사람은 아니고 조금 신기가 있는 중생입니다. 그렇지만 천신은 아니고 불쌍하고 괴로운 세상에 사는, 동물은 아니지만 동물 같은 중생입니다.

똑같은 '아빠야'이지만 지옥을 특별히 '니라야(niraya)'라고 합니다. '니라야=니+아야', 아까 말한 '아야(기회가)', '니(아예 없다)', 동물은 선업을 조금은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이 착하면 선업을 조금 할 수 있고, 아수라와 아귀도 조금 선업을 할 수가 있는데, 지옥생은 선업을 전혀 못 합니다. 그래서 지옥 중생을 '니라야 삿따'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물을 '띠랏차나(tiracchāna)'라고 합니다. '앗차나(원함이)', '띠(세 가지)', 세 가지 원함을 가지고 사는 중생들이 동물입니다. 세 가지 원함은 먹고 자고 성생활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밖에 모르는 세상이 '띠랏차나' 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도 이 세 가지 밖에 모르면 동물 같은 인간이 됩니다.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됩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세 가지 본능을 떨쳐내고 보다 수승한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먹는 욕심을 조절하기 위해 오후 불식을 합니다. 자는 욕심도 조절하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늦게 잡니다. 음란한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수행처에서는 아예 금욕을 합니다. 동물은 깨닫지 못합니다. 동물은 동물로 태어난 불선업이 끝나고 동물 생이 죽은 후, 과거 선업이 있으면 다시 인간이나 신으로 태어나는데, 그렇게 인간이나 신으로 다시 태어나서 수행해야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너무 동물 같아지면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집니다. 인간이 동물을 닮는다는 것은 너무 식욕이 많고 성욕이 많고 잠자는 욕구가 많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팔계를 지키면서. 정오 이후부터 먹지 않는 계를 지키겠다고 하고, 또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자는 것도 항상 깨어 있으려고 하고, 조금만 자려고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본능에 문제가 있어서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인간도 체질적으로는 동물 중의 하나입니다. 아주 똑똑하고 영리한 동물이지만 동물로 볼 때는 똑같은 세 가지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인간이 원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욕계를 모두 열한 개로 말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이 닿는 오욕락으로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욕계라 합니다. 우리가 선업 할 때 매 순간 힘이 다릅니다. 지금 스님이 법문할 때도, 할 때마다 법문하는 선업의 힘이 1초 1초 다르고, 한 마음 한 마음이 다릅니다. 죽기 직전에 그 마음 중에 힘이 센 마음을 기억하고 죽으면 신들 가운데도 상황이 아주 좋은 신으로 태어납니다. 신도 계급이 있습니다... 그것은 업의 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법문하는 것도 아주 열심히 할 때가 있고 조금 믿음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조금 헤맬 때가 있고 아주 지혜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업을 지을 때 계속 변수가 있습니다. 그 변수에 따라서 업들이 과보를 줄 때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업이 과보를 줄 때 선업의 힘 따라 신도 계급이 달라집니다. 지금 법문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법문 듣고 있으 때 내 마음이 어떤가? 믿음인가? 노력인가? 지혜인가? 집중인가? 얼마 정도 내가 투자했는가? 그것에 따라서 공덕을 받을 때도 사람들이 다 다르게 받습니다... 얼마나 큰 지혜와 믿음을 가지고 얼마나 노력했느냐에 따라서 그 업력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다 다릅니다.

④ 범천의 세상은 스무 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총 합쳐서 31천이 됩니다. 범천의 세상이 제일 많습니다... 색계 선정이 다섯 개, 무색계 선정이 네 개 있습니다... 무색계 선정이 네 단계이지만 그것은 대상의 차이일 뿐이고 선정의 계급으로 보면 모두 다 색계 오선정과 똑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무색계 범천은 더 이상 세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색계 선정은 초선에서 오선까지 다섯 단계가 있고 각 단계별로 오력(믿음 · 노력 · 사띠 · 집중 · 지혜)의 심도에 따라 다시 상 · 중 · 하의 세 계급으로 나누면서 총 5x3=15가지 색계 범천의 계급이 생깁니다. 여기에 하나 더, 특별하게 정신을 부정하는 범천이 있는데 그는 정신 세상이 없는 물질...로만 태어납니다... 그래서 색계 범천이 모두 열여섯 개가 됩니다. 색계 범천 열여섯 개와 무색계 범천 네 개로 범천의 세계가 모두 스무 개가 됩니다. 이렇게 31천 모든 세상을 부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429~433, (사)법승 담마야나(2017)

 

 

 

③ Saṅkhāra-loka형성 세상: 물질과 정신의 고유성질, 무상 · 고 · 무아의 공통된 성질도 분명하게 아신다.

  • Saṃ(함께, 완전히) + √kṛ(만들다, 행하다) → 결합·조합된 것, 결합·조합하는 작용(= both what put together and what have been put together)
  • 상카라는 함께 모여 조화롭게 잘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 조건들이 조화롭게 합해지지 못하면 서로 지탱되지 못하여 고장나거나 장애가 생긴다. 그래서 물질도, 정신도 모두 상카라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합해서 일 하나를 해낸다.
  • 이렇게 물질과 정신의 과정이 조건 따라 생기고 조건 따라 사라지면서 일을 하고 있다. 조건들이 사라지면 물질과 정신의 과정이 다 사라진다. 이렇게 '조건 따라 생멸하고 있는 세상'을 '상카라로까'라고 한다.
  • 삿따로까(중생계)와 오까사로까(공간계)가 상카라로까(인과계) 안에 들어간다.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물질과 정신, 내 몸과 마음, 밖의 세상, 다른 사람도 상카라로까다.
  •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원인과 조건들이 생기고 또 그것들이 어떻게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중생과 공간, 중생끼리, 공간끼리 어떻게 상호 작용하면서 이 세상이 돌아가는지를 다 아신다.
  • 부처님께서는 모르고 하는 것이 없으시다. 부처님께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지혜가 먼저 다 살펴본다. 무슨 일을 하시면 결과를 보고 하신다. 지혜로운 자는 때를 알아서 해야 되는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고 나서 결과가 좋은, 이익이 있는 일을 하신다. 우리들도 살면서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
38. 마찬가지로 그분께서는

"하나의 세상: 모든 중생은 음식으로 생존한다.
두 가지 세상: 정신과 물질.
세 가지 세상: 세 가지 느낌.
네 가지 세상: 네 가지 음식.
다섯 가지 세상: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
여섯 가지 세상: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
일곱 가지 세상: 일곱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
여덟 가지 세상: 여덟 가지 세간 법.³⁰³⁾
아홉 가지 세상: 아홉 가지 중생의 거처.³⁰⁴⁾
열 가지 세상: 열 가지 장소.³⁰⁵⁾
열두 가지 세상: 열두 가지 감각장소.
열여덟 가지 세상: 열여덟 가지 요소"

라고 상카라들의 세상을 모든 방면에서 아신다.

³⁰³⁾ 획득과 손실, 명성과 오명, 비난과 칭찬, 행복과 고통이 여덟 가지 세간법이다.(D.iii.358 참조)
³⁰⁴⁾ 몸도 다르고 인식도 다름, 몸은 다른데 인식은 하나임, 몸은 하나인데 인식이 다름, 몸도 인식도 하나라고 불리는 네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 이 네 가지에다 공무변처를 얻음, 식무변처를 얻음, 무소유처를 얻음의 셋을 더하여 일곱 가지 알음알이의 거주(viññāṇaṭṭhiti)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다 다시 인식도 없고 경험도 없는 무상유정과 비상비비상처 둘을 더하여서 아홉 가지 중생의 거처(sattāvāsa)라고 부른다.
³⁰⁵⁾ 열 가지 장소란 열두 가지 감각장소 가운데서 열 가지의 물질의 감각장소를 뜻한다(DAṬ.ii.69)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p.493~494, 초기불전연구원(2021)
셋째, 상카라로까(인과계). 상카라는 삼(잘), 까라(한다), 모든 것이 조화롭게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이렇게 지탱하는 것도 상카라입니다. 여러 가지 원인들이 조화롭지 못하면 몸이 아프거나 장애가 생기게 됩니다. 밥을 지을 때도 물의 양과 열과 시간과 밥솥이 적당해야 밥이 제대로 됩니다. 그것이 상카라입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서로서로 잘 합해지고 도우면서 뭔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상카라'입니다. 그래서 물질도 상카라이고, 정신도 상카라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이 공부하고 있는 것도 상카라입니다. 저도 여러 조건들이 같이 일해줘야 지금처럼 법문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법문을 들을 때 순서대로 제대로 이해하려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잘 합의가 되면서 호흡을 맞추어서 일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정신 과정이 상카라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엄청난 조건들이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그 정도로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합해서 일 하나를 해내고 있는데, 그것이 상카라입니다. 말 한 마디를 하려고 해도 엄청나게 힘든데, 다음에 수행하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입에서 말소리가 나오려면, 그리고 지금 하는 말이 앞뒤가 서로 연결되고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마음이 엄청나게 일하고 물질들이 엄청나게 일해야 합니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의 과정이 조건 따라 생기고 조건 따라 사라지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조건들이 사라지면 물질과 정신의 과정이 다 사라집니다. 이렇게 조건 따라 생멸하고 있는 세상을 '상카라로까'라고 합니다. 상카라로까가 제일 범위가 넓습니다. 삿따로까(중생계)와 오까사로까(공간계)가 상카라로까(인과계) 안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물질과 정신이 '상카라로까'입니다. 내 몸과 마음도 상카라로까이고 밖의 세상도 상카라로까이고 다른 사람도 상카라로까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삿따로까(중생계), 오까사로까(공간계), 상카라로까(인과계)를 다 아시는 로까위두(세상을 다 아시는 분) 입니다. 어떻게 원인과 조건들이 생기고 또 그것들이 어떻게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중생과 공간, 중생끼리, 공간끼리 어떻게 상호 작용하면서 이 세상이 돌아가는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삿따로까(중생계)를 안다고 할 때, 전체도 알지만 개개인도 다 아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중생은 어떤 중생이다.' 즉 화가 많은지, 욕심이 많은지, 질투가 많은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런 것을 파악하여 알고 계십니다. 이 중생이 깨닫기 위해서 다 익었는지 덜 익었는지, 이 중생은 가르치면 이익이 있겠다거나 혹은 소용이 없겠다고, 이런 것을 다 아십니다. 이제 때가 되었다거나 혹은 아직 멀었다거나, 가르치면 얼마 정도 알겠다고, 이런 것을 알면서 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르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지혜가 앞장서서 먼저 다 살펴봅니다. 우리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일을 마구잡이로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해도 미래에 어떻게 되는지 조금도 예측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을 시작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다시 바꾸고 갈팡질팡합니다. 부처님은 그런 경우가 전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면 결과를 보고 하십니다. 우리도 많이는 못 보더라도 조금은 보려고 해야 됩니다... 미래를 아는 신통력이 그런 것입니다... 지혜라는 것이 단계별로 있습니다. 우리도 '내가 이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내가 지금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될 수가 있다.'라고 조금씩은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때를 알아서 해야 되는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했다면 하고 나서 결과가 좋아야 됩니다. 결과가 좋으려면 할 만한 일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도 어느 때는 보기에 조금 잔인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일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당신을 매우 좋아하여 수행은 하지 않고 매일 부처님만 따라다니는 제자 스님을 쫓아냈습니다. 또 스님들이 몇 백 명이 와서 너무 시끄럽게 떠들기 때문에, 가르치기 위해서 "너희들은 선원에 들어오지 마라."라고 하시면서 쫓아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스님들은 밖에서 부처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합니다. 부처님은 화가 없지요.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슨 이익이 있다면 다 하십니다. 우리들도 살면서 그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온 세상을 아는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것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아주 축복받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완벽하게 알기 때문에 사견이 아예 없습니다. 세상을 통틀어서 알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가 바른 견해입니다. 그런 분의 가르침이 얼마나 좋은지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433~436, (사)법승 담마야나(2017)

 

 

④ lokassa anta세상의 끝: 괴로움의 끝인 열반을 상징한다. 팔정도를 닦아 여섯 감각장소로 인식되는 경험된 세상(고성제)의 끝에 도달하여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한다.

 

이렇게 3가지 모든 세상을 꿰뚫어 아시는 로까위두께서는 마지막으로 세상의 끝lokassa anta에 대해 설하신다.

 

중생 세상도, 공간 세상도, 형성된 세상도 모두 괴로움이다.

즉 lokassa anta에서 말씀하시는 세상loka이란 괴로움이며, 세상의 끝이란 '괴로움의 끝', 즉 '열반'을 상징한다.

36.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아시기 때문에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고유성질에 따라, 일어남에 따라, 소멸에 따라, 소멸에 이르는 방법에 따라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아셨고, 경험하셨고, 통찰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도반이여, 나는 태어나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 그런 곳을 직접 가서 세상을 끝을 알아야 하고 보아야 하고 도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도반이여, 그렇다고 나는 그런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도 괴로움의 끝을 성취하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가진 이 한 길 몸뚱이 안에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 있음을 천명한다.

여행으로써는 결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아는 자, 슬기로운 자, 세상의 끝에 도달한 자, 청정범행을 완성한 자, 고요한자,
그는 세상의 끝을 알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S.i.62)"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492, 초기불전연구원(2021)
세상의 끝을 향해 걸어간다고 해서 결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로까(세상)는 상카라로까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의 끝을 볼 수만 있다면 이 지구에서 우주의 그 어떤 별까지도 걸어가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래도 세상의 끝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끝에 도착하면 고통이 끝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주 과학이 발달하여 우주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주의 끝에 갈 수 있다고 해도 가 봤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날까요? 우리가 여기서 화성까지 갈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벗어나지 못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세상의 끝에 가려고 한다면 죽어도 끝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의 끝까지 가지 않아도 고통을 끝낼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진실로 세상을 꿰뚫어 아는 지혜로운 자는, 세상의 끝(닙바나)에 도달한 분이고 도성제라는 성스러운 법을 실천 수행하는 것을 완성한 고귀한 삶을 사는 분이다.

로깐다구는 로까(세상의)와 안따구(끝에 도달한 분)의 합성어입니다. 로깐다구는 세상의 끝을 보고 그 끝인 닙바나에 도달한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는 세상의 끝을 보았다. 나는 브라흐마짜리야(고귀한 삶을 사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모든 업을 제거한 고요한 자는 세상의 끝을 알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426~428, (사)법승 담마야나(2017)

 

 

세상의 끝에 대한 이야기는 「로히땃사 경」에 자세히 나온다.

중생은 보이는 세상(고성제)의 끝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만, 로까위두께서는 세상이란 고성제의 끝은 멸성제로만 끝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 「로히땃사 경」에서 천신 로히땃사는 보이는 세상, 즉 오까사 로까의 끝에 도달하는 방법을 묻는다. 경에서 로히땃사는 성자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범부는 중생의 세상(satta-loka)과 우주로서의 세상(cakkavāḷa-loka)만을 두고 세상이라고 인식하고 지각한다.
  • 로까위두께서는 보이는 세상의 끝은 걸어서, 날아서, 여행으로 도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형성된 세상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는 세상의 끝남이란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의미 없는 쳇바퀴만이 지속될 뿐이다.
  • 그렇지만 어떤 문제든 간에 그 문제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끝을 성취할 수 없다.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그 문제를 초월하여 그것으로부터 해탈할 수 없다. 끝을 본 자만이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이것은 의미론적인 이야기다.
  •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다. 세상, 즉 형성된 것이란 부서진다(lujjati)고 해서 세상(loka)이라고 이름붙인다. 형성된 세상의 부서짐(bheda), 수행적으로는 유위법(saṅkhata-dhammā)의 '멸', 여기서는 '끝'이라고 불리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세상(괴로움)의 끝(→ 이것을 열반이라 부른다)'을 성취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위빳사나, 궁극적 실재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다.
  • '세상'이란 무엇인가? 눈·귀·코·혀·몸·마노의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로 인식되고 지각되는 것이다.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 육내외처가 세상이다. 다른 세상은 없다. 안의 감각장소가 없으면 세상이라는 명칭도 없다. 눈 등의 12가지 감각장소(āyatana)를 떠나서 세상이라는 인식이나 지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눈이 없으면 세상을 볼 수 없는 맹인인 것처럼, 통찰지의 눈이 없으면 빠라맛타 세상을 볼 수 없는 맹인인 것과 같을 것이다.
  • 따라서 세상이란 경험된 세상 즉 고성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주선을 타고 여행을 가도 거기서는 세상은 경험된 것일 뿐이기에 세상의 끝에는 도달할 수 없다.
  • 그러므로 세상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섯 감각장소라는 상카라의 끝에 도달하는 수밖에 없다. 그 방법은 팔정도를 닦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팔정도를 실천함을 통해서 경험된 세상일 뿐인 세상의 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 로까위두께서는 "나는 이러한 네 가지 진리를 풀이나 나무등걸 등에서 천명하지 않는다.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바로 이 몸에서 천명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나는 인식과 마음을 가진 이 한 길 몸뚱이 안에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 있음을 천명한다."라고 말씀하셨다.
  • 외부 세상이나 외부 대상이 아닌 내 오온에서 세상[고 = 여섯 감각장소]과 그 집 · 멸 · 도를 설하셨다. 나고 죽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내 안에서, 그것도 바로 지금 · 여기에서 해결한다.
로히땃사 경(S2:26)
Rohitassa-sutta

"세존이시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³²⁹⁾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가 있습니까?

³²⁹⁾ "여기서 '세상(loka)이란 형성된 세상(saṅkhāra-loka), 즉 오취온을 말씀하신 것이다." (AA.iii.87)
"신의 아들은 세계로서의 세상(cakkavāḷa-loka, 즉 기세간)의 끝(anta)을 질문하였고 세존께서는 형성된 세상(saṅkhāra-loka)의 끝으로 답을 하고 계신다." (SA.i.116)
"형성된 세상의 끝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 다음의 진리들(즉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형성된 세상의 끝이 참으로 열반이기 때문이다." (AAṬ.ii.275)

한편 주석서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okāsa-loka), 중생 세상(satta-loka), 형성된 세상의 세 가지 세상이 있다." (DA.i.173)고 설명한다.
① 보이는 세상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세상으로 눈에 보이는 이 물질적인 세상, 즉 중국에서 기세간(器世間)으로 이해한 것을 말한다.
② 본서 제3권 「꽃 경」 (S22:94) §3에서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다툴 뿐이다."라고 하신 세상은 바로 중생으로서의 세상을 뜻한다. 중국에서는 중생세간으로 정착이 되었다.
③ 모든 형성된 것(saṅkhata)을 형성된 세상이라 한다. 물론 형성된 세상은 모든 유위법(...saṅkhata-dhammā)을 뜻하며 오취온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오취온은 고성제의 내용이기도 하다. 『청정도론』 VII.37 이하도 참조할 것.

본경에서 로히땃사는 보이는 세상 즉 기세간으로서의 세상의 끝에 도달하는 것을 말하고 있고, 위에서 인용한 주석서와 복주서의 설명처럼 세존께서는 이것을 형성된 세상 즉 유위법으로 승화시켜서(고성제) 이를 바탕으로 집성제와 멸성제와 도성제를 드러내시고, 그래서 형성된 세상의 끝인 열반을 드러내고 계신다.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3. "세존이시여, 저는... 신통을 가져서 하늘을 날아다녔습니다... 이러한 속력을 갖추었고 이러한 큰 걸음걸이를 가졌기에 제게는 '나는 걸어서 세상의 끝에 도달하리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제겐 아직 백년의 수명이 남아있어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것을 제외하고 대소변보는 것을 제외하고 수면과 피로를 제거하는 것을 제외하고 백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걸었지만 세상의 끝에는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말았습니다."...

4.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³³⁰⁾

³³⁰⁾ 세상의 끝, 즉 형성된 세상의 끝, 오취온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결코 윤회의 괴로움의 끝이란 없다는 없다는 말씀이시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천명하노라."³³¹⁾

³³¹⁾ "'세상'이란 괴로움의 진리(dukkha-sacca)이다. '세상의 일어남'이란 일어남의 진리(samudaya-sacca)이다. '세상의 소멸'이란 소멸의 진리(nirodha-sacca)이다.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란 도의 진리(magga-sacca)이다. 세존께서는 '도반이여, 나는 이러한 네 가지 진리를 풀이나 나무등걸 등에서 천명하지 않는다.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바로 이 몸에서 천명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SA.i.117~118; AA.iii.88~89)

세존의 이 가르침은 이미 세존 당시에도 유명했던 명제였던 것 같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도반들이여, 눈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세상을 인식하는 자가 있고 세상을 지각하는 자가 있습니다. 귀를 통해서... 코를 통해서... 혀를 통해서... 몸을 통해서... 마노를 통해서 이 세상에는 세상을 인식하는 자가 있고 세상을 지각하는 자가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이것을 두고 성자의 율에서는 세상이라 말합니다."(S35:116 §12)라고 풀이하고 있다.

즉 여섯 감각장소를 통해서 인식되고 지각되는 것이 세상이지 다른 세상은 없다는 말씀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이란 경험된 세상 즉 고성제일 뿐이다. 이것은 『디가 니까야』 「범망경」 (D1)의 입장과도 같다. (D1 §3.71 참조) 그러므로 아무리 우주선을 타고 여행을 가도 거기서는 세상은 경험된 것일 뿐이기에 세상의 끝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섯 감각장소의 끝에 도달하는 수밖에 없으며 12연기 가르침에 의하면 여섯 감각장소는 무명과 갈애에 조건지워졌기 때문에... 이것을 없앰으로 해서 여섯 감각장소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때 세상의 끝에 도달하게 된다. 그 방법은 팔정도를 닦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팔정도를 실천함을 통해서 경험된 세상일 뿐인 세상의 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본 「로히땃사 경」 은 남방불교에서 잘 알려진 경이다. 특히 이 마지막 구절은 남방의 스님들이 즐겨 인용하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내 오온에서 세상[고 = 여섯 감각장소]과 그 집 · 멸 · 도를 설하셨다. 나고 죽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내 안에서, 그것도 바로 지금 · 여기에서 해결하게 하려는 것이 불교의 가장 큰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5. [세존]
"걸어서는 결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남도 없다네.

그러므로 세상을 알고 슬기롭고
세상의 끝에 도달했고 청정범행을 완성했고
모든 악을 가라앉힌 자는 이 세상의 끝을 알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네."

- 각묵 스님 옮김, 『상윳따 니까야』 제1권 pp.312~315, 초기불전연구원(2021)
세상 경(S35:82)
Loka-sutta

...3. "세존이시여, '세상, 세상'이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왜 세상이라고 합니까?"

4. "비구여, 부서진다고 해서 세상이라 한다.⁸⁰⁾ 그러면 무엇이 부서지는가?

⁸⁰⁾ ...세상(loka)을 부서진다(lujjati)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설명하고 계신다. 그러나 어원학적으로 보면 loka는 lujjati(√luj, to break)와 관계가 없다...

눈은 부서진다. 형색은... 눈의 알음알이는... 눈의 감각접촉은...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부서진다.

귀는... 소리는... 귀의 알음알이는... 귀의 감각접촉은... 느낌은...
코는... 냄새는... 코의 알음알이는... 코의 감각접촉은... 느낌은...
혀는... 맛은... 혀의 알음알이는... 혀의 감각접촉은... 느낌은...
몸은... 감촉은... 몸의 알음알이는... 몸의 감각접촉은... 느낌은...
마노는... 법은... 마노의 알음알이는... 마노의 감각접촉은... 느낌은 부서진다.

비구여, 부서진다고 해서 세상이라 한다."⁸¹⁾

⁸¹⁾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와 이들에 의해서 인식되고 지각되는 것이 세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육내외처)를 세상이라고 하고 있는 본서 「세상의 끝에 도달함 경」 (S35:116) §12도 참조할 것.

- 각묵 스님 옮김, 『상윳따 니까야』 제4권 pp.178~179, 초기불전연구원(2019)
세상의 끝에 도달함 경(S35:116)
Lokantagamana-sutta

3.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¹⁶⁸⁾...

¹⁶⁸⁾ ...본경은 「로히땃사 경」 (S2:26)의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12. "도반들이여, 이 세상에서 세상을 인식하는 자와 세상을 지각하는 자는 그 어떤 것을 통해서 [인식하고 지각]하는데, 그것을 두고 성자의 율에서는 세상이라 말합니다.¹⁷⁰⁾

¹⁷⁰⁾ ...즉 여섯 감각장소를 통해서 인식되고 지각되는 것이 세상이지 다른 세상은 없다는 말씀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이란 경험된 세상일 뿐이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세상을 인식하는 자가 있고 세상을 지각하는 자가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눈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세상을 인식하는 자가 있고 세상을 지각하는 자가 있습니다.¹⁷¹⁾ 귀를 통해서... 코를 통해서... 혀를 통해서... 몸을 통해서... 마노를 통해서 이 세상에는 세상을 인식하는 자가 있고 세상을 지각하는 자가 있는데, 이것을 성자의 율에서는 세상이라 말합니다."

¹⁷¹⁾ "눈은 세상에서 거부할 수 없는 것(appahīna)이다. 범부는 중생의 세상(satta-loka)과 우주로서의 세상(cakkavāḷa-loka)만을 두고 세상이라고 인식하고 지각한다. 그러나 눈 등의 12가지 감각장소(āyatana)를 떠나서 [세상이라는] 인식이나 지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끝을 향해서] 가는 것(gamana)을 통해서 이 세상의 끝(lokassa anta)을 알거나 보거나 얻거나 할 수 없다. 무너진다는 뜻(lujjan-aṭṭha)에서 눈 등의 부서짐(bheda)인 세상의 끝(lokassa anta) - 이것을 열반이라 부름(nibbāna-saṅkhāta) - 을 얻지 못하고서는 윤회의 괴로움(vaṭṭa-dukkha)을 끝내는 것(anta-kiriy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아야 한다."(SA.ii.389)

"눈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인식하는 자가 있다. 그것이 없으면 인식하는 자도 없다. 안의 감각장소(ajjhattik-āyatana)가 없으면 세상이라는 명칭(loka-samaññā)도 없기 때문이다." (SAṬ.iii.25)

무너진다는 뜻에서 여섯 감각장소를 세상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본서 「세상 경」 (S35:82) §4를 참조할 것.


- 각묵 스님 옮김, 『상윳따 니까야』 제4권 pp.254~259, 초기불전연구원(2019)

 

 

감각장소는 āyatana를 옮긴 것이다.

  • ā-(~의 방향으로) + √yat(뻗다, to stretch) + -ana(명사형 접미사)로 하여 "마음·감각이 뻗어가는 곳", 혹은 "~를 향해 뻗어있는 자리, 기반, 영역"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 아야따나는 물리적 장소를 주로 의미했고, 이것이 감각·의식의 문 또는 영역의 의미로 확장되었다. 따라서 감각작용과 관계된 곳에서는 육입처럼 '입'이나 '감각장소'로, 장소를 의미할 때는 '처'라는 번역어로 주로 쓰인다.
  • 12처는 감각접촉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처로 옮기는 것으로 보인다.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노와 법이 만나 감각접촉이 일어난다. 형상은 자기를 드러내고 눈은 형상을 즐긴다. 나머지도 그와 같다. 이 12처는 감각작용의 의지처이다.
  • 모든 잘못된 견해는 6가지 안의 감각장소, 6가지 밖의 감각장소, 이들의 감각접촉에 의해 발생한다. 감각접촉이 '느낌 - 갈애 - 취착 - 존재 - 태어남 - 노사 우비고뇌'를 생기게 한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6가지 감각장소에서 일어나는 감각접촉들의 일어남, 사라짐, 달콤함, 위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견해의 그물, 견해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1. 감각장소(처)에 대한 상세한 주석
Āyatana-vitthāra-kathā

1. 감각장소³¹⁸⁾라는 것은 12가지 감각장소들이다. 즉 눈의 감각장소, 형상(색깔)의 감각장소, 귀의 감각장소, 소리의 감각장소, 코의 감각장소, 냄새의 감각장소, 혀의 감각장소, 맛의 감각장소, 몸의 감각장소, 감촉의 감각장소, 마노의 감각장소, 법의 감각장소이다.

³¹⁸⁾ 감각장소로 옮긴 'āyatana'는 ā + √yam(to extend)나 ā + √yat(to stretch)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중국에서는 '이쪽으로 온다'는 문자적인 의미를 중시하여 入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또 이 단어가 장소(base, sphere)의 의미로 쓰이므로 處라고 옮기기도 하였다. 보통 12연기에서는 육입으로, 12처와 공무변처 등의 4처는 처로 옮기고 있다. 역자는 감각작용과 관계된 육입이나 12처는 감각장소로 옮기고 4처는 장소로 옮긴다. 물론 처로 옮길 때도 있다...

3. (1) 뜻에 따라: 먼저 개별적으로 설명한다.

즐긴다(cakkhati)고 해서 눈이라 한다. 형상(색깔)을 즐긴다, 형상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자기를] 드러낸다고 해서 형상(색깔)이라 한다. 안색의 변화를 겪으면서 마음속에 품은 뜻을 나타내 보인다는 뜻이다.

듣는다고 해서 귀라 한다.
발음한다고 해서 소리라 한다. 발성한다는 뜻이다.

냄새 맡는다고 해서 코라 한다.
냄새 맡아진다고 해서 향기라 한다. 자기가 의지한 장소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생명을 부른다고 해서 혀라 한다.
중생이 그것을 맛본다고 해서 맛이라 한다. 즐긴다는 뜻이다.

혐오스럽고 번뇌에 물들기 쉬운 법들의 입구라고 해서 몸이라 한다. 입구라는 것은 생기는 장소라는 뜻이다.
닿는다고 해서 감촉이라 한다.

생각한다고 해서 마노라 한다.
자신의 특징을 가진다고 해서 법이라 한다...

6. 다시 ① 눈 등에는 여러 가지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머문다. 그 [마음과 마음부수들]은 그 [눈 등]을 의지하여 머물기 때문에 눈 등은 그들이 머무는 장소이다. 그들은 눈 등에서 일어난다. ② 눈 등을 의지하며 형상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눈 등은 그들의 광산이다. ③ 눈 등의 그들이 만나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토대(vatthu)로, 문(dvāra)으로, 대상(ārammaṇa)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④ 눈 등은 그들의 출산지이다. 그들을 의지처로, 대상으로, 바로 그곳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⑤ 눈 등은 그들의 원인이다. 그들이 없을 때 그 [마음과 마음부수도] 없기 때문이다.

7. ...눈이 곧 그 장소(아야따나)이기 때문에 눈의 [감각]장소라 부른다. 법(dhamma)이 곧 그 장소이기 때문에 법의 [감각]장소라고 부른다...

10. 눈의 감각장소는 눈의 알음알이의 인식과정에 포함된 알음알이의 무리가 일어날 문이고 형상의 감각장소는 대상이다. 다른 것들도 다른 것들에게 이와 같다. 잠재의식(바왕가)이라 불리는 마노의 감각장소의 한 부분이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나는 문이고 공통되지 않는 법의 감각장소가 대상이다. 이와 같이 여섯 알음알이의 무리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문과 대상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12가지를 설하셨다...

13. (5) 간략하고 상세하게: 간략하게 설하면 마노의 감각장소와 법의 감각장소의 일부분은 정신(nāma)이고 나머지 감각장소들은 물질(rūpa)에 포함되기 때문에 열두 가지 감각장소들은 정신 · 물질일 뿐이다...

16. 그리고 안의 감각장소는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함, 아름다움, 행복함이 없기 때문이다. 밖의 감각장소는 마을을 약탈하는 강도처럼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각각에 해당하는 안의 감각장소들을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눈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형상에 의해 혹사당한다.(S.iv.175)" 이것이 상세하게 보는 것이다. 다시 안의 감각장소는 여섯 가지 동물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밖의 감각장소는 그들이 머무는 장소로 보아야 한다.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2권』 pp.505~512, 초기불전연구원(2020)
62견은 조건발생이요 괴로움을 생기게 한다

3.71. "비구들이여, 여기서 영속론자인 사문·바라문들도, 일부영속 일부비영속을 설하는 사문·바라문들도...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단언하는 사문·바라문들도 - 그들 모두는 여섯 가지 감각장소들을 통해 [갖가지 대상과 맞닿아] 계속해서 일어나는 감각접촉으로 인해 [사견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런 느낌이 그들에게 갈애를 생기게 하고, 갈애는 취착을 생기게 하고, 취착은 존재를 생기게 하고, 존재는 태어남을 생기게 하고, 태어남은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을 생기게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가지 감각접촉이 일어나는 감각장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¹⁶⁶⁾ 이것이 이들 모든 [견해들]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꿰뚫어 안다."

¹⁶⁶⁾ 62견은 결국 지금여기에서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와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와 이들의 감각접촉에 기인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각접촉들을 일어남 등의 다섯 가지 방법으로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62견을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제시하신다.

- 각묵 스님 옮김, 『디가 니까야』 제1권 pp.176~177, 초기불전연구원(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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