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는가. 인식과정은 아비담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4장)
1.
제4장 인식과정의 길라잡이
vīthicitta-saṅgaha-vibhāga
'인식과정'으로 옮긴 vīthi-citta는 vīthi(과정)와 citta(마음)의 합성어이다³³⁴⁾... '길, 진로, 과정'의 뜻으로 쓰인다. 아비담마에서는 여기서처럼 citta와 함께 쓰여 마음이 진행되어 가는 진로나 과정을 뜻하는 전문용어로 사용되며 vīthi 단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영어로는 cognitive process라고 정착되고 있다... citta-vīthi로 나타나기도 한다.
³³⁴⁾인식과정(vīthi-citta)이라 할 때의 '인식'과 오온이나 심소법으로서의 '인식(saññā)'은 전혀 다른 별개의 용어이다. 인식과정의 인식은 심리학에서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일련의 정신 과정'으로 정의하는 인지나 '감각 기관을 통하여 주변에 있는 대상 등을 의식하는 작용'으로 정의하는 지각과 상통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Vīthi-citta는 '[대상을 아는] 과정에 있는 마음'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인식과정'으로 의역하였음을 밝힌다.
제 1장에서 우리는 상좌부 아비담마에서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ārammaṇaṁ cintetīti cittaṁ, DhsA.63)고 마음을 정의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마음은 이렇게 대상을 아는 것으로서는 하나이지만 그 일어나는 곳과 종류 등의 기준에 따라서는 89/121가지로 나누어짐을 보았고 다시 제3장에서 느낌과 원인과 역할과 문 등에 따라서 다양하게 작용함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 장에서는 '마음은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법칙(niyama)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인식과정은 아비담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110-114
...'마음'으로 옮긴 빠알리어 citta는 √cit (to think, to cognize, to know)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빠알리 주석서들은 전통적으로 마음(citta)을 세 가지 측면에서 정의한다. 그것은 행위자(kattā, agent)와 도구(kāraṇa, instrument)와 행위 그 자체(kamma, activity)이다.
먼저 행위자의 측면에서는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라고 정의하고, 도구의 측면에서는 "[이것으로] 인해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라고 정의한다. 행위 그 자체의 측면에서는 "단지 알고 있는 그 자체가 마음이다."라고 정의한다...
마음은 아는 행위를 떠나 그 자신 안에 실재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는 행위자도 아니요 도구도 아니다. 행위자나 도구라는 표현으로 마음을 정의하는 것은 영원한 자아(attā, Sk. atman)가 바로 '아는 행위자나 도구'라는 힌두교적 견해를 논박하기 위해서이다. 불교 논사들은 이런 정의로써 자아가 아는 행위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마음 혹은 알음알이가 그렇게 할 뿐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알음알이란 단지 아는 행위일 뿐이고 그 행위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필히 무상한 것이다...
여러 논서와 주석서에서는 마음을 '생각하는 혹은 식별하는 행위(cintana 혹은 vijānana)'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위바위니 띠까」 는 「담마상가니」 를 인용하여 마음을 '대상을 식별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대상이 없이는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빠라맛타디빠니 띠까」 에서도 "아는 작용은 항상 대상을 기대한다. 그것은 대상이 없이는 얻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citta)이란 '대상을 앎'이다. 단지 대상의 존재를 알거나 식별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마음이라 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 citta(마음)와 mano(마노)와 viññāṇa(알음알이)는 동의어로 여겨진다.¹²⁵⁾ 이 셋은 우리의 마음을 나타내는 술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역할이나 문맥에 따라서 다르게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마음[심, citta]은 감각장소[처, āyatana]의 측면에서는 마노의 감각장소[의처]로, 기능[근, indriya]의 측면에서는 마노의 기능[의근]으로 나타나지만 무더기[온, khandha]의 측면에서는 알음알이의 무더기[식온]로 나타나고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여섯 가지 알음알이[6식]로 나타난다. 그리고 요소[계, dhātu]의 측면에서 마음은 눈의 알음알이의 요소[안식계] 등의 전오식의 요소와 마노의 요소[의계]와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의식계]로 7가지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¹²⁵⁾...알음알이[식]로 옮기는 viññāṇa는 동사 vijānāti(vi + √jñā, to know)에서, 마음[심]으로 옮기는 citta는 동사 cinteti(√cit, to think)에서, 마노[의]로 옮기는 mano는 동사 maññati(√man, to conceive)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vijānāti를 '알다'나 '식별하다'로, cinteti를 '생각하다'나 '알다'로, maññati를 '사량하다'로 옮기고 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혹은 식별하는 혹은 생각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다양하게 일어나더라도 안다는 특징으로만 본다면 하나이지만 그 하나인 마음을 아비담마에서는 여러 유형으로 구분짓고 있다. 이런 유형들은 복수로 '마음들'이라고 표현하는데 89가지로, 더 자세하게는 121가지로 구별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는 마음들의 흐름(citta-santati), 즉 마음들이 찰나적으로 생멸하며 상속하는 것이다. 이들이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따로따로 분리된 여러 유형으로 우리가 간파하지 못할 뿐이다. 아비담마는 이런 유형의 마음들을 상세하게 구분해낸다.
2.
그러면 이 인식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전제 조건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첫째, 모든 마음은 대상을 가진다. 그 어떤 마음이든 마음은 반드시 대상과 함께 일어난다. 그래서 하나의 인식과정은 모두 하나의 같은 대상을 두고 일어난다...
둘째, ... 마음은 물질보다 16배 빠르다. 그래서 하나의 물질이 머물 때 최대 16번의 마음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진다는 것도 아비담마에서 중요한 전제이다...
(아래 소괄호로 삽입한 한글 표현은 필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청정도론 XX]: "24. 하나의 물질이 머물 때(rūpe dharante / dharati: lasts, continues / 필자 주: 머무는 아찰나에) 열여섯 번의 존재지속심이 일어나고 (머물고) 멸한다. 마음은 일어나는 (아)찰나(uppāda-kkhaṇa)와 머무는 (아)찰나(ṭhiti-kkhaṇa)와 멸하는 (아)찰나(bhaṅga-kkhaṇa)의 [길이]가 모두 같다. 물질은 일어나는 (아)찰나와 멸하는 (아)찰나에만 빠른 것이 [심(아)찰나들과] 같다. 머무는 (아)찰나는 길어서 열여섯 개의 마음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멸하는 만큼 머문다."
셋째, 이 두 가지 전제 조건이 결합하여 인식과정은 한 대상을 조건으로 하여 최대 17심찰나를 넘지 못한다고 본서는 단언한다. 마음은 하나의 물질이 머물 때(rūpe dharante) 16번 이상을 일어날 수 없으니 그 물질이 일어나는 찰나에 개재되어서 흘러가버린 지나간 바왕가(atīta-bhavaṅga)까지 포함하면 17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식과정의 중요한 밑그림이다.
'찰나'는 영어로 moment,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제시한 용어인 '아찰나'는 영어로 sub-moment 라고 정착되어져 있다.
찰나는 1) 일어나고 2) 머물고 3) 사라지는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 각각의 단계를 아찰나라고 정의한다.
즉, 찰나는 '일어났다가 없어졌다'는 뜻과 같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아래와 같다. 밑변이 없는 사다리꼴 모양이다.
심찰나를 기준으로 설명하면 심찰나는 3아찰나와 같다.
물질찰나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심찰나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같다. 즉, 2아찰나이다.
물질찰나의 머묾은 16심찰나와 같다. 즉, 48아찰나이다.
따라서 물질찰나는 16과 2/3 심찰나, 혹은 50아찰나와 같다.
결론적으로, 물질찰나의 수명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첫째, '1/3 아찰나 + 16 심찰나 + 1/3 아찰나 = 16과 2/3심찰나'이다.
그러나 2/3 마음이라는 것은 없다. 이것을 1로 하면 17심찰나와 같다.
둘째, 물질이 일어날 때는 너무나 빨라서(=심찰나의 일어남 아찰나) 부처님도 물질이 일어나는 아찰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물질이 일어나는 아찰나를 볼 수 없다. 따라서 이때 바왕가가 하나 흘러가버린다.
이 '지나간 바왕가'와 이후 물질이 머무는 동안 이어지는 16개의 마음을 더해 17개 마음, 17심찰나라고 말한다.
하나의 인식과정은 하나의 대상을 가진다.
하나의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17개의 마음 역시 각각 하나의 같은 대상을 두고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진다.
대상은 정신이거나 물질이다. 정신은 1심찰나를 넘지 못하고, 물질은 17심찰나를 넘지 못한다.
하나의 대상은 아무리 길게 머무르더라도 17개의 마음, 17심찰나를 넘지 못하고 사라진다.
따라서 인식과정은 한 대상을 조건으로 최대 17심찰나를 넘지 못한다고 책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넷째, 이렇게 최대 17번 일어나는 마음들은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법칙에 따라서 선후의 순서가 분명하게 정해져서 일어난다고 아비담마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이런 엄격한 법칙에 따라서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을 아비담마에서는 찟따니야마(citta-niyama), 즉 '마음의 정해진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런 인식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엄격한 법칙을 알게 되고 그래서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던 우리 마음을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마음의 여러 현상이나 경계에 속지 않고 해탈 열반의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이것이 아비담마를 공부하는 가장 큰 목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인용 출처: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초기불전연구원(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