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초기불교

바람의 요소, 몸의 암시, 몸에 대한 마음챙김 Q&A

Rihan 2023. 6. 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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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의 이론적 원리와 실천적 방법에 관한 필자와 선배 도반과의 문답 내용이다.

 

Q.

먼저 물질에 대한 제 이해가 정확한지 여쭙습니다.

모든 물질은 깔라빠 상태로 존재하고, 모든 깔라빠들은 8 아위닙보가를 지닌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생긴 깔라빠 중 몸의 암시의 구원소는 8 아위닙보가에 몸의 암시를 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비담마 길라잡이 2권 P.51~52에 나온 몸의 암시에 관련한 청정도론의 설명에서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제가 궁금했던 대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61. 마음에서 생긴 바람의 요소가 앞으로 나아가는 등의 행동을 생기게 한다. 이 바람의 요소의 형태 변화(ākāra-vikāra)를 몸의 암시라 한다. 이것은 함께 생긴 물질인 몸을 뻣뻣하게 하고 지탱하고 움직이게 하는 조건이다. 이것의 역할은 의도하는 것을 넌지시 알리는 것이다. 몸을 움직이는 원인으로 나타난다. 이것의 가까운 원인은 마음으로부터 생긴 바람의 요소이다. 이것은 몸의 움직임을 통하여 의도한 것을 알리는 원인이고 또 그 자체가 몸을 통하여, 즉 몸의 움직임을 통하여 알아져야 하기 때문에 몸의 암시라 한다. 이 몸의 암시는 마음에서 생긴 물질을 움직인다. 또한 온도에서 생긴 물질 등도 이 마음에서 생긴 물질과 서로 연관되어 있는데 그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행동 등이 생긴다고 알아야 한다."

위 문구를 제가 이해하기로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1) 마음에서 가고자 하는 생각이 일어날 때 마음에서 생긴 깔라빠가 일어납니다.
2) 이 마음에서 생긴 깔라빠의 ‘바람의 요소’를 원인으로 하여 ‘몸의 암시의 구원소’ 깔라빠가 일어납니다.
3) ‘몸의 암시의 구원소’ 깔라빠가 가고자 하는 의도를 수행할 신체 기관으로 퍼져 몸이 움직입니다.

이 메커니즘이 맞을까요?

 

A.

예. 저도 기본적으로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조건’ ‘연기’가 이해되면 자연스럽게 이해될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의 조건은 ‘하나의 원인 - 하나의 결과의 흐름’이 아니고 ‘여러 가지 원인 - 여러 가지 결과의 흐름’이라고 하지요.

하나의 깔라빠 단위로 사유하는 상황이라면 법우님 설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물질 역시 깔라빠 단위로, 그것도 여러 깔라빠가 함께 일어나서 함께 흘러가는 것이 기본이겠지요. 이러한 전체적인 사유는 ‘조건’ ‘연기’를 통해 종합적인 조망이 가능할 것입니다.

다만, 실제 수행에서 관찰하는 부분은 전혀 다른 측면이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 관찰할 때는 ‘가장 분명한 하나의 대상, 가장 분명한 하나의 법’을 관찰하게 됩니다. 깔라빠 단위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지요. 물질도 그렇고 정신도 그렇고요.

아비담마를 설명하는 문맥과 실제 수행 관찰의 문맥 역시 이렇게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Q.

맛지마 니까야 1권 P.336-337(M10) 368번 주해 내용이 아래와 같습니다.

“…'무엇으로 인해 가는가?'라는 것은 마음의 작용에서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으로 인해 간다.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가리라'고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바람을 생기게 하고 바람은 암시(viññatti)를 생기게 하여 마음의 작용에서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서 온몸이 앞으로 움직이면 그것을 '가는 것'이라고 부른다. 서 있는 등의 경우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MA.i.251)

위 1번 질문 사항과 비슷한 내용인데요.
여기서는 특히 아래 2가지가 궁금했습니다.

1) “‘가리라’고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바람을 생기게 하고”라는 말은 마음에서 생긴 깔라빠에 8 아위닙보가가 모두 있지만, ‘바람의 요소’를 원인으로서 강조한 것이 맞을까요?
2) “마음의 작용에서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서 온몸이 앞으로 움직이면”이라는 말은 ‘몸의 암시의 구원소’의 깔라빠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 맞을까요?

 

A.

예. 여기서도 깔라빠 단위로 물질은 생멸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깔라빠 단위로 사고하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암시의 물질은 ‘마음에서 생긴 깔라빠’와 관련되고, ‘마음에서 생긴 깔라빠’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2권 82쪽에 여섯 가지로 해서 나와 있습니다.

‘몸의 암시’ ‘말의 암시’라는 물질은 ‘몸의 업’ ‘말의 업’과 관련된 물질이라는 점이 대전제지요. 몸으로 짓는 업, 말로 짓는 업에는 이 암시의 물질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때에도 욕계인 경우는 업에서 생긴 깔라빠 등도 당연히 함께 존재하고 그럴 수 있지요.

따라서 ‘온몸이 앞으로 움직이면’에 ‘몸의 암시의 구원소’의 깔라빠가 작용하는 것은 맞겠지만 그 깔라빠만 개입되어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되겠지요. 실제는 ‘업에서 생긴 깔라빠 등’도 당연히 함께 작용하고 있겠지요. 다만 ‘마음의 작용에서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서’라는 부분은 ‘몸의 암시의 구원소’의 깔라빠 작용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Q.

이 바람의 요소, 몸의 암시로 인해 몸이 움직이는 메커니즘에 대해 궁금해하던 차에 전현수 박사님이 지은 ‘정신과 의사의 체험으로 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라는 책의 '10가지 추상물질' 대목에서 아래 내용을 보았습니다.

“추상물질 10가지는 구체물질이 일으키는 현상이라서 적절한 때에 식별한다. 추상물질을 식별하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 생긴 물질을 관찰한다. 나는 우 실라 스님이 “ 사선정에서 나와 의문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을 때 어떤 현상이 있는지 보라.”고 하여 그렇게 해봤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의문을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인해 물질이 생기는 것이었다. 하얀 연기처럼 깔라빠가 생겨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때 ‘마음으로 생긴 물질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다음에 우 실라 스님은 손을 움직이려고 할 때 어떤 현상이 있는지 보라고 했다. 그래서 지켜봤더니 손을 움직이려고 하는 마음에 의해 생긴 물질이 의문에서 손으로 이동하여 손에 닿자 손이 움직여졌다. 손을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긴 깔라빠의 바람의 밂이 중심이 되어 손을 움직이게 한다. 추상물질 가운데 몸 암시가 있다. 몸 암시는 몸의 움직임이다. 몸이 움직일 때 어떻게 해서 움직이는지를 보고 몸 암시가 물질 현상인 것을 알았다. 전에 아비담마를 배울 때 몸을 움직이는 몸 암시를 왜 물질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마음에서 만든 물질이 몸의 움직임을 만드니 물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비담마에서 지식으로 배운 것을 실제 수행을 통해 직접 보니 이해가 되었다. 아비담마에 나오는 것은 수행을 해서 경험한 것인데 수행 없이 이해하려니 이해가 어려웠던 것이다.”

위 대목에서 몸이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대부분 설명하지만, 제가 궁금했던 것은 네 가지 자세에 대한 마음챙김을 일상에서는 어느 정도로 수행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위 내용은 좌선을 통해 선정에 이르고 난 후 깔라빠를 보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맛지마 니까야 1권 P.336-337 (M10) 6번 문단과 그에 대한 369번 주해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는데요.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갈 때에는 '가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 서 있을 때에는 '서 있다'고 꿰뚫어 알며,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다'고 꿰뚫어 알고, 누워있을 때에는 '누워있다'고 꿰뚫어 안다.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
" '꿰뚫어 안다(pajānāti)'는 것은 통찰지(paññā)이다. 본성(sabhāva)을 있는 그대로 여러 측면에서 통찰한다(paṭivijjahatī)는 말이다."(MA.i.251)

보통 통찰지는 위빳사나를 통한 지혜를 의미하니 이것 역시 고도의 집중력이나 지혜를 토대로 네 가지 자세를 꿰뚫어 보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위 두 가지 대목에서 오히려 네 가지 자세에 대한 마음챙김을 일상에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좀 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일상에서 가고 서고 앉고 누울 때 좌선을 하는 것처럼의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할 텐데 어떤 방식으로 일상에서의 네 가지 자세에 마음챙김을 해야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현재 몸의 움직임과 자세 등에 마음챙겨 이런 움직임과 자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챙기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몸이 움직일 때 ‘마음에서 생긴 깔라빠가 몸의 이 움직임을 만들고 있다’는 식으로 떠올리며 현재 움직임이나 자세를 마음챙기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것은 실제 깔라빠를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것을 상기하며 마음챙겨야 하는 것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더하여 앞서 인용한 전현수 박사의 글의 같은 부분에는 아래와 같이 일상에서도 물질 깔라빠를 보는 마음챙김의 경지가 있는 것도 같았는데, 이런 부분은 실제 수행의 힘이 어느 정도 올라왔을 때 가능한 것인지도 궁금했었습니다.

“추상물질인 말 암시도 마찬가지다. 말을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마음에서 생긴 물질이 성대를 포함하여 온몸으로 퍼진다. 그렇게 마음에서 생긴 깔라빠의 땅 물질과 성대에 있는 업에서 만든 깔라빠의 땅 물질이 부딪쳐 소리가 난다. 그래서 말소리도 물질 현상이다. 수행으로 이를 경험할 수 있는데, 작은 소리로 천천히 하면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을 먹었을 때 물질이 생성되고, 움직이려는 생각을 했을 때 물질이 나와서 이동하는 것을 본 이후로는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때 물질이 나와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자연스레 현재에 집중이 되었고, 어떤 정신 작용에서도 물질이 생성되는 것이 보였다.”

 

A.

질문이 아주 좋습니다. 실제 내가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려고 하면 반드시 가지게 되는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에 대한 기본 사항은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위빳사나 백문백답, 마하시 사야도,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이솔출판, 2014.

붓다북에 검색해 보니 판매를 하는군요.
https://buddhabook.co.kr/product/detail.html?product_no=16694&cate_no=166&display_group=1

이 책이면 수행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은 충분하게 확인할 수 있을 듯합니다.
초기불교 수행법이 많이 있지만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법이 기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마하시 계열에 속한 스님께 지도를 받고 있고요.

어떤 한 사람의 수행 경험을 가지고 그것을 분석하거나 하는 일은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수행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것이지요.
전현수 박사님께서 경험한 것 역시 박사님께서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다른 사람이 참고해야 할 것이지는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박사님께서 ‘암시의 물질’에 대해 설명한 부분 역시 ‘개인적인 설명’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인 설명’이라고 해서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 자기가 경험한 것은 분명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아비담마 이해와 관련 지어 일반화하여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와 같은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아비담마 길라잡이』, 『청정도론』 등에 설명되어 있는 정도를 ‘믿을 수 있는 설명’으로 간주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보여집니다.

‘실제 수행을 통해 암시의 물질을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논의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위빳사나의 대상에는 ‘추상적 물질’이 제외되지요. 구체적 물질에 한정하고 있습니다. 아비담마나 주석서에서는 ‘암시의 물질’ 같은 용어를 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지만, 실제 수행에서 우리가 ‘암시의 물질’을 관찰 대상으로 삼을 일은 없을지 모릅니다.

실제 수행에서는 ‘감’ ‘간다’, ‘부풂’ ‘부푼다’, 이렇게 관찰하라고 이야기하지요. ‘바람의 요소’ ‘암시의 물질’ 이렇게 관찰하라고 가르치지도 않고요. 제가 적어드린 <위빳사나 백문백답>을 잘 읽어보시면 왜 그렇게 되는지도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수행과 관찰의 기본은 ‘할 수 있을 만큼’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관찰해야 하는가?
‘할 수 있을 만큼’ 관찰하라고 다들 가르칩니다.

일반적으로 1초에 하나 이상을 관찰하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관찰하는 것도 그 정도 수준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집중력과 통찰력이 늘어날수록 더 상세하게 관찰이 가능하겠지요.

걷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예로 들면 처음에는 ‘오른발’, ‘왼발’ 이렇게 명칭을 붙이며 걷기 명상을 하라고 그럽니다.
일반적으로 산책하며 걸을 때는 ‘오른발’이 나아가면 ‘오른발’이라고 명칭을 붙이고 오른발 쪽을 관찰하여 알 수 있는 만큼 관찰하라고 하지요. ‘오른발’이라고 명칭을 붙였다고 해서 ‘오른발인지 왼발인지’ 정도만 구별하며 걸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른발 쪽에서 느낄 수 있는, 발이 나아가는 것, 발이 바닥이 닿는 것 등등을 ‘할 수 있을 만큼’ 관찰하면서 걸으라는 뜻입니다.

1단계는 ‘오른발 - 왼발’
2단계는 ‘듦 - 놓음’
3단계는 ‘듦 - 나감 - 놓음’

이런 식으로 수행하라고 하지요.

이 걷기 명상은 일상에서 걷는 것이 아니고 수행처에서 천천히 경행을 할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산책을 하면서 걸을 때는 이렇게 적용하기가 어렵지요.

수행은 앉는 수행(좌선), 걷는 수행(행선), 일상수행,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걷는 것도 ‘걷는 수행’으로 할 때와 일상수행으로 할 때가 다른 것이지요.
일상수행에서 걸을 때는 훨씬 빠르게 걷게 되기 때문에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훨씬 적습니다.

‘관찰할 수 있을 만큼’의 원칙에 따라 ‘많이 지치지 않고 편안하게 관찰할 수 있는 정도’로 관찰하면 되는 것이지요.
‘오른발-왼발’ ‘오른발-닿음-왼발-닿음’ ‘닿음-닿음’ ‘감-감’ 등등...
현재의 자기의 다리쪽, 발쪽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며 마음챙기며 관찰하면 되는 것이지요.

제가 길게 설명드리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비담마의 설명과 실제 수행에서 관찰하는 것은 같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아비담마는 전체 원리를 설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자들의 영역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같은 범부는 ‘범부’인 상태에서 수행을 해야 하지요.
‘담마와 빤냣띠’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에서 ‘법’을 관찰해야 하는 상황이지요.
‘부풂 - 꺼짐’을 관찰하라고 지도하지 ‘바람의 요소 - 바람의 요소’를 관찰하라고 지도하지는 않는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바람의 요소’를 관찰하라고 하면 그것을 관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대강 이해하고 관찰하려고 한다고 해도 ‘머리가 복잡합니다.’ 즉각적으로 몸의 현상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부풂’이라고 하면 즉각적으로 별 복잡한 사유 필요 없이 관찰이 가능하지요.

점점 설명이 길어지고 있어요.
제가 알려드린 책을 꼭 일독해 보십시오.

더 깊은 내용은 <위빳사나 수행 방법론>Ⅰ과 Ⅱ에 있지만 책이 방대합니다.
실제 수행은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하며 진행되지 않지요.

정말 단순한 지식, ‘나는 물질과 정신으로 되어 있다’ 정도만 알면 수행하는 데 지장이 없다고들 합니다.
수행을 지도하는 스승이 있다면 그 정도로도 충분한 것이지요.
스승이 그만큼 중요하고, 좋은 스승을 만났다면 수행은 바로 시작해도 되는 것이지요.

수행 스승의 가르침대로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실제 실천하다 보면, 결국 칠청정 같은 단계를 거쳐 순차적으로 도와 과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요. 칠청정을 세세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도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고 아니고, 칠청정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쉽게 도과를 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칠정정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이, 수행 스승의 말씀도 잘 들으면 그분은 누구보다 빨리 도과를 얻게 되겠지요.
칠청정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도, 수행 스승의 말씀대로 잘 실천하면 빠르게 도과를 얻게 되겠지요.
칠정정에 대해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수행 스승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면 빠르게 도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고요.

교학적인 이해와 수행의 실천은 수레의 양 바퀴와 같습니다.
다만 좋은 수행 스승을 만나면 일거에 둘 다를 성취할 수 있게 되겠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정도’로는 절대 도과를 얻을 수는 없지요.
실제로 법을 경험해야, 법의 무상·고·무아를 본 사람만이 도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비담마는 아비담마대로 철저하게 이해를 하고
수행은 수행대로 스승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대로 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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